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의 부정확성은 안전한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판단은 어렵다. 사실 우리 삶에서 모든 판단이 쉽지 않다. 더구나 전염병이 번지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개별 환자에 대한 진단 및 다수의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의 총괄적 판단은 어렵다. 방역 당국의 행정적 판단 및 정부의 정책적 판단도 쉽지 않다. 이때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응하는 의료진의 모습(이미지 출처 : pixabay)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4월 30일 부처님 오신 날로부터 5월 5일 어린이날까지 이어진 긴 연휴가 끝날 무렵 코로나19에 관한 원고 청탁을 받았다. ‘이제 그만’ 감염병이 우리 곁을 떠나줄 거란 기대와 희망으로 정말 오랜만에 자유로운 휴가를 보내고 난 직후였다. 그때는 지금쯤, 곧 6월 말쯤에는 세기의 감염병 사태가 종식되리라고 기대하고, 코로나19 이후를 전망하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태는 다시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 마음대로 ‘이후’를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직까지는 코로나바이러스 마음대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바이러스 권력’이란 것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에 따라 매일매일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하고 바꾸고 다시 선택한다.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음을 씁쓸하게 자인할 수밖에 없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바이러스가 결정하는 세상, 기분 나쁜 말이지만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바이러스의 힘
힘을 발휘하는 실체가 경외심을 일으킬 정도로 거대한 무엇이라면 자존심이 좀 덜 상한다. 바이러스는 작디작아서 보이지도 않는다. 광학현미경으로는 관찰할 수도 없었다. 전자현미경이 필요했다. 하긴 보이지 않는 것이 항상 중요하다는 것을 교훈의 일기장에 각인해놓았다고 해도 바이러스는 인간 자존심에 상처를 준다. 과학사에서는 인류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첫 번째 대사건은 거시 세계로부터 왔다고 한다. 인류의 본거지인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태양 주위를 도는 작은 행성 가운데 하나이며, 태양계는 은하계의 한 귀퉁이에 있고 그런 은하계는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초미시 세계로부터 오는 조롱의 웃음소리가 우리 폐부를 찌르고 있다.
▲ 코로나바이러스(이미지 출처 : pixbay)
바이러스는 정체불명이다. 생물도 아니고 광물도 아니다. ‘반생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순 화학물질과 생명체의 중간쯤에 있다. 모호하기 짝이 없다. 바이러스 그 자체로는 번식활동도 대사 활동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마음에 드는 숙주1 를 만나면 빠르게 증식하는 ‘절대기생체’이다. 바이러스는 물질과 생명이 별개가 아니라 존재론적 의미에서 연속선상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의 자존심은 한 번 더 상한다. 별난 존재로서 인간을 치장해온 만물의 영장이라는 허영이 조각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자신의 모호성을 즐기는 듯하다. 대상을 확실하게 구분해야 직성이 풀리는 편협한 인간의 감식안에는 정체불명인 바이러스의 모호함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1 기생(parasitism) 또는 공생(symbiosis)을 하는 생명체에게 영양분과 서식지를 제공하는 동식물 개체. 편집자주
▲ 2011년 개봉한 영화 <컨테이젼(Contarion)>의 등장인물들 모습(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사람들을 더욱 짜증나게 하는 건 바이러스가 편재(遍在) 편재2한다는 사실이다. 바이러스는 어디에든 있다. 어디에서든 만만한 숙주를 노리고 있다. 곧 바이러스의 힘이 편재한다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았다는 영화 ‘컨테이젼(Contagion, 2011)’은 이를 잘 보여준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자극적 영상을 절제하며 일상의 에피소드들을 따라가듯이 감염병 현상을 연출해낸다. 특별한 주연 없이 각자의 처지에서 모두가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사건의 발단이 된 첫 감염자와 그 아들의 죽음 외에는 죽는 사람이 없다. 유일한 사망자는 비극적이지만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헌신하는 미어스 박사(케이트 윈슬렛 분)이다. 그는 바이러스 확산의 핵심이 포마이트(Fomite), 곧 ‘비생체 접촉 매개물’임을 말뜻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공무원들에게 역설한다.
