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기준이 높은 이상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라면 갈등이 생겼을 때 강제적 법이 아닌 자율적 양심으로 해결하겠지만
현실의 인간, 이기적이고, 각자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현실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라면 갈등을 불러일으킨 행동에 대해 법의 규제가 불가피합니다.
이처럼 법과 도덕의 거리는 사회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성향과 합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법과 도덕의 거리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법과 도덕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
도덕적 양심에 따르는 것이 항상 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법에 따르는 것이 항상 도덕적 양심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였던 소포클레스가 쓴 <안티고네>1)처럼 도덕적 양심에 따르는 것이 법에 어긋나는 경우도 있고, 세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처럼 기가 막히게 법을 따르면서도 도덕적 양심은 전무한 경우도 있습니다. 철학자 칸트는 법과 도덕의 구별을 두고 강제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말하였습니다. 법은 인간의 외부적 행동에 관한 강제적 규범이고, 도덕은 내면적 동기에 관한 자율적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법과 도덕이 서로 무관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엘리네크(독일의 법학자. 1851~1911)의 말은 도덕의 범위가 법보다 넓다는 것이고 법은 도덕 중의 일부를 규제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 법이 도덕의 고유 영역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입장이기도 하지요.
1) 안티고네(Antigone)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테바이 왕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국왕의 명령을 어기고 전쟁터에서 죽은 오빠의 죽음을 돌보는 인물. 편집자주
▲ 오빠의 시체를 찾아 나선 안티고네(이미지 출처 : 그리스 국립 미술관)
법과 도덕의 관계에 있어서 또 다른 입장은 법이 도덕을 증진하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는 보다 적극적인 관점입니다. 도덕의 문제에 법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도덕을 고취시키는 데에 법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덕을 중시하던 전통 사회에서 도덕을 더 잘 지키도록 법으로 규제하던 방식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는 개인이 가진 내면의 영역까지 법이 강제적으로 간섭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도덕적 기준이 높은 이상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라면 갈등이 생겼을 때 강제적 법이 아닌 자율적 양심으로 해결하겠지만 현실의 인간, 이기적이고, 각자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현실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라면 갈등을 불러일으킨 행동에 대해 법의 규제가 불가피합니다. 이처럼 법과 도덕의 거리는 사회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성향과 합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법과 도덕의 거리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법정은 도덕을 실현하는 곳일까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법으로는 이겼지만 도덕적으로는... 영화 <행운의 반전>
배우 글렌 클로즈,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연을 맡았던 <행운의 반전(Reversal Of Fortune)>(1990)은 1980년대 미국 최고의 스캔들이었던 변호사 클라우스 본 뷸러의 아내 살인 미수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클라우스 본 뷸러는 의식 불명이 된 아내 서니를 방치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후 두 차례의 살인미수 혐의 때문에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30년 형을 받은 피고입니다. 서니는 콜롬비아 가스 전기 회사 사장의 외동딸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아름다운 인물. 그녀는 젊은 나이에 오스트리아 왕자와 결혼하여 두 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남편의 잦은 외도로 이혼했고, 덴마크 출신 변호사 클라우스와 결혼해 딸을 낳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클라우스 또한 외도가 잦아져 결혼 생활이 평탄치 못했고, 서니는 이에 절망하여 아스피린과 인슐린과 같은 약물을 과다하게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 영화 <행운의 반전> 포스터(이미지 출처 : 워너브러더스)
법정에 오른 문제의 사건은 1980년 크리스마스 즈음 서니가 인슐린 과다로 혼수상태에 빠져 화장실 바닥에 쓰러진 후 식물인간 상태에 됐을 때 클라우스의 의붓 자녀들이 클라우스에게 살인 미수죄를 씌워 고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기 한 해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서니는 같은 이유로 혼수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클라우스는 서니의 상태에 불안을 느낀 하녀 마리아가 의사를 부르려는 것을 만류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클라우스는 두 번의 살인미수 혐의를 받게 된 것입니다.
