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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가상과 물질적 현실이 연결되고 교차할 때

가상과 현실은 서로를 만들어낸다

김주옥

2020-02-10

현실과 가상이 교차된 그 지점에서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가짜라고 구분할 수 있을까?

만약 가상이 여전히 가짜라는 믿음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면 그 가상공간 안에 존재하는 나의 신체는 진짜일까 가짜일까?

아니면 마치 꿈속에서 존재하는 것과 같이 잠시 실제가 아닌 곳에 존재하는 내가 되는 것일까? 


 

 

대체로 ‘가상’이라는 단어는 ‘현실’이라는 단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가상과 현실은 서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둘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말이 나오게 된 데에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지각하고 인식할 수 있는 매체가 생긴 것이 큰 원인이 된다.



가상현실과 예술



필자는 이러한 고도의 과학 기술 발달의 시대를 쉽게 표현하기 위해 ‘인공지능의 시대’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인공지능’이라는 구체적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최근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있는 기술 시대를 지칭하기 위한 은유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필자가 최근 출판한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과 예술 - 대칭적 인류학의 해법』이라는 책에서도 기존 패러다임이 바뀌어 인간의 인식이 전환되는 사건들을 기술에 영향 받은 예술을 통해 다루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은 예술에 영향을 미치고 이렇게 만들어진 환경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각각의 요소들이 관계성을 가지고 연결된 이 세상은 서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에는 ‘가상(假想)’이라는 단어가 '사실이 아닌 것', 또는 '가(假)짜의 것'을 지칭하였기 때문에 이는 실제보다 가치가 낮은 것을 뜻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가상이라는 범주 안에서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에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실이라는 공간에서만 살고 있다는 우리의 믿음이 깨지는 순간, 흔들리게 된다. 

 

필자가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의 큐레이터로 재직하고 있었을 당시 만나게 되었던 <폴리곤 플래시 OBT(Polygon Flash OBT)>는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시각예술분야 기획자로 선정된 정시우가 기획하고 김동희, 권영찬, 문이삭 작가가 참여한 전시였다. 

 

이 전시의 보도자료에서는 우선적으로 가상과 현실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를 설명하기 위해 “닌텐도 쇼크” 또는 “폴리곤 쇼크”라는 사건을 예를 든다. 이 사건은 ‘포켓몬스터’라는 애니메이션의 빨간색과 파란색이 짧게 반복해서 반짝거린 화면이 ‘광과민성증후군’의 원인이 되어 그것을 시청한 아이들에게 간질, 발작을 야기하는 증상을 말한다. 이 때문에 어린이 사망자도 발생되었다는 것을 보면 화면 속 가상공간에 묶여 있던 것들은 단순히 현실과 분리된 공간에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화면 속 가상의 것들이 현실로 튀어나와 영향을 주었는데, 이처럼 가상은 가짜의 것이 아니다. 현실 속 물체들처럼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상의 요소는 브라운관 화면이라는 매체를 통해 매개되어 현실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 된다. 


 

폴리곤 플래시 OBT

폴리곤 플래시 OBT

폴리곤 플래시 OBT

<폴리곤 플래시 OBT(Polygon Flash OBT)> 전시장 (이미지 출처: www.artbava.com)

 

 

이러한 개념에서 출발한 전시는 가상의 요소가 현실에도 영향을 주지만 현실이 가상적 요소의 근간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선셋밸리’라는 이미지 시뮬레이터 어플리케이션의 오픈 베타 테스트(OBT, Open Beta Test)라는 형식을 전시에 활용했다. 전시장의 구조적, 물질적 환경이 앱에서 실행되는 비물질적인 이미지 데이터와 연동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 전시의 핵심이다. 인사미술공간의 전시장을 하나의 데이터 환경이라고 상정했을 때 이미지 시뮬레이터는 전시장 안의 작품의 형태, 크기 등을 지정하고 작품을 배치시키는데 이를 최종적으로 구현한 것을 ‘전시’라는 형태로 관람객이 접하게 되는 것이다. 

 

가까이서 이 전시의 준비과정과 실행을 지켜보고 관람객들의 반응을 수시로 접하게 된 필자는 우리가 가상과 현실의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인식하지 못함을 새삼 깨달았다. 실제 존재라 인식하는 것이 결국 우리가 세상을 보는 잣대와 기준에 영향받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예전에 가상현실(VR) 체험관에서 오큘러스 고글을 착용하고 몇 가지 테마별 가상현실 게임을 해본 적이 있다. 고글을 착용하고 그네를 타면 눈앞에는 가상의 정글이 펼쳐지며 떨어질 것 같은 절벽에서 낙하하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하늘을 날다가 숲속에 착지하는 등 여러 신체적 경험을 할 수 있다. 또한 귀신의 방에 들어가 어두운 방들을 순차적으로 통과하며 그 안에서 만나는 귀신들을 피해 도망치는 오싹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가상현실을 체험할 때 재미를 느끼거나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본다’라는 것이 지각 능력을 대표할 만큼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맨눈으론 볼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은 고글을 착용하는 즉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는 실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내 눈으로 ‘보이는 것’ 또는 ‘물질적 실체’와 같은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인식법을 통해 세상을 살고 있다. 이렇듯 믿음의 영역에 있는 존재를 뺀다면, 대체로 실제 '내가 볼 수 있는' 시각적 존재를 증명할 때 ‘존재한다’라는 표현은 ‘실제로 있다’라는 의미와 비슷한 개념으로 쓰인다.