2 편재(遍在, Ubiquitous) 널리 퍼져있다는 뜻. 편집자주
▲ 영화 <컨테이젼(Contarion)>의 미어스 박사의 대사(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사람들은 하루에 2~3천 번 정도 자신의 얼굴을 만집니다. 그 손으로 문 손잡이, 승강기 버튼, 수도꼭지 등등 수많은 물체를 또 만지지요. ”
포마이트라는 개념은 이미 16세기에 이탈리아 의사 프라카스트로(G. Fracastro)에 의해 알려졌다. 미어스 박사가 예시한 물건들 뿐만 아니라 물체 없는 일상생활 환경이란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비생물 물체에 편재하는 바이러스와 손쉽게 접촉하게 된다. 이것이 박테리아나 곰팡이균 같은 생체 감염과 다른 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이상으로 물체와의 격리 또한 쉽지 않은 것이다. 영화에서 미어스 박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그렇게 강조했던 포마이트 감염으로 죽는다.
지금은 누구든 익숙해진 격리•검역을 뜻하는 ‘쿼런틴(Quarantine)’이라는 단어는 흑사병이 돌던 14세기 때부터 이미 사용되던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했다.당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역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에서는 상선들이 입항하기 전 40일까지 격리•검역하도록 했다. 이탈리아어로 ‘40일’을 뜻하는 ‘콰란테나(quarantena)’에서 오늘날 격리•검역이라는 뜻의 영어 쿼런틴(quarantine)’이 유래했다. 코로나19와 연관해서는 14일이 평균 격리 기간이다. 바이러스는 어디에든 편재하면서 사람들 사이를 떼어놓는다. 그래서 사람들끼리 멀어지게 하고 싸움을 붙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고 모호하면서도 편재하는 바이러스의 시험대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할지어다!’ 사람들은 격렬한 다짐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알아도 ‘소용없는’ 코로나19의 원인
바이러스가 대적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최대한의 노력을 한다. 인과율(因果律)적 존재인 인간은 모든 사태와 위기에서 원인을 찾는다. 원인을 아는 것이 문제 해결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코로나19에도 당연히 원인이 있다. 아주 근본적인 원인이 있고 사건을 일으킨 직접적인 동인도 있다.
코로나19를 비롯한 바이러스 감염병이 빈번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인류의 지구 지배로 인한 환경문제이다. 인류가 지구 환경을 변화시켜온 것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만 2000여 년 전 인류가 정착하여 농경을 시작하고 가축을 기르면서 바이러스와의 접촉 빈도는 확대되어왔다. 바이러스에게 경작 식물과 가축은 숙주로 삼기에 아주 좋은 대상이 되어왔다. 이런 과정은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19세기 이후 대규모 영농과 축산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간의 생산 활동이 천연의 공간을 급속히 축소시켜왔고, 야생동물과 가축과의 접촉은 늘어났으며 지금도 늘어나고 있다. 이제 지구상에서 바이러스가 아주 좋아하는 포유류와 조류의 대다수는 인간과 가축이다.
▲ 조류독감 소개 페이지(이미지 출처: 질병관리본부)
이런 원인 설명들은 수많은 전문가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진부할 정도로 반복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원인을 알아도 그것을 고쳐보려는 노력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환경문제는 증가하는 세계 인구 및 생산과 소비의 지속적인 회전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이에 따른 자연 훼손과 오염 물질 배출은 문제를 결정적으로 가중시킨다. 사람들이 흔히 지나치는 아주 ‘부분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난 반 세기 동안 양계를 비롯한 가금류의 생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최근 20년 동안 여러 차례 있었던 호흡기 감염병은 조류 독감과 밀접하다. 우리는 일상에서 치킨 소비를 대폭 줄일 수 있을까. 치맥 파티의 행복을 아주 소중한 순간에 한정해서 만끽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환경과 감염병 문제 해결에는 전인류가 일상생활 개선에 대폭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놓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을 잘 알아도 개선을 위한 실천에는 의문부호를 찍게 된다.
이런 입장은 쉽게 비관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비관주의가 이 세상은 최악의 상태로 만들어졌음을 전제하는 것이라면, 원인을 안다고 해도 해결을 위해 실천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오히려 현실주의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접근법의 해결 가능성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실천할 가능성을 회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경제•사회•문화•정치 체제가 기본적으로 계속 유지된다면 시간문제일 뿐 삶의 터전인 지구가 훼손되는 것은 분명해 보이고 삶의 주체인 인류의 미래는 불확실해 보인다.
