이 세상 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원인과 원초적인 질료를 찾으려고 했던 겁니다. (중략) 그것을 물이라고 했습니다. 물만 물이 아니라, 흙도 나무도 심지어 불도 다 물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것이 결국에는 다시 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을 있게 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고 했던 탈레스의 노력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을 추구하는......
▲ 아리스토텔레스 흉상(이미지 출처 : pixabay)
‘철학자’는 그리스 말로 ‘필로소포스’(philosophos)인데,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철학자가 있겠지요? 이 글을 쓰는 저나, 읽는 여러분이나 모두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이니, 우리 모두 철학자인 거 맞지요? 그런데 ‘철학자’라고 하면, 좀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특히 ‘철학’을 엄격하고 좁게 정의한다면 더욱 더 그렇지요.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의 정의가 대표적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세상을 접하는 단계, ‘감각’ ‘기억’ ‘경험’
우리가 세상을 접하는 첫 단계는 감각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창을 열면 바깥 풍경이 보이지요. 새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얼굴과 피부에 스칩니다. 밥 짓는 냄새가 구수하고,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으니 밥알에서 터져 나오는 단맛이 참 좋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몸의 즉각적이고 생생한 감각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느끼고 알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감각을 닫는 순간, 생생한 감각은 곧 사라집니다. 눈을 감으면 생생하던 장면은 즉각 사라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요. 코를 막으면 냄새가 안 나고, 귀를 막으면 소리가 안 들립니다. 음식이 목을 넘어가면, 맛은 사라집니다. 아, 그래도 뭔가 계속 느낀다고요? 그것은 감각이 아닙니다. 감각으로 얻은 정보가 머리나 몸에 남은 여운, 즉 기억이지요. 기억은 세상에 대해 우리의 앎이 만들어지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감각만 있고 기억이 없다면, 정보는 축적되지 않습니다. 더 많은 것을 더 오래 기억할수록 더 고등한 동물이고 더 똑똑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기억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대형마트 시식코너를 한 번 떠올려 볼까요? 직원이 깍둑깍둑 썰어놓은 수박 한 조각을 입에 넣습니다. 사각거리는 식감에 단맛의 과즙이 입안을 가득 채웁니다. 정말 맛있네요. ‘그래, 이걸 사자’ 결심합니다. 시식대 앞에 놓인 수박조각이요? 아니죠. 아직 칼을 대지 않은 수박 한 통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먹은 것은 시식대에 놓인 수박의 한 조각인데, 왜 먹어보지도 않은 다른 수박 한 덩어리를 통째로 사는 걸까요? 저는 ‘이것이 맛있으니까, 저것도 분명 맛있을 거야. 같은 밭에서 같은 농부가 정성껏 키웠을 테니까.’라고 추론한 거죠. 한 대상에 대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감각과 기억을 전혀 맛본 일이 없는 다른 대상에 대한 판단으로 연결시키는 이 지적인 추론 능력은 뭘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능력을 ‘엠페이리아’(empeiria)라고 했는데, ‘경험’이라고 번역됩니다. 제가 수박 조각을 먹고 맛있다고 기억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경험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추론하여 새롭게 나타난 대상에 대해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통념하곤 좀 다르지요? 어쨌든 이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는 삶의 여러 부분에서 아주 유용하며 큰 힘을 발휘하지요. 아이가 울 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즉시 알아차리고 처방하는 할머니의 솜씨나, 직장에서 터진 문제에 모두들 쩔쩔매고 있을 때, 멋지게 해결하는 선배들의 경륜은 이런 경험의 능력에서 나온 겁니다.
‘경험’을 넘어 ‘원인과 원리’를 추구해야 철학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궁극의 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아이가 뜨거운 물에 손을 대었을 때, 할머니가 얼른 감자를 갈아 화기를 가라앉히면 사람들은 할머니에게 감탄하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물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할머니, 감자가 ‘왜’ 화기를 가라앉히나요?” 할머니의 대답은 뭘까요?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댄 데엔 감자가 최고야.” 할머니는 치유의 방법은 알지만, 치유의 원인과 이유는 모르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과 이유, 원리를 아는 것이 참된 지식(epistēmē)이며 지혜(sophia)고, 그런 지혜를 사랑하여(philo-)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철학(philosophia)이라고요. 특히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궁극적인 원인과 이유, 제일의 원리를 찾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철학이 되겠지요. 이런 식이라면, 할머니는 경험적 지혜는 있지만 철학적 지혜는 없고, 원인을 찾으려는 철학적인 노력을 하진 않았다고 해야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식의 철학을 최초로 한 사람을 탈레스(기원전 642-546년)라고 지목합니다. 탈레스는 밀레토스의 정치ㆍ외교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고, 기후를 예측해서 올리브 수확량을 가늠하여 떼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실용적인 지혜가 풍부한 사람이었지요. 천문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일식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도 했습니다. 끊임없는 탐구와 노력을 통해 다재다능하고 박학다식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일곱 현인의 하나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가 보여준 실용적인 현명함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탈레스 이전에도 없었고 탈레스에게만 있는 아주 특별한 점을 찾아냈지요.