▲ 영화 <행운의 반전>의 한 장면(이미지 출처 : 워너브러더스)
이 사건에서 클라우스는 매우 불리한 입장이었습니다. 아내의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자녀들이 새아버지가 막대한 유산을 노리고 어머니를 살해하려 했다는 것으로 몰아갔는데, 이들은 검사 출신 변호사를 사립 탐정으로 고용하여 불법 수색을 했고, 치밀하게 증거를 수집한 후 클라우스의 유죄를 추정할 만한 증거들만 선별적으로 법정에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증거들에 맞게 하녀 마리아와 말을 맞춰 클라우스를 범인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클라우스의 살해 동기는 충분했습니다. 사건 당시 클라우스는 이혼을 원했고 서니 또한 마지못해 이혼을 주겠다고는 했지만 만약 이혼을 하게 되면 위자료를 단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했던 결혼 전 계약 때문에 클라우스는 빈털터리로 집을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서니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면 클라우스는 합법적으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 영화 속 앨런 더쇼비츠 변호사(이미지 출처 : 워너브러더스)
영화에서 클라우스는 항소 기한을 얼마 남기지 않고 하버드 법대 교수인 앨런 더쇼비츠에게 변호를 의뢰합니다. 클라우스가 항소를 의뢰할 당시 앨런은 무고한 흑인 형제의 살인 혐의를 위해 무료 변호를 했으나 그들의 사형을 막지 못한 것에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죄임이 명백해 보이고, 모든 미국인들이 싫어하는 평판 나쁜 바람둥이의 변호를 수락하자 이에 반발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앨런은 그녀에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완벽히 유죄로 생각되는 사람이 있더라도 변호사만큼은 그를 옹호해주어야 한다는 임무를 설명합니다. 만일 히틀러가 자신을 찾아와 변호를 부탁한다면 변호를 맡든가 그를 죽이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자신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를 위해 변호를 하겠다고 합니다. 이후 앨런은 자신의 수제자들을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클라우스의 유죄 사유가 된 정황 증거들의 허점과 위증을 밝혀내며 클라우스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영화의 결말에서 항소심에서 이겨 기뻐하는 클라우스에게 앨런은 ‘법으로는 이겼지만 도덕적으로도 이긴 것’은 아니라는 씁쓸한 한마디를 남깁니다. 법과 도덕의 분리를 확인하고 법정의 승리가 도덕의 승리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말입니다.
▲ 클라우스 본 뷸러와 앨런 더쇼비츠의 실제 모습(이미지 출처 : 보스턴글로브)
앨런도 다른 사람들처럼 클라우스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부유하고 아름다운 상속녀와 결혼하였음에도 숱한 외도로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않았고 아내가 식물인간이 된 것에 대해 동정심을 갖지 않았으며 재판 중에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기색 하나 없이 거만하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도덕성의 기준에서 본다면 클라우스는 구제불능의 인간입니다. 그러나 앨런은 클라우스의 변호를 맡은 이상 도덕의 잣대는 잠시 내려놓고 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앨런은 법정이 클라우스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도덕적 평판 때문에 유죄를 받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신념 때문입니다. 만약 클라우스를 유죄로 판결하면 다음에는 그 어떤 누구라도 그의 도덕적 평판 때문에 유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좋아할 수 없다고 해서 무고한 죄를 덮어씌울 수는 없습니다. 법의 냉정함은 그런 사람들까지도 지켜줄 의무가 있습니다.
유력한 정황증거들을 날려버린 인종주의, <O.J. 심슨 파일>
클라우스의 변호를 맡았던 앨런 더쇼비츠가 관여한 또 하나의 유명한 사건이 O.J. 심슨의 이중 살인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넷플릭스의 <O.J. 심슨 파일 :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즌 1>(2016)을 통해 총 10편의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제작되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1994년 LA의 부자들이 사는 마을의 주택 앞에 참혹하게 살해당한 남녀가 발견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자는 유명 미식축구 선수 O.J. 심슨의 전처 니콜 브라운이고 남자는 그녀와 가까이 지냈던 로널드 골드먼이었습니다. 사건 직후 경찰은 사건 현장의 정황증거에 의해 O.J. 심슨을 용의자로 지목했습니다. O.J. 심슨은 무죄를 주장하며 유명인 전문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1주일 후 경찰청에 출두하기로 한 날 유서만 남긴 채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포드 브롱코를 타고 도주를 시도했습니다.