▲ 미국의 유명한 공포소설 작가 리처드 매드슨(R. Matheson)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 표지(이미지 출처 : 예스24)
미국의 유명한 공포소설 작가 리처드 매드슨(R. Matheson)은 소설 ‘나는 전설이다’에서 팬데믹이 있은 후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흡혈귀로 변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면역을 지닌 주인공 로버트 네빌의 삶을 그린다. 흡혈귀들에게 오히려 비정상적이고 공포의 대상이 된 네빌은 마지막에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게 되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신인류에게 붙잡힌다. 그는 ‘구인류의 유일한 상징’으로서 처형된다. 네빌은 깨닫는다. 인간들의 전설 속에 흡혈귀가 등장했듯이, 미래에 이들 신인류의 전설에는 자신이 등장하리라는 것을. 그는 숨을 거두며 독백한다. “이제 나는 전설이다. ” 극단의 역설적 상상이 현재 우리들이 마주한 문제를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는 너무 잔인한가? 하지만 먼 미래에 방영될 ‘전설따라 삼천리’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잔인한 성찰’도 감내해야 되지 않을까?
코로나19가 글로벌 팬데믹이 된 데에는 직접적인 동인도 있다. 지금도 많은 전문가들이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있는 ‘중국 우한이 발원지’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증거들은 여럿 있겠지만, 중국이 외부 세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경제•교역 개방을 하고 급속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이후 지난 30여 년 동안 이뤄진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인구의 18%에 이르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친다. 한 예로 위 기간 동안 중국의 가금류 생산과 소비는 수백 배가 아니라 천 배 이상 늘었다는 통계도 있다. 중국의 일부 시장에서는 사육 조류 및 축산 육류와 야생 동물 판매가 함께 이루어진다. 중국 외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국 정부의 구체적인 대처와 명확한 입장을 원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내놓고 있지 않다. 우한이 발원지가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은 오히려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국 정부의 투명성이 더 중요한 것이다. 힘 있는 국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코로나19의 원인을 알거나 알 수 있다고 해도 문제 해결에 소용이 되지 않는다.
일상의 미봉책
전 세계적 차원에서든 지역적 차원에서든 감염병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회의적이더라도 우리 모두는 오늘을 살아야 한다. 철학자 스피노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우리는 오늘 하루를 건강히 보내야 한다. 우리 삶은 ‘일상의 실화’ 속에 있기 때문이다.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차원에서라면 미봉책은 비판의 대상이겠지만, 개인적 차원에서 ‘일상의 미봉책’은 삶에 필수적이다. 코로나-19와 함께 일상을 보내야 하는 때에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의 말은 지금 우리에게 각별히 소중한 조언이다.
▲ 히포크라테스 흉상(이미지 출처 : 두산백과)
“생명은 짧고 의술은 길며, 기회는 달아나기 쉽고 실험은 부정확하며 판단은 어렵다. 의사가 맡은 일을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환자와 그를 돌보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하며, 주위 환경 또한 호의적이어야 한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뜻으로 와전되기도 했던 이 경구의 첫 문장은 사람의 목숨은 언제 죽을지 모를 만큼 짧은데, 의술이 가야 할 길은 멀고 의학의 세계는 광활하다는 뜻이다. 그 반대였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을 역으로 비추고 있는 말인 것이다.