탈레스, 만물의 근본 원인을 찾으려 애쓰다
그것은 그의 질문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 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원인과 원초적인 질료를 찾으려고 했던 겁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물들이 있고 시시각각 변하지만, 그 모두를 있게 한 질료는 하나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그것을 물이라고 했습니다. 물만 물이 아니라, 흙도 나무도 심지어 불도 다 물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것이 결국에는 다시 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을 있게 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고 했던 탈레스의 노력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을 추구하는 철학이라 생각하고서,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라 불렀던 겁니다. 비록 탈레스는 스스로를 철학자(philosophos)라고 한 적도 없고, 또 만물이 물이라는 그의 답은 ‘틀렸지만’, 그의 물음은 틀리지 않았고, 그 이후에 이어질 철학의 길을 활짝 열었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과연 모든 것의 원인과 이유를 찾는 그런 탐구만이 철학일까요? 지혜(sophia)와 철학(philosophia)을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정의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요? 당대 그리스인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동의했을까요? 따지고 보면, 그는 철학이라는 개념을 스스로 정의해 놓고 그에 맞는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자의적으로 지목한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철학과는 다른 길을 갈 수는 없을까요? 다른 길을 간다면, 어떤 질문을 던지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고전학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졸업 및 같은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Université de Strasbourg) 서양고전학 박사. 펴낸 책으로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이 있음. 서양고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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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라고?
- 철학의 뿌리를 찾아서 -
김헌
2020-10-15
이 세상 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원인과 원초적인 질료를 찾으려고 했던 겁니다. (중략) 그것을 물이라고 했습니다. 물만 물이 아니라, 흙도 나무도 심지어 불도 다 물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것이 결국에는 다시 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을 있게 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고 했던 탈레스의 노력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을 추구하는......
▲ 아리스토텔레스 흉상(이미지 출처 : pixabay)
‘철학자’는 그리스 말로 ‘필로소포스’(philosophos)인데,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철학자가 있겠지요? 이 글을 쓰는 저나, 읽는 여러분이나 모두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이니, 우리 모두 철학자인 거 맞지요? 그런데 ‘철학자’라고 하면, 좀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특히 ‘철학’을 엄격하고 좁게 정의한다면 더욱 더 그렇지요.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의 정의가 대표적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세상을 접하는 단계, ‘감각’ ‘기억’ ‘경험’
우리가 세상을 접하는 첫 단계는 감각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창을 열면 바깥 풍경이 보이지요. 새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얼굴과 피부에 스칩니다. 밥 짓는 냄새가 구수하고,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으니 밥알에서 터져 나오는 단맛이 참 좋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몸의 즉각적이고 생생한 감각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느끼고 알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감각을 닫는 순간, 생생한 감각은 곧 사라집니다. 눈을 감으면 생생하던 장면은 즉각 사라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요. 코를 막으면 냄새가 안 나고, 귀를 막으면 소리가 안 들립니다. 음식이 목을 넘어가면, 맛은 사라집니다. 아, 그래도 뭔가 계속 느낀다고요? 그것은 감각이 아닙니다. 감각으로 얻은 정보가 머리나 몸에 남은 여운, 즉 기억이지요. 기억은 세상에 대해 우리의 앎이 만들어지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감각만 있고 기억이 없다면, 정보는 축적되지 않습니다. 더 많은 것을 더 오래 기억할수록 더 고등한 동물이고 더 똑똑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기억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대형마트 시식코너를 한 번 떠올려 볼까요? 직원이 깍둑깍둑 썰어놓은 수박 한 조각을 입에 넣습니다. 사각거리는 식감에 단맛의 과즙이 입안을 가득 채웁니다. 정말 맛있네요. ‘그래, 이걸 사자’ 결심합니다. 시식대 앞에 놓인 수박조각이요? 아니죠. 아직 칼을 대지 않은 수박 한 통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먹은 것은 시식대에 놓인 수박의 한 조각인데, 왜 먹어보지도 않은 다른 수박 한 덩어리를 통째로 사는 걸까요? 저는 ‘이것이 맛있으니까, 저것도 분명 맛있을 거야. 같은 밭에서 같은 농부가 정성껏 키웠을 테니까.’라고 추론한 거죠. 한 대상에 대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감각과 기억을 전혀 맛본 일이 없는 다른 대상에 대한 판단으로 연결시키는 이 지적인 추론 능력은 뭘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능력을 ‘엠페이리아’(empeiria)라고 했는데, ‘경험’이라고 번역됩니다. 제가 수박 조각을 먹고 맛있다고 기억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경험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추론하여 새롭게 나타난 대상에 대해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통념하곤 좀 다르지요? 어쨌든 이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는 삶의 여러 부분에서 아주 유용하며 큰 힘을 발휘하지요. 아이가 울 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즉시 알아차리고 처방하는 할머니의 솜씨나, 직장에서 터진 문제에 모두들 쩔쩔매고 있을 때, 멋지게 해결하는 선배들의 경륜은 이런 경험의 능력에서 나온 겁니다.