 

2017년 늦가을,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 열린 <촉각적 원근법>은 1970년대에 생겨 2010년까지 구의취수장으로 쓰이던 이 공간의 옛 관사 건물을 활용하여 10명의 젊은 현대미술 작가들이 작업한 전시다. 2017년 당시 옛 관사 건물은 그 당시 살던 사람들이 놓고 간 집기와 버려진 물품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이 공간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경험하여 다양한 감각 작용을 표현했다. 

 

작가 중 <촉감과 내뿜음>이라는 작업을 선보인 지승열은 낡은 방에서 가상현실 기술을 활용하여 현실의 물리적 공간과 가상의 공간을 중첩시켰다. 이곳에 방문하는 관람객은 VR 고글과 특수 의류 장비를 착용하고 VR 체험을 하게 된다. 고글을 통해 눈앞에 보이는 공간은 실제 방의 공간과 유사한 어떤 가상의 방이다. 관람객은 그 방을 둘러보며 실제 몸을 이동하며 움직인다. 이때 실제 몸이 물리적 공간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 순간, 모션 캡쳐 기능을 지닌 기기가 신체의 위치를 인식하여 관람객이 바라보는 가상의 공간 속에 민들레꽃 씨앗을 흩뿌린다. 이때 관람객이 물리적 공간에 입김을 불거나 손을 움직여 꽃의 씨앗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이 체험의 궁극적 목표다. 이처럼 작업에서 표현한 현실 속 공간과 가상의 공간은 서로 연결되어 작동하는데, 나의 인식이 현실과 가상의 영역을 오가며 그에 따라 두 공간의 지각이 교차한다. 



지승열 촉감과 내뿜음

지승열, <촉감과 내뿜음>, HAPTIC & BLOW in VR, 2017 (이미지 출처: neolook.com)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현실과 가상이 교차된 그 지점에서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가짜라고 구분할 수 있을까? 만약 가상이 여전히 가짜라는 믿음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면 그 가상공간 안에 존재하는 나의 신체는 진짜일까 가짜일까? 아니면 마치 꿈속에서 존재하는 것과 같이 잠시 실제가 아닌 곳에 존재하는 내가 되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을 통해 가상과 현실을 이해한다면 평소 육안으로 볼 수 없었던 것들이 특수 기기들에 의해 지각했을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과학 기술의 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원래 존재했던 것들이 어떠한 도구를 통해 발견된다고 보는 것이 맞을까. 의문이 꼬리를 문다.

 

서로 다른 의견을 낼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최근 양자역학을 통해 해석된 ‘세상은 인식한 후 존재하게 된다’는 견해를 보인다. 우리가 어떤 물체를 볼 때, 사실은 그 물체에서 반사된 빛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물체의 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빛은 뉴턴 이래로 줄곧 입자로 여겨졌다. 양자역학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빛의 파동설과 입자설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자면, 18세기 뉴턴이 주장한 빛은 입자라는 설은 19세기 초 토마스 영(Thomas Young, 1773~1829)의 이중 슬릿 실험을 통해 빛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증명되면서 깨졌다.

 

 

빛은 파동이다

 

 

또한 이 실험 과정에서 관찰자의 시선 개념이 등장하게 되면서 ‘존재’라는 개념을 이해할 때,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라는 개념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생겼을 때 존재하게 된다’는 개념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를 다시 가상공간 안에서의 존재에 대입하여 생각해 봤을 때 그 공간을 바라보지 않고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실과 가상은 인식하는 행위와 존재하는 행위가 연결되어 함께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인식하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지각할 수 있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과 실제 ‘있다’라고 여겨지는 것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가상현실에 관련한 예술 작품을 다시 해석해보자면 가상과 현실은 서로 상호보완적이고 상호의존적이며 상호연결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상과 현실은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며 가상은 현실을 만듦과 동시에 현실은 가상을 창조할 수 있다.

 

필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식하고 존재하는 관계에 대한 생각들에 ‘앎’을 통한 ‘인지’의 작용을 덧붙여 사유해야 한다고 본다. 만약 단지 현상계(Phenomena)에서 인식하는 대상만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인간 사고의 한계에 갇힌 세상만을 보게 될 것이다. 인식과 존재, 지각의 상관성을 넘어 경험 바깥에 있는 존재에 대한 인지 작용이야말로 앞서 가상과 현실을 다뤘던 작업들이 이야기하고자 한 바가 아니었을까. 

 

 

○ 참고 문헌

김주옥,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과 예술-대칭적 인류학의 해법』, 서울: 그레파이트온핑크, 2019.

 

○ 폴리곤 플래시 OBT(Polygon Flash OBT) 전시 정보: 

https://www.arko.or.kr/infra/pm1_04/m2_02/m3_02.do?mode=view&cid=534130

 

○ 촉각적 원근법 전시 정보: 

https://neolook.com/archives/2017102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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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옥(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 겸임교수/아트랩코리아 대표)은 큐레이터로서 전시기획, 미술비평을 통한 현장 활동과 학술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이미지 제공: ⓒ김주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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