기회는 달아나기 쉽다. 코로나19처럼 확산세가 강한 전염병에 대한 대처는 적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피해를 최소화하며 대처할 기회를 놓치면 병의 확산은 불가피해진다. 실험은 부정확하다. 모든 과학적 행위는 완벽을 지향하지만 완벽할 수 없다. 의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 국내 코로나19 가짜양성 사례(이미지 출처: 한국경제 2020년 6월 15일)
과학적 결과물을 일상적 삶에 적용할 때는 부정확성이 더욱 논란이 된다. 코로나19 진단 키트의 정확도 논쟁이 있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여러 번 바이러스 음성 반응을 보였다가도 양성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 방역 당국을 지나치게 비난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험의 부정확성은 안전한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판단은 어렵다. 사실 우리 삶에서 모든 판단이 쉽지 않다. 더구나 전염병이 번지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개별 환자에 대한 진단 및 다수의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의 총괄적 판단은 어렵다. 방역 당국의 행정적 판단 및 정부의 정책적 판단도 쉽지 않다. 이때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이들에 대한 비판과 성원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 위기일수록 절실한 모두의 협력(이미지 출처 : pixabay)
이제 히포크라테스는 원론에서 각론으로 들어간다. 의사는 당연히 자신이 맡은 바를 다 해야 한다. 환자의 진단과 치료 그리고 회복을 위해 필요한 일을 다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훌륭한 의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의료 행위 자체가 훌륭한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음 또한 경고한다. 협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협동의 주체는 우선 환자 개인이다. 환자도 자신의 몫을 다 해야 한다. 환자는 의사의 모든 행위에 협조해야 한다. 그를 돌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돌보는 사람’이란 전문화된 간호 인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가족, 친인척, 이웃 등 공동체에서 환자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 모두의 협조를 뜻한다. 코로나19의 경우에는 시민들이 방역의 모든 공식적 수칙을 따르는 것이 협동의 구체적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주위 환경도 호의적이어야 한다. 환경 문제는 항상 어렵다. 언급했듯이 거시적 차원에서 환경 문제를 거론하는 순간, 모든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에서 주위 환경을 위해 각 개인이 할 일은 해야 한다. 일상의 미봉책은 궁여지책이지만, 인류 문명이 궁한 처지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철학자. 문화비평가. 전 영산대 교수.
한국 외국어대 졸업.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내다 2002년부터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와 미용·예술대학원 교수로 재직했으며,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와 미국 워싱턴 대학교(UW)에서 연구했다. 2017년 몸담았던 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했으며, 현재 저술과 강연 활동 및 스토리텔링 컨설턴트(script doctor) 일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 『깊이와 넓이 4막 16장』, 『철학광장』, 『서사철학』, 『메두사의 시선』, 『김광석 우리 삶의 노래』 외 다수가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미래의 전설’보다는 ‘일상의 실화’가 소중해!!'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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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전설’보다는 ‘일상의 실화’가 소중해!!
바이러스의 시험대에 선 사람들
김용석
2020-06-26
음성으로 듣기
14분 16초 읽기실험의 부정확성은 안전한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판단은 어렵다. 사실 우리 삶에서 모든 판단이 쉽지 않다. 더구나 전염병이 번지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개별 환자에 대한 진단 및 다수의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의 총괄적 판단은 어렵다. 방역 당국의 행정적 판단 및 정부의 정책적 판단도 쉽지 않다. 이때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응하는 의료진의 모습(이미지 출처 : pixabay)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4월 30일 부처님 오신 날로부터 5월 5일 어린이날까지 이어진 긴 연휴가 끝날 무렵 코로나19에 관한 원고 청탁을 받았다. ‘이제 그만’ 감염병이 우리 곁을 떠나줄 거란 기대와 희망으로 정말 오랜만에 자유로운 휴가를 보내고 난 직후였다. 그때는 지금쯤, 곧 6월 말쯤에는 세기의 감염병 사태가 종식되리라고 기대하고, 코로나19 이후를 전망하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태는 다시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 마음대로 ‘이후’를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직까지는 코로나바이러스 마음대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바이러스 권력’이란 것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에 따라 매일매일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하고 바꾸고 다시 선택한다.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음을 씁쓸하게 자인할 수밖에 없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바이러스가 결정하는 세상, 기분 나쁜 말이지만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바이러스의 힘
힘을 발휘하는 실체가 경외심을 일으킬 정도로 거대한 무엇이라면 자존심이 좀 덜 상한다. 바이러스는 작디작아서 보이지도 않는다. 광학현미경으로는 관찰할 수도 없었다. 전자현미경이 필요했다. 하긴 보이지 않는 것이 항상 중요하다는 것을 교훈의 일기장에 각인해놓았다고 해도 바이러스는 인간 자존심에 상처를 준다. 과학사에서는 인류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첫 번째 대사건은 거시 세계로부터 왔다고 한다. 인류의 본거지인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태양 주위를 도는 작은 행성 가운데 하나이며, 태양계는 은하계의 한 귀퉁이에 있고 그런 은하계는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은 초미시 세계로부터 오는 조롱의 웃음소리가 우리 폐부를 찌르고 있다.