‘경험’을 넘어 ‘원인과 원리’를 추구해야 철학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궁극의 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아이가 뜨거운 물에 손을 대었을 때, 할머니가 얼른 감자를 갈아 화기를 가라앉히면 사람들은 할머니에게 감탄하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물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할머니, 감자가 ‘왜’ 화기를 가라앉히나요?” 할머니의 대답은 뭘까요?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댄 데엔 감자가 최고야.” 할머니는 치유의 방법은 알지만, 치유의 원인과 이유는 모르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과 이유, 원리를 아는 것이 참된 지식(epistēmē)이며 지혜(sophia)고, 그런 지혜를 사랑하여(philo-)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철학(philosophia)이라고요. 특히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궁극적인 원인과 이유, 제일의 원리를 찾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철학이 되겠지요. 이런 식이라면, 할머니는 경험적 지혜는 있지만 철학적 지혜는 없고, 원인을 찾으려는 철학적인 노력을 하진 않았다고 해야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식의 철학을 최초로 한 사람을 탈레스(기원전 642-546년)라고 지목합니다. 탈레스는 밀레토스의 정치ㆍ외교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고, 기후를 예측해서 올리브 수확량을 가늠하여 떼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실용적인 지혜가 풍부한 사람이었지요. 천문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일식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도 했습니다. 끊임없는 탐구와 노력을 통해 다재다능하고 박학다식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일곱 현인의 하나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가 보여준 실용적인 현명함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탈레스 이전에도 없었고 탈레스에게만 있는 아주 특별한 점을 찾아냈지요.
탈레스, 만물의 근본 원인을 찾으려 애쓰다
그것은 그의 질문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 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원인과 원초적인 질료를 찾으려고 했던 겁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물들이 있고 시시각각 변하지만, 그 모두를 있게 한 질료는 하나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그것을 물이라고 했습니다. 물만 물이 아니라, 흙도 나무도 심지어 불도 다 물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것이 결국에는 다시 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을 있게 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고 했던 탈레스의 노력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을 추구하는 철학이라 생각하고서,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라 불렀던 겁니다. 비록 탈레스는 스스로를 철학자(philosophos)라고 한 적도 없고, 또 만물이 물이라는 그의 답은 ‘틀렸지만’, 그의 물음은 틀리지 않았고, 그 이후에 이어질 철학의 길을 활짝 열었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과연 모든 것의 원인과 이유를 찾는 그런 탐구만이 철학일까요? 지혜(sophia)와 철학(philosophia)을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정의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요? 당대 그리스인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동의했을까요? 따지고 보면, 그는 철학이라는 개념을 스스로 정의해 놓고 그에 맞는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자의적으로 지목한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철학과는 다른 길을 갈 수는 없을까요? 다른 길을 간다면, 어떤 질문을 던지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철학의 뿌리를 찾아서] 2.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라고?
[철학의 뿌리를 찾아서] 1. 그리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고전학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졸업 및 같은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Université de Strasbourg) 서양고전학 박사. 펴낸 책으로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이 있음. 서양고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2.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라고?'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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