▲ O.J. 심슨 파일 :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즌 1 포스터(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그의 도주와 경찰의 추격 현장이 생중계되는 바람에 미국의 전 국민이 하루 종일 도주 현장을 반복적으로 시청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O.J. 심슨의 재판은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검찰이 주장하는 O.J. 심슨의 유죄는 유력해 보였습니다. 정황증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범행 현장에 O.J. 심슨의 혈흔이 있었다.
⦁ O.J. 심슨의 모발이 묻은 모자가 니콜과 로널드 시신 옆에 있었다.
⦁ O.J. 심슨의 가죽 장갑 한 짝이 시신 사이에 있었다.
⦁ 다른 한 짝의 장갑에는 피해자의 모발이 묻어 있고, 피해자와 O.J. 심슨의 피도 묻어 있고, 이 장갑은 O.J. 심슨의 집 바로 밖에서 발견되었다.
⦁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약간 안짱다리로 보이는 12사이즈의 신발 자국에 피해자의 혈흔이 묻어 있었는데 O.J. 심슨도 같은 사이즈이고, 그 역시 약간 안짱다리이다.
⦁ 현장에 있는 신발 발자국은 브루노말리 제품이며 이 신발 자국이 O.J. 심슨의 흰색 포드 브롱코 운전석 쪽 카펫에 묻어 있다.
⦁ O.J. 심슨의 피가 O.J.심슨 저택 내 찻길에서 집 쪽으로, 침실과 욕실 쪽으로 흘러 있다.
⦁ O.J. 심슨은 살인 사건 후 손에 무언가에 베인 상처가 있었는데 왜 생겼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 양말이 O.J. 심슨 침실 바닥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양말에 O.J. 심슨과 니콜의 피가 묻어 있다.
⦁ 진한 색깔의 스웨터와 일치되는 남색 면섬유가 범행 현장과 O.J. 심슨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O.J. 심슨이 범행시점에 자신의 집과 니콜의 집 두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 증인이나 자백을 직접증거라고 하는데 이 사건의 경우에는 직접증거는 없고 정황증거만 있었습니다. O.J. 심슨이 살해자라는 정황증거만 있기 때문에 그가 무죄라는 사실에 대한 추론이 배제되어야 유죄가 입증되는 상황이었습니다.
▲ 드라마 속 O.J. 심슨 재판 모습(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이처럼 O.J. 심슨이 유죄라는 유력한 정황증거들이 넘쳐났고 변호인단이 시험 삼아 진행한 거짓말 탐지기에서도 그의 유죄가 확실해 보였지만 그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더구나 그의 변호인단은 드림팀이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했습니다. 아내 살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에 대해 적정 절차에 대한 권리 침해를 근거로 항소심에서 승소한 바 있는 변호사들과 DNA 전문 변호사, 배심원들의 마음을 설교하듯 사로잡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변호사까지 합세하여 당시 최고의 변호인단이었습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전략으로 앞서 열거한 유력한 정황증거들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요?