▲ 코로나바이러스(이미지 출처 : pixbay)
바이러스는 정체불명이다. 생물도 아니고 광물도 아니다. ‘반생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순 화학물질과 생명체의 중간쯤에 있다. 모호하기 짝이 없다. 바이러스 그 자체로는 번식활동도 대사 활동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마음에 드는 숙주1 를 만나면 빠르게 증식하는 ‘절대기생체’이다. 바이러스는 물질과 생명이 별개가 아니라 존재론적 의미에서 연속선상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의 자존심은 한 번 더 상한다. 별난 존재로서 인간을 치장해온 만물의 영장이라는 허영이 조각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자신의 모호성을 즐기는 듯하다. 대상을 확실하게 구분해야 직성이 풀리는 편협한 인간의 감식안에는 정체불명인 바이러스의 모호함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1 기생(parasitism) 또는 공생(symbiosis)을 하는 생명체에게 영양분과 서식지를 제공하는 동식물 개체. 편집자주
▲ 2011년 개봉한 영화 <컨테이젼(Contarion)>의 등장인물들 모습(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사람들을 더욱 짜증나게 하는 건 바이러스가 편재(遍在) 편재2한다는 사실이다. 바이러스는 어디에든 있다. 어디에서든 만만한 숙주를 노리고 있다. 곧 바이러스의 힘이 편재한다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았다는 영화 ‘컨테이젼(Contagion, 2011)’은 이를 잘 보여준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자극적 영상을 절제하며 일상의 에피소드들을 따라가듯이 감염병 현상을 연출해낸다. 특별한 주연 없이 각자의 처지에서 모두가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사건의 발단이 된 첫 감염자와 그 아들의 죽음 외에는 죽는 사람이 없다. 유일한 사망자는 비극적이지만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헌신하는 미어스 박사(케이트 윈슬렛 분)이다. 그는 바이러스 확산의 핵심이 포마이트(Fomite), 곧 ‘비생체 접촉 매개물’임을 말뜻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공무원들에게 역설한다.
2 편재(遍在, Ubiquitous) 널리 퍼져있다는 뜻. 편집자주
▲ 영화 <컨테이젼(Contarion)>의 미어스 박사의 대사(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사람들은 하루에 2~3천 번 정도 자신의 얼굴을 만집니다. 그 손으로 문 손잡이, 승강기 버튼, 수도꼭지 등등 수많은 물체를 또 만지지요. ”
포마이트라는 개념은 이미 16세기에 이탈리아 의사 프라카스트로(G. Fracastro)에 의해 알려졌다. 미어스 박사가 예시한 물건들 뿐만 아니라 물체 없는 일상생활 환경이란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비생물 물체에 편재하는 바이러스와 손쉽게 접촉하게 된다. 이것이 박테리아나 곰팡이균 같은 생체 감염과 다른 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이상으로 물체와의 격리 또한 쉽지 않은 것이다. 영화에서 미어스 박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그렇게 강조했던 포마이트 감염으로 죽는다.
지금은 누구든 익숙해진 격리•검역을 뜻하는 ‘쿼런틴(Quarantine)’이라는 단어는 흑사병이 돌던 14세기 때부터 이미 사용되던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했다. 당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역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에서는 상선들이 입항하기 전 40일까지 격리•검역하도록 했다. 이탈리아어로 ‘40일’을 뜻하는 ‘콰란테나(quarantena)’에서 오늘날 격리•검역이라는 뜻의 영어 쿼런틴(quarantine)’이 유래했다. 코로나19와 연관해서는 14일이 평균 격리 기간이다. 바이러스는 어디에든 편재하면서 사람들 사이를 떼어놓는다. 그래서 사람들끼리 멀어지게 하고 싸움을 붙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고 모호하면서도 편재하는 바이러스의 시험대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할지어다!’ 사람들은 격렬한 다짐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알아도 ‘소용없는’ 코로나19의 원인
바이러스가 대적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최대한의 노력을 한다. 인과율(因果律)적 존재인 인간은 모든 사태와 위기에서 원인을 찾는다. 원인을 아는 것이 문제 해결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코로나19에도 당연히 원인이 있다. 아주 근본적인 원인이 있고 사건을 일으킨 직접적인 동인도 있다.
