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한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역사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역사 전공 신입생들을 당혹케 하는 것들
필자처럼 역사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이들은 종종 부러움의 시선을 받는다. 역사 공부가 재미 있어 보인다는 이유다. 특히 힘든 노동이나 위험한 실험실습 등이 필요한 분야 전공자들은 다시 태어나면 역사를 전공하고 싶다고도 한다. 마치 체중감량과 부상을 일상으로 겪는 투기 종목 선수가 골프 같은 종목 선수를 부러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일 뿐 무엇이든 전공으로 하는 것은 고통이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 동호인은 “평생 골프만 치고 살고 싶다”고 소망하지만, 프로선수는 골프채 보기가 지긋지긋하거나 두려울 때도 있는 것 같은 이치다.
그런데 역사를 전공으로 선택한 이들은 다른 분야 전공자가 전문성이 쌓일수록 힘들고 어려워하는 것과 달리 입문 과정부터 당혹감을 느낀다. 사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은 대개 첫 번째 전공과목으로 ‘역사학입문’(또는 ‘사학개론’)을 수강하는데, 첫 시간부터 자신이 알던 역사와는 이질감을 느낀다. 이 과목의 강의평가 자유문항 답변에는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 수업이 항상 재미있었고 성적도 좋아서 사학과에 입학했는데 예상과 너무 달랐다.”는 성토가 어김없이 있고, “전공 변경이 고민된다.”는 고백도 종종 나온다.
▲ 입문과정부터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역사학 공부(이미지 출처 : pixabay)
왜 이런 괴리감이 발생하는 것일까? 이는 역사 서술의 선택적 성격과 역사 해석의 다양성 때문이다. ‘역사’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과거의 사실 또는 그 기록”이다. 문제는 ‘그 기록’이 ‘과거의 사실’의 극히 일부로서 ‘과거의 사실’에 종속되어 있는데, 이러한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혼동의 원인은 ‘과거의 사실’이란 말의 모호함에 있다. ‘역사’를 정의하는 데 있어 ‘과거의 사실’은 개별 사실이나 선택적 사실이 아니라 지나간 사건 전부를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과거의 사실’의 광대함에서 역사 서술의 선택적 성격과 역사 해석의 다양성이 생겨난다.
역사기록은 과거 사실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서술한 것
이 글의 독자 모두에게 이 글을 읽는 즉시 오늘 하루 자신이 한 일과 생각한 바를 일기장에 담아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잠자리에 들기 전 이 글을 읽은 독자는 쓸 이야기가 매우 많을 것이고, 방금 잠에서 깨어난 독자는 쓸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도식적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각자의 세심함 정도와 기억력 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쓰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막 잠에서 깨어났으면서도 기침을 몇 번 했고 1분에 호흡을 몇 번 했는지까지 세세하게 꼽기도 할 것이다. 기침과 호흡은 너무 지엽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호흡기 환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처럼 모든 행동과 생각을 세세하게 적을 수는 없다. 쓰는 동안 또 생각하므로 쓰는 것이 써야 할 바를 따라잡지 못한다. 따라서 역사기록은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사실 가운데 일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를 전공으로 선택한 학생들이 입학 직후부터 느끼게 되는 당혹감은 이런 점에서 기인한다. 중고등학교까지는 선택된 기록과 해석을 이해하고 암기하는 공부를 하는 반면, 사학과에 입학한 이후부터는 그렇게 선택된 기록과 해석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여타 학문 분야를 전공하는 신입생들이 중고등학교 때 쌓은 기초를 복습하고 심화하는 것으로 전공 공부를 시작하는 데 반해, 역사 전공 학생들은 쌓았던 기초를 회의하고 해체하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 고려시대 역대왕 연표(이미지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놓으면, 난해한 역사학 공부는 전공 학생들이 수강하는 강의에서만 다루고, 이처럼 대중을 독자로 하는 지면에는 재미있는 역사 지식이나 역사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적합하다고 여길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역사 지식은 이미 역사 전공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줄줄이 꿰고 있는 것이 지식인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고, 그 자격을 속성으로 갖추기 위해 인명사전이나 역대 왕의 이름과 재위 기간 등이 기록된 역대연표(歷代年表)를 하나씩 구비해 놓기도 했다. 특히 지금처럼 볼거리가 많지 않고 역사기록에 충실한 사극 드라마가 가장 인기 있는 오락물이었던 시절에는 더욱 그러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형식의 드라마는 주요 인물의 생사를 다투는 장면에서 ‘다음 회에 계속’이란 자막으로 시청자들의 애를 태우는데, 과거에는 역사 사실을 꿰고 있거나 인명사전을 훔쳐본 이가 척척박사나 선지자의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간단한 검색만으로 그 전말을 쉽게 알 수 있어 그런 지식이 별로 대접받지 못한다. 오히려 스포일러 공개자로 비난받을 일이다.