미국에서 민사소송은 배심원들에게 피고가 범인일 개연성이 높다는 심증이 서도록 입증만 하면 되지만 형사재판에서 검사는 배심원들이 ‘합리적 의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피고인의 죄를 입증해야 합니다. ‘합리적 의심’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검사의 입증책임 기준은 민사소송에서 원고 측이 입증해야 할 ‘증거의 우월’보다 훨씬 높은 기준입니다. 형사재판에서 유죄를 받게 되면 그 형벌의 무게가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드림팀 변호인단의 전략은 당연히 정황증거들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 1992년 미국 LA 폭동 당시 현지 언론기사(이미지 출처 : 뉴욕데일리뉴스)
O.J. 심슨이 무죄를 판결 받기까지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은 검사 측 증인인 형사 마크 퍼먼이었습니다. O.J. 심슨 사건이 발생한 LA에서는 2년 전, 1992년 LA폭동이 있었습니다. 흑인 시민을 백인 경찰들이 집단 구타하여 생겨난 사건인 만큼 백인 경찰에 대한 흑인들의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O.J. 심슨을 용의자로 몰고 간 형사 퍼먼이 심각한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재판의 분위기가 역전된 것입니다. O.J. 심슨의 변호인들은 이를 교묘히 이용하였습니다. 변호인이 O.J. 심슨을 수사한 퍼먼에게 인종차별적 언행에 관해 질문을 연속으로 제기하자 퍼먼은 처음부터 변호인의 모든 심문에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결정적인 질문, ‘이 사건의 증거를 조작했느냐’를 물었고, 이 질문에조차 퍼먼이 묵비권을 행사하자 배심원 모두가 동요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모든 유력한 정황증거들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 실제 재판현장에서 마크 퍼먼 형사 모습(사진 앞)(이미지 출처 : AP Photo/Reed Saxon, File)
퍼먼의 과거 인종차별적 충격 발언과 그의 생각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뿐만 백인 배심원의 도덕 감정까지 뒤흔든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인종차별적 언행은 상대를 위협하거나 증오범죄 행위와 연결되는 경우가 아니면 불법이 아닙니다. 퍼먼은 O.J. 심슨의 재판 후 경찰관직에서 해임되었는데 그 이유는 인종차별적 언사가 아닌 처음 증언대에 올랐을 때 그런 언사를 한 적이 없다고 한 ‘위증’ 때문이었습니다.
▲ 무죄판결을 받은 직후 실제 O.J. 심슨 모습(사진 가운데)(이미지 출처 : Myung J. Chun/AP Images)
결국 12명의 배심원들이 유력한 정황증거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O.J. 심슨에게 무죄를 판결하게 한 것은 순전히 법의 관점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직접적으로는 퍼먼이 증거를 조작했느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것 때문이지만, 그 근저에는 인종차별적 경찰에 대해 분노하는 도덕 감정이 끓어오른 것입니다. 인종차별이 근절되어야 한다는 뜨거운 도덕적 감정이 유력한 정황증거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은 무참히 살해된 피해자들에게 매우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민사소송이 ‘증거의 우월’을 중시하는 덕분에 앞서 드러난 정황증거들이 모두 인정되어 피고에게 막대한 배상금이 선고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떨 땐 법이, 어떨 땐 도덕이
<행운의 반전>과 <O.J. 심슨 파일 :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즌 1>은 사회적 분위기와 평판, 도덕이 법에 개입하는 서로 다른 방식입니다. <행운의 반전>에서는 도덕적 평판이 좋지 못한 피고를 도덕의 잣대가 아니라 정황증거의 부적합성을 근거로 혐의를 벗겨준 판결이고, <O.J. 심슨 파일 :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즌 1>은 유력한 정황증거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을 허용할 수 없다는 도덕 감정이 어쩌면 유죄일 수 있는 피고를 무죄로 만들어준 판결입니다. 냉정한 법과 열정적인 도덕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할까요? 도덕의 열정이 억울한 사람 하나 없도록 모두에게 온기가 될 수 있는지, 법의 냉정함이 모두의 미움을 받을지라도 무고한 어느 한 사람의 누명마저 벗겨줄 수 있는지에 답이 있을 것입니다.