코로나19를 비롯한 바이러스 감염병이 빈번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인류의 지구 지배로 인한 환경문제이다. 인류가 지구 환경을 변화시켜온 것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만 2000여 년 전 인류가 정착하여 농경을 시작하고 가축을 기르면서 바이러스와의 접촉 빈도는 확대되어왔다. 바이러스에게 경작 식물과 가축은 숙주로 삼기에 아주 좋은 대상이 되어왔다. 이런 과정은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19세기 이후 대규모 영농과 축산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간의 생산 활동이 천연의 공간을 급속히 축소시켜왔고, 야생동물과 가축과의 접촉은 늘어났으며 지금도 늘어나고 있다. 이제 지구상에서 바이러스가 아주 좋아하는 포유류와 조류의 대다수는 인간과 가축이다.
▲ 조류독감 소개 페이지(이미지 출처: 질병관리본부)
이런 원인 설명들은 수많은 전문가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진부할 정도로 반복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원인을 알아도 그것을 고쳐보려는 노력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환경문제는 증가하는 세계 인구 및 생산과 소비의 지속적인 회전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이에 따른 자연 훼손과 오염 물질 배출은 문제를 결정적으로 가중시킨다. 사람들이 흔히 지나치는 아주 ‘부분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난 반 세기 동안 양계를 비롯한 가금류의 생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최근 20년 동안 여러 차례 있었던 호흡기 감염병은 조류 독감과 밀접하다. 우리는 일상에서 치킨 소비를 대폭 줄일 수 있을까. 치맥 파티의 행복을 아주 소중한 순간에 한정해서 만끽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환경과 감염병 문제 해결에는 전인류가 일상생활 개선에 대폭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놓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을 잘 알아도 개선을 위한 실천에는 의문부호를 찍게 된다.
이런 입장은 쉽게 비관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비관주의가 이 세상은 최악의 상태로 만들어졌음을 전제하는 것이라면, 원인을 안다고 해도 해결을 위해 실천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오히려 현실주의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접근법의 해결 가능성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실천할 가능성을 회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경제•사회•문화•정치 체제가 기본적으로 계속 유지된다면 시간문제일 뿐 삶의 터전인 지구가 훼손되는 것은 분명해 보이고 삶의 주체인 인류의 미래는 불확실해 보인다.
▲ 미국의 유명한 공포소설 작가 리처드 매드슨(R. Matheson)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 표지(이미지 출처 : 예스24)
미국의 유명한 공포소설 작가 리처드 매드슨(R. Matheson)은 소설 ‘나는 전설이다’에서 팬데믹이 있은 후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흡혈귀로 변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면역을 지닌 주인공 로버트 네빌의 삶을 그린다. 흡혈귀들에게 오히려 비정상적이고 공포의 대상이 된 네빌은 마지막에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게 되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신인류에게 붙잡힌다. 그는 ‘구인류의 유일한 상징’으로서 처형된다. 네빌은 깨닫는다. 인간들의 전설 속에 흡혈귀가 등장했듯이, 미래에 이들 신인류의 전설에는 자신이 등장하리라는 것을. 그는 숨을 거두며 독백한다. “이제 나는 전설이다. ” 극단의 역설적 상상이 현재 우리들이 마주한 문제를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는 너무 잔인한가? 하지만 먼 미래에 방영될 ‘전설따라 삼천리’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잔인한 성찰’도 감내해야 되지 않을까?
코로나19가 글로벌 팬데믹이 된 데에는 직접적인 동인도 있다. 지금도 많은 전문가들이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있는 ‘중국 우한이 발원지’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증거들은 여럿 있겠지만, 중국이 외부 세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경제•교역 개방을 하고 급속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이후 지난 30여 년 동안 이뤄진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인구의 18%에 이르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친다. 한 예로 위 기간 동안 중국의 가금류 생산과 소비는 수백 배가 아니라 천 배 이상 늘었다는 통계도 있다. 중국의 일부 시장에서는 사육 조류 및 축산 육류와 야생 동물 판매가 함께 이루어진다. 중국 외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국 정부의 구체적인 대처와 명확한 입장을 원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내놓고 있지 않다. 우한이 발원지가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은 오히려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국 정부의 투명성이 더 중요한 것이다. 힘 있는 국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코로나19의 원인을 알거나 알 수 있다고 해도 문제 해결에 소용이 되지 않는다.