역사공부, 암기보다 판단 능력 키워야
21세기의 역사 공부는 전공자와 교양인이 공부 방법을 달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정보가 공유되는 현대사회에서는 비전공자인 대중도 역사 지식을 단순히 암기하는 것을 넘어 공유한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역사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재야사학자’라는 말이 존재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재야’라는 말은 전문가 또는 전공자가 제도권에 속하지 않고 초야에 머무르고 있다는 뜻인데, ‘재야사학자’란 말은 특이하게 비전공자로서 역사를 연구하거나 저술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비전공자가 연구까지 할 정도로 애정을 쏟는다는 것은 전공자 입장에서는 한편으론 고마운 일일 수도 있으나, 문제는 그 과정에서 역사왜곡이 자행되고 대중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주는 폐해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본 연재에서는 역사기록의 구성 과정과 해석 방식 등 역사학의 기초를 독자들에게 소개하여, 역사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학 공부는 기초부터 난해하여 쉽게 공부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는 사례와 유쾌한 비유를 동반하면 어려운 공부의 고통은 조금 덜 수 있으리라 믿는다. 구체적 주제와 사례는 다음 연재부터 풀어놓겠다.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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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역사 이야기, 난해한 역사학 공부
-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
윤진석
2020-09-08
음성으로 듣기
6분 46초 읽기21세기의 역사 공부는 전공자와 교양인이 공부 방법을 달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정보가 공유되는 현대사회에서는 비전공자인 대중도 역사 지식을 단순히 암기하는 것을 넘어
공유한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역사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역사 전공 신입생들을 당혹케 하는 것들
필자처럼 역사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이들은 종종 부러움의 시선을 받는다. 역사 공부가 재미 있어 보인다는 이유다. 특히 힘든 노동이나 위험한 실험실습 등이 필요한 분야 전공자들은 다시 태어나면 역사를 전공하고 싶다고도 한다. 마치 체중감량과 부상을 일상으로 겪는 투기 종목 선수가 골프 같은 종목 선수를 부러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일 뿐 무엇이든 전공으로 하는 것은 고통이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 동호인은 “평생 골프만 치고 살고 싶다”고 소망하지만, 프로선수는 골프채 보기가 지긋지긋하거나 두려울 때도 있는 것 같은 이치다.
그런데 역사를 전공으로 선택한 이들은 다른 분야 전공자가 전문성이 쌓일수록 힘들고 어려워하는 것과 달리 입문 과정부터 당혹감을 느낀다. 사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은 대개 첫 번째 전공과목으로 ‘역사학입문’(또는 ‘사학개론’)을 수강하는데, 첫 시간부터 자신이 알던 역사와는 이질감을 느낀다. 이 과목의 강의평가 자유문항 답변에는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 수업이 항상 재미있었고 성적도 좋아서 사학과에 입학했는데 예상과 너무 달랐다.”는 성토가 어김없이 있고, “전공 변경이 고민된다.”는 고백도 종종 나온다.
▲ 입문과정부터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역사학 공부(이미지 출처 : pixabay)
왜 이런 괴리감이 발생하는 것일까? 이는 역사 서술의 선택적 성격과 역사 해석의 다양성 때문이다. ‘역사’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과거의 사실 또는 그 기록”이다. 문제는 ‘그 기록’이 ‘과거의 사실’의 극히 일부로서 ‘과거의 사실’에 종속되어 있는데, 이러한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혼동의 원인은 ‘과거의 사실’이란 말의 모호함에 있다. ‘역사’를 정의하는 데 있어 ‘과거의 사실’은 개별 사실이나 선택적 사실이 아니라 지나간 사건 전부를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과거의 사실’의 광대함에서 역사 서술의 선택적 성격과 역사 해석의 다양성이 생겨난다.