숭실대 교수.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논문 〈존 듀이의 경험 미학과 예술 교호작용〉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숭실대학교 베어드교양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글쓰기와 독서토론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나나의 논리대왕 도전기』, 『중학생 토론학교 사회와 문화』, 『소설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세종도서 선정)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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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도덕의 거리, 어쩌면 냉정과 열정사이
법정은 도덕을 실현하는 곳인가
박연숙
2020-07-10
음성으로 듣기
15분 33초 읽기도덕적 기준이 높은 이상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라면 갈등이 생겼을 때 강제적 법이 아닌 자율적 양심으로 해결하겠지만
현실의 인간, 이기적이고, 각자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현실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라면 갈등을 불러일으킨 행동에 대해 법의 규제가 불가피합니다.
이처럼 법과 도덕의 거리는 사회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성향과 합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법과 도덕의 거리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법과 도덕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
도덕적 양심에 따르는 것이 항상 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법에 따르는 것이 항상 도덕적 양심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였던 소포클레스가 쓴 <안티고네>1)처럼 도덕적 양심에 따르는 것이 법에 어긋나는 경우도 있고, 세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처럼 기가 막히게 법을 따르면서도 도덕적 양심은 전무한 경우도 있습니다. 철학자 칸트는 법과 도덕의 구별을 두고 강제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말하였습니다. 법은 인간의 외부적 행동에 관한 강제적 규범이고, 도덕은 내면적 동기에 관한 자율적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법과 도덕이 서로 무관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엘리네크(독일의 법학자. 1851~1911)의 말은 도덕의 범위가 법보다 넓다는 것이고 법은 도덕 중의 일부를 규제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 법이 도덕의 고유 영역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입장이기도 하지요.
1) 안티고네(Antigone)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테바이 왕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국왕의 명령을 어기고 전쟁터에서 죽은 오빠의 죽음을 돌보는 인물. 편집자주
▲ 오빠의 시체를 찾아 나선 안티고네(이미지 출처 : 그리스 국립 미술관)
법과 도덕의 관계에 있어서 또 다른 입장은 법이 도덕을 증진하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는 보다 적극적인 관점입니다. 도덕의 문제에 법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도덕을 고취시키는 데에 법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덕을 중시하던 전통 사회에서 도덕을 더 잘 지키도록 법으로 규제하던 방식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는 개인이 가진 내면의 영역까지 법이 강제적으로 간섭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도덕적 기준이 높은 이상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라면 갈등이 생겼을 때 강제적 법이 아닌 자율적 양심으로 해결하겠지만 현실의 인간, 이기적이고, 각자의 욕망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현실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라면 갈등을 불러일으킨 행동에 대해 법의 규제가 불가피합니다. 이처럼 법과 도덕의 거리는 사회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성향과 합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법과 도덕의 거리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법정은 도덕을 실현하는 곳일까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법으로는 이겼지만 도덕적으로는... 영화 <행운의 반전>
배우 글렌 클로즈,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연을 맡았던 <행운의 반전(Reversal Of Fortune)>(1990)은 1980년대 미국 최고의 스캔들이었던 변호사 클라우스 본 뷸러의 아내 살인 미수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클라우스 본 뷸러는 의식 불명이 된 아내 서니를 방치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후 두 차례의 살인미수 혐의 때문에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30년 형을 받은 피고입니다. 서니는 콜롬비아 가스 전기 회사 사장의 외동딸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아름다운 인물. 그녀는 젊은 나이에 오스트리아 왕자와 결혼하여 두 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남편의 잦은 외도로 이혼했고, 덴마크 출신 변호사 클라우스와 결혼해 딸을 낳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클라우스 또한 외도가 잦아져 결혼 생활이 평탄치 못했고, 서니는 이에 절망하여 아스피린과 인슐린과 같은 약물을 과다하게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 영화 <행운의 반전> 포스터(이미지 출처 : 워너브러더스)
법정에 오른 문제의 사건은 1980년 크리스마스 즈음 서니가 인슐린 과다로 혼수상태에 빠져 화장실 바닥에 쓰러진 후 식물인간 상태에 됐을 때 클라우스의 의붓 자녀들이 클라우스에게 살인 미수죄를 씌워 고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기 한 해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서니는 같은 이유로 혼수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클라우스는 서니의 상태에 불안을 느낀 하녀 마리아가 의사를 부르려는 것을 만류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클라우스는 두 번의 살인미수 혐의를 받게 된 것입니다.