일상의 미봉책
전 세계적 차원에서든 지역적 차원에서든 감염병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회의적이더라도 우리 모두는 오늘을 살아야 한다. 철학자 스피노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우리는 오늘 하루를 건강히 보내야 한다. 우리 삶은 ‘일상의 실화’ 속에 있기 때문이다.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차원에서라면 미봉책은 비판의 대상이겠지만, 개인적 차원에서 ‘일상의 미봉책’은 삶에 필수적이다. 코로나-19와 함께 일상을 보내야 하는 때에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의 말은 지금 우리에게 각별히 소중한 조언이다.
▲ 히포크라테스 흉상(이미지 출처 : 두산백과)
“생명은 짧고 의술은 길며, 기회는 달아나기 쉽고 실험은 부정확하며 판단은 어렵다. 의사가 맡은 일을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환자와 그를 돌보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하며, 주위 환경 또한 호의적이어야 한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뜻으로 와전되기도 했던 이 경구의 첫 문장은 사람의 목숨은 언제 죽을지 모를 만큼 짧은데, 의술이 가야 할 길은 멀고 의학의 세계는 광활하다는 뜻이다. 그 반대였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을 역으로 비추고 있는 말인 것이다.
기회는 달아나기 쉽다. 코로나19처럼 확산세가 강한 전염병에 대한 대처는 적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피해를 최소화하며 대처할 기회를 놓치면 병의 확산은 불가피해진다. 실험은 부정확하다. 모든 과학적 행위는 완벽을 지향하지만 완벽할 수 없다. 의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 국내 코로나19 가짜양성 사례(이미지 출처: 한국경제 2020년 6월 15일)
과학적 결과물을 일상적 삶에 적용할 때는 부정확성이 더욱 논란이 된다. 코로나19 진단 키트의 정확도 논쟁이 있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여러 번 바이러스 음성 반응을 보였다가도 양성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 방역 당국을 지나치게 비난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험의 부정확성은 안전한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판단은 어렵다. 사실 우리 삶에서 모든 판단이 쉽지 않다. 더구나 전염병이 번지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개별 환자에 대한 진단 및 다수의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의 총괄적 판단은 어렵다. 방역 당국의 행정적 판단 및 정부의 정책적 판단도 쉽지 않다. 이때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이들에 대한 비판과 성원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 위기일수록 절실한 모두의 협력(이미지 출처 : pixabay)
이제 히포크라테스는 원론에서 각론으로 들어간다. 의사는 당연히 자신이 맡은 바를 다 해야 한다. 환자의 진단과 치료 그리고 회복을 위해 필요한 일을 다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훌륭한 의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의료 행위 자체가 훌륭한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음 또한 경고한다. 협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협동의 주체는 우선 환자 개인이다. 환자도 자신의 몫을 다 해야 한다. 환자는 의사의 모든 행위에 협조해야 한다. 그를 돌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돌보는 사람’이란 전문화된 간호 인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가족, 친인척, 이웃 등 공동체에서 환자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 모두의 협조를 뜻한다. 코로나19의 경우에는 시민들이 방역의 모든 공식적 수칙을 따르는 것이 협동의 구체적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주위 환경도 호의적이어야 한다. 환경 문제는 항상 어렵다. 언급했듯이 거시적 차원에서 환경 문제를 거론하는 순간, 모든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에서 주위 환경을 위해 각 개인이 할 일은 해야 한다. 일상의 미봉책은 궁여지책이지만, 인류 문명이 궁한 처지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처하는 인류의 자세' 기획 칼럼 ④
'새로운 세상에 대처하는 인류의 자세' 기획 칼럼 ③
'새로운 세상에 대처하는 인류의 자세' 기획 칼럼 ②
'새로운 세상에 대처하는 인류의 자세' 기획 칼럼 ①
철학자. 문화비평가. 전 영산대 교수. 한국 외국어대 졸업.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내다 2002년부터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와 미용·예술대학원 교수로 재직했으며,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와 미국 워싱턴 대학교(UW)에서 연구했다. 2017년 몸담았던 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했으며, 현재 저술과 강연 활동 및 스토리텔링 컨설턴트(script doctor) 일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 『깊이와 넓이 4막 16장』, 『철학광장』, 『서사철학』, 『메두사의 시선』, 『김광석 우리 삶의 노래』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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