역사기록은 과거 사실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서술한 것
이 글의 독자 모두에게 이 글을 읽는 즉시 오늘 하루 자신이 한 일과 생각한 바를 일기장에 담아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잠자리에 들기 전 이 글을 읽은 독자는 쓸 이야기가 매우 많을 것이고, 방금 잠에서 깨어난 독자는 쓸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도식적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각자의 세심함 정도와 기억력 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쓰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막 잠에서 깨어났으면서도 기침을 몇 번 했고 1분에 호흡을 몇 번 했는지까지 세세하게 꼽기도 할 것이다. 기침과 호흡은 너무 지엽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호흡기 환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처럼 모든 행동과 생각을 세세하게 적을 수는 없다. 쓰는 동안 또 생각하므로 쓰는 것이 써야 할 바를 따라잡지 못한다. 따라서 역사기록은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사실 가운데 일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를 전공으로 선택한 학생들이 입학 직후부터 느끼게 되는 당혹감은 이런 점에서 기인한다. 중고등학교까지는 선택된 기록과 해석을 이해하고 암기하는 공부를 하는 반면, 사학과에 입학한 이후부터는 그렇게 선택된 기록과 해석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여타 학문 분야를 전공하는 신입생들이 중고등학교 때 쌓은 기초를 복습하고 심화하는 것으로 전공 공부를 시작하는 데 반해, 역사 전공 학생들은 쌓았던 기초를 회의하고 해체하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 고려시대 역대왕 연표(이미지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놓으면, 난해한 역사학 공부는 전공 학생들이 수강하는 강의에서만 다루고, 이처럼 대중을 독자로 하는 지면에는 재미있는 역사 지식이나 역사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적합하다고 여길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역사 지식은 이미 역사 전공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줄줄이 꿰고 있는 것이 지식인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고, 그 자격을 속성으로 갖추기 위해 인명사전이나 역대 왕의 이름과 재위 기간 등이 기록된 역대연표(歷代年表)를 하나씩 구비해 놓기도 했다. 특히 지금처럼 볼거리가 많지 않고 역사기록에 충실한 사극 드라마가 가장 인기 있는 오락물이었던 시절에는 더욱 그러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형식의 드라마는 주요 인물의 생사를 다투는 장면에서 ‘다음 회에 계속’이란 자막으로 시청자들의 애를 태우는데, 과거에는 역사 사실을 꿰고 있거나 인명사전을 훔쳐본 이가 척척박사나 선지자의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간단한 검색만으로 그 전말을 쉽게 알 수 있어 그런 지식이 별로 대접받지 못한다. 오히려 스포일러 공개자로 비난받을 일이다.
역사공부, 암기보다 판단 능력 키워야
21세기의 역사 공부는 전공자와 교양인이 공부 방법을 달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정보가 공유되는 현대사회에서는 비전공자인 대중도 역사 지식을 단순히 암기하는 것을 넘어 공유한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역사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재야사학자’라는 말이 존재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재야’라는 말은 전문가 또는 전공자가 제도권에 속하지 않고 초야에 머무르고 있다는 뜻인데, ‘재야사학자’란 말은 특이하게 비전공자로서 역사를 연구하거나 저술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비전공자가 연구까지 할 정도로 애정을 쏟는다는 것은 전공자 입장에서는 한편으론 고마운 일일 수도 있으나, 문제는 그 과정에서 역사왜곡이 자행되고 대중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주는 폐해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본 연재에서는 역사기록의 구성 과정과 해석 방식 등 역사학의 기초를 독자들에게 소개하여, 역사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학 공부는 기초부터 난해하여 쉽게 공부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는 사례와 유쾌한 비유를 동반하면 어려운 공부의 고통은 조금 덜 수 있으리라 믿는다. 구체적 주제와 사례는 다음 연재부터 풀어놓겠다.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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