▲ 영화 <행운의 반전>의 한 장면(이미지 출처 : 워너브러더스)
이 사건에서 클라우스는 매우 불리한 입장이었습니다. 아내의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자녀들이 새아버지가 막대한 유산을 노리고 어머니를 살해하려 했다는 것으로 몰아갔는데, 이들은 검사 출신 변호사를 사립 탐정으로 고용하여 불법 수색을 했고, 치밀하게 증거를 수집한 후 클라우스의 유죄를 추정할 만한 증거들만 선별적으로 법정에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증거들에 맞게 하녀 마리아와 말을 맞춰 클라우스를 범인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클라우스의 살해 동기는 충분했습니다. 사건 당시 클라우스는 이혼을 원했고 서니 또한 마지못해 이혼을 주겠다고는 했지만 만약 이혼을 하게 되면 위자료를 단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했던 결혼 전 계약 때문에 클라우스는 빈털터리로 집을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서니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면 클라우스는 합법적으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 영화 속 앨런 더쇼비츠 변호사(이미지 출처 : 워너브러더스)
영화에서 클라우스는 항소 기한을 얼마 남기지 않고 하버드 법대 교수인 앨런 더쇼비츠에게 변호를 의뢰합니다. 클라우스가 항소를 의뢰할 당시 앨런은 무고한 흑인 형제의 살인 혐의를 위해 무료 변호를 했으나 그들의 사형을 막지 못한 것에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죄임이 명백해 보이고, 모든 미국인들이 싫어하는 평판 나쁜 바람둥이의 변호를 수락하자 이에 반발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앨런은 그녀에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완벽히 유죄로 생각되는 사람이 있더라도 변호사만큼은 그를 옹호해주어야 한다는 임무를 설명합니다. 만일 히틀러가 자신을 찾아와 변호를 부탁한다면 변호를 맡든가 그를 죽이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자신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를 위해 변호를 하겠다고 합니다. 이후 앨런은 자신의 수제자들을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클라우스의 유죄 사유가 된 정황 증거들의 허점과 위증을 밝혀내며 클라우스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영화의 결말에서 항소심에서 이겨 기뻐하는 클라우스에게 앨런은 ‘법으로는 이겼지만 도덕적으로도 이긴 것’은 아니라는 씁쓸한 한마디를 남깁니다. 법과 도덕의 분리를 확인하고 법정의 승리가 도덕의 승리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말입니다.
▲ 클라우스 본 뷸러와 앨런 더쇼비츠의 실제 모습(이미지 출처 : 보스턴글로브)
앨런도 다른 사람들처럼 클라우스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부유하고 아름다운 상속녀와 결혼하였음에도 숱한 외도로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않았고 아내가 식물인간이 된 것에 대해 동정심을 갖지 않았으며 재판 중에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기색 하나 없이 거만하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도덕성의 기준에서 본다면 클라우스는 구제불능의 인간입니다. 그러나 앨런은 클라우스의 변호를 맡은 이상 도덕의 잣대는 잠시 내려놓고 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앨런은 법정이 클라우스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도덕적 평판 때문에 유죄를 받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신념 때문입니다. 만약 클라우스를 유죄로 판결하면 다음에는 그 어떤 누구라도 그의 도덕적 평판 때문에 유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좋아할 수 없다고 해서 무고한 죄를 덮어씌울 수는 없습니다. 법의 냉정함은 그런 사람들까지도 지켜줄 의무가 있습니다.
유력한 정황증거들을 날려버린 인종주의, <O.J. 심슨 파일>
클라우스의 변호를 맡았던 앨런 더쇼비츠가 관여한 또 하나의 유명한 사건이 O.J. 심슨의 이중 살인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넷플릭스의 <O.J. 심슨 파일 :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즌 1>(2016)을 통해 총 10편의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제작되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1994년 LA의 부자들이 사는 마을의 주택 앞에 참혹하게 살해당한 남녀가 발견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자는 유명 미식축구 선수 O.J. 심슨의 전처 니콜 브라운이고 남자는 그녀와 가까이 지냈던 로널드 골드먼이었습니다. 사건 직후 경찰은 사건 현장의 정황증거에 의해 O.J. 심슨을 용의자로 지목했습니다. O.J. 심슨은 무죄를 주장하며 유명인 전문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1주일 후 경찰청에 출두하기로 한 날 유서만 남긴 채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포드 브롱코를 타고 도주를 시도했습니다.
⦁ 범행 현장에 O.J. 심슨의 혈흔이 있었다.
⦁ O.J. 심슨의 모발이 묻은 모자가 니콜과 로널드 시신 옆에 있었다.
⦁ O.J. 심슨의 가죽 장갑 한 짝이 시신 사이에 있었다.
⦁ 다른 한 짝의 장갑에는 피해자의 모발이 묻어 있고, 피해자와 O.J. 심슨의 피도 묻어 있고, 이 장갑은 O.J. 심슨의 집 바로 밖에서 발견되었다.
⦁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약간 안짱다리로 보이는 12사이즈의 신발 자국에 피해자의 혈흔이 묻어 있었는데 O.J. 심슨도 같은 사이즈이고, 그 역시 약간 안짱다리이다.
⦁ 현장에 있는 신발 발자국은 브루노말리 제품이며 이 신발 자국이 O.J. 심슨의 흰색 포드 브롱코 운전석 쪽 카펫에 묻어 있다.
⦁ O.J. 심슨의 피가 O.J.심슨 저택 내 찻길에서 집 쪽으로, 침실과 욕실 쪽으로 흘러 있다.
⦁ O.J. 심슨은 살인 사건 후 손에 무언가에 베인 상처가 있었는데 왜 생겼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 양말이 O.J. 심슨 침실 바닥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양말에 O.J. 심슨과 니콜의 피가 묻어 있다.
⦁ 진한 색깔의 스웨터와 일치되는 남색 면섬유가 범행 현장과 O.J. 심슨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O.J. 심슨이 범행시점에 자신의 집과 니콜의 집 두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 증인이나 자백을 직접증거라고 하는데 이 사건의 경우에는 직접증거는 없고 정황증거만 있었습니다. O.J. 심슨이 살해자라는 정황증거만 있기 때문에 그가 무죄라는 사실에 대한 추론이 배제되어야 유죄가 입증되는 상황이었습니다.
▲ 드라마 속 O.J. 심슨 재판 모습(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이처럼 O.J. 심슨이 유죄라는 유력한 정황증거들이 넘쳐났고 변호인단이 시험 삼아 진행한 거짓말 탐지기에서도 그의 유죄가 확실해 보였지만 그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더구나 그의 변호인단은 드림팀이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했습니다. 아내 살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에 대해 적정 절차에 대한 권리 침해를 근거로 항소심에서 승소한 바 있는 변호사들과 DNA 전문 변호사, 배심원들의 마음을 설교하듯 사로잡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변호사까지 합세하여 당시 최고의 변호인단이었습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전략으로 앞서 열거한 유력한 정황증거들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요?
미국에서 민사소송은 배심원들에게 피고가 범인일 개연성이 높다는 심증이 서도록 입증만 하면 되지만 형사재판에서 검사는 배심원들이 ‘합리적 의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피고인의 죄를 입증해야 합니다. ‘합리적 의심’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검사의 입증책임 기준은 민사소송에서 원고 측이 입증해야 할 ‘증거의 우월’보다 훨씬 높은 기준입니다. 형사재판에서 유죄를 받게 되면 그 형벌의 무게가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드림팀 변호인단의 전략은 당연히 정황증거들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 1992년 미국 LA 폭동 당시 현지 언론기사(이미지 출처 : 뉴욕데일리뉴스)
O.J. 심슨이 무죄를 판결 받기까지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은 검사 측 증인인 형사 마크 퍼먼이었습니다. O.J. 심슨 사건이 발생한 LA에서는 2년 전, 1992년 LA폭동이 있었습니다. 흑인 시민을 백인 경찰들이 집단 구타하여 생겨난 사건인 만큼 백인 경찰에 대한 흑인들의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O.J. 심슨을 용의자로 몰고 간 형사 퍼먼이 심각한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재판의 분위기가 역전된 것입니다. O.J. 심슨의 변호인들은 이를 교묘히 이용하였습니다. 변호인이 O.J. 심슨을 수사한 퍼먼에게 인종차별적 언행에 관해 질문을 연속으로 제기하자 퍼먼은 처음부터 변호인의 모든 심문에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결정적인 질문, ‘이 사건의 증거를 조작했느냐’를 물었고, 이 질문에조차 퍼먼이 묵비권을 행사하자 배심원 모두가 동요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모든 유력한 정황증거들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 실제 재판현장에서 마크 퍼먼 형사 모습(사진 앞)(이미지 출처 : AP Photo/Reed Saxon, File)
퍼먼의 과거 인종차별적 충격 발언과 그의 생각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뿐만 백인 배심원의 도덕 감정까지 뒤흔든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인종차별적 언행은 상대를 위협하거나 증오범죄 행위와 연결되는 경우가 아니면 불법이 아닙니다. 퍼먼은 O.J. 심슨의 재판 후 경찰관직에서 해임되었는데 그 이유는 인종차별적 언사가 아닌 처음 증언대에 올랐을 때 그런 언사를 한 적이 없다고 한 ‘위증’ 때문이었습니다.
▲ 무죄판결을 받은 직후 실제 O.J. 심슨 모습(사진 가운데)(이미지 출처 : Myung J. Chun/AP Images)
결국 12명의 배심원들이 유력한 정황증거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O.J. 심슨에게 무죄를 판결하게 한 것은 순전히 법의 관점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직접적으로는 퍼먼이 증거를 조작했느냐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것 때문이지만, 그 근저에는 인종차별적 경찰에 대해 분노하는 도덕 감정이 끓어오른 것입니다. 인종차별이 근절되어야 한다는 뜨거운 도덕적 감정이 유력한 정황증거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은 무참히 살해된 피해자들에게 매우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민사소송이 ‘증거의 우월’을 중시하는 덕분에 앞서 드러난 정황증거들이 모두 인정되어 피고에게 막대한 배상금이 선고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떨 땐 법이, 어떨 땐 도덕이
<행운의 반전>과 <O.J. 심슨 파일 :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즌 1> 은 사회적 분위기와 평판, 도덕이 법에 개입하는 서로 다른 방식입니다. <행운의 반전>에서는 도덕적 평판이 좋지 못한 피고를 도덕의 잣대가 아니라 정황증거의 부적합성을 근거로 혐의를 벗겨준 판결이고, <O.J. 심슨 파일 :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즌 1> 은 유력한 정황증거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을 허용할 수 없다는 도덕 감정이 어쩌면 유죄일 수 있는 피고를 무죄로 만들어준 판결입니다. 냉정한 법과 열정적인 도덕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할까요? 도덕의 열정이 억울한 사람 하나 없도록 모두에게 온기가 될 수 있는지, 법의 냉정함이 모두의 미움을 받을지라도 무고한 어느 한 사람의 누명마저 벗겨줄 수 있는지에 답이 있을 것입니다.
법(법과 도덕의 거리, 어쩌면 냉정과 열정사이) 기획 칼럼 ②
법(세상을 바꾼 법 탄생 물꼬를 튼 건 평범한 시민들) 기획 칼럼 ①
숭실대 교수.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논문 〈존 듀이의 경험 미학과 예술 교호작용〉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숭실대학교 베어드교양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글쓰기와 독서토론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나나의 논리대왕 도전기』, 『중학생 토론학교 사회와 문화』, 『소설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세종도서 선정)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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