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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과 분절의 변주

"우리가 만들어나가고 있는 구조는 우리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구조의 변주일지도 모른다."

정택동

2020-02-03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현대에 태어나 성장해온 인간은 과거 환경에서는 살기 어려울 것이다.

샤워를 못하고 날벌레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서만은 아니다.

성 차별, 신분 차별, 인권 억압도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더욱 큰 고통은 어쩌면 스마트폰이 없이 사는 삶일 수 있다.

 

 

 

1887년 스페인의 젊은 해부학자 산티아고 라몬 카할(S. R. Cajal)은 마드리드에 있는 친구의 연구실을 찾았다. 당시 이탈리아 연구자 골지(C. Golgi)가 개발했다는 방법으로 뇌의 단편을 염색했다. 그 순간을 그는 이렇게 술회한다. “모든 것이 손으로 그린 다이아그램처럼 명징했다.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숨이 턱 막힌 채 현미경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신경계는 담쟁이덩굴처럼 또는 이끼 덩어리처럼 얽히고설켜 있었다. 모든 것들은 이음새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비록 당시 기술로는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카할의 직관과 이성은 그들 각각이 미세하게 분절되어 있음을 감지했다. 그의 뇌 안에서는 천억 개에 이르는 신경세포들이 물경 100조 개에 이르는 시냅스를 통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수없이 신호를 주고받으며 대체 자신이 대체 어떻게 생긴 존재인지 궁리하고 있었다. 

 

 

라몬 카할(S. R. Cajal)이 염색에 성공한 뇌의 단편

라몬 카할(S. R. Cajal)이 염색에 성공한 뇌의 단편 (이미지 출처: frontiersin.org)

 

 

시냅스는 연결의 소프트웨어이자 분절의 하드웨어다. 뉴런과 뉴런을 연결하면서 동시에 뉴런의 독립성을 유지시킨다. 성장과 퇴화가 유연하지만 합목적적으로 지속되는 정보의 울돌목이다. 무수히 많은 시냅스를 매개로 그물이 된 신경계를 통해 우리는 기억하고 연상하며 사유한다. 오감(五感)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로 외부 경험 세계를 뇌신경 그물 내부에 재구축하고 이미지화하여 자신의 판단과 행동의 준거로 삼는다. 요새 말하는 컴퓨터 네트워크 안의 가상세계와 닮았다. 오랜 세월 진화한 생물학적 디지털 트윈(digital twin)1)이랄까.

1)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가상공간에 실물과 똑같은 물체를 만들어 다양한 모의시험(시뮬레이션)으로 검증해 보는 기술을 말한다. 가령 항공기가 비행하면서 겪는 환경 정보를 수집해 디지털 트윈에 적용하면 환경이 항공기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고 기기 고장을 예측할 수 있다.

 

워싱턴에 있는 미 국립우주항공박물관의 어느 한 화면은 수많은 공항들 사이를 오가는 항공기의 이동을 보여준다. 자동차와 비행기가 나오기 이전 사람과 물건의 위치 이동을 상상해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복잡해졌다. 시선을 옮겨 형광염료로 염색한 쥐의 대뇌 피질을 확대한 단면 사진을 톺아본다. 3차원 공간을 꽉 채운 빽빽한 연결망. 그들을 타고 떠도는 신호들. 불빛 사진이나 항공기 이동 모니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다. 전 세계 인터넷 망을 통한 정보 트래픽을 이미지화 한다면 글쎄, 쥐의 대뇌 피질과 비교할 만할지도 모르겠다.

 

 

 ▲ 이동 중인 수많은 항공기들. 신경망과 비교하면 연결 구조가 매우 단순하다.

이동 중인 수많은 항공기들. 신경망과 비교하면 연결 구조가 매우 단순하다. ⓒ정택동

 

 

쥐의 대뇌 피질 단면, 항공기 이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쥐의 대뇌 피질 단면, 항공기 이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출처-K.D. Micheva et al. Neuron 68, 639 (2010))

 

 

인터넷에는 막대한 양의 데이터가 초고속으로 전달되고 공유되지만 그들의 의미와 가치, 실효성은 연결과 분절의 양태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메커니즘의 얼개는 뇌 신경망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개별 신경세포의 소마(soma)는 생존과 기능 유지를 위한 자생적 플랫폼 역할을 담당한다. 신경세포 내부에서 생화학적으로 축적, 가공된 정보는 다시 시냅스를 통해 가소성(plasticity, 생체가 외부 변화에 대응하여 정상 상태를 유지하는 성질)을 가지고 다른 플랫폼으로 전파, 공유된다. 시냅스 하나 소마 하나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이루는 가소성 그물이 또 하나의 상위 플랫폼을 이룬다. 관계 자체가 곧 존재를 규정한다는 공자(孔子)식 인간관이 새삼 의미 있게 다가온다.

 

21세기 들어 정보와 물류의 멀티스케일 연결을 통해 거대한 그물이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분야별, 지역별 플랫폼이 명멸한다. 개인과 개인, 플랫폼과 플랫폼 사이는 수없이 많은 통로로 연결되고 중간 관문에 의해 서로 분절된다. 분절의 지점에서 정보와 물류가 변환되고 제어됨으로써 플랫폼 각각의 고유성과 독립성이 유지된다. 연결되어 있기에 플랫폼의 층위가 구성될 수 있고 분절되어 있기에 고유의 기능을 할 수 있다. 연결과 분절의 그물은 갈수록 더 빨리 확대되고 촘촘해지고 있다. 생활환경의 변화는 개인의 자아를 변화시킨다. 문화가 바뀌고 새로운 사회적 자아가 탄생한다.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의 그물이 뇌 속의 그물에 투영된다. 두 가지 그물은 상승(相乘)한다.

 

물질은 쪼개면 쪼갤수록 알 수 없는 현상, 새로운 세계가 나온다. 반대로 멀리 나가도 마찬가지다. 우주는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크고, 그나마도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 공간적 크기를 기준으로 한 자연에 대한 탐구는 끝없이 도는 쳇바퀴일 수도 있다. 일정한 크기나 형상 없이 뻗어나간 뉴런의 모양새는 연계와 분절의 네트워킹에 있어서 공간적인 거리가 더 이상 핵심적이지 않음을 알려준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팩토리와 3D 프린터의 등장으로 우리 사회의 물류에 있어서 거리 개념이 이미 달라지고 있다. 개별적인 입자에 대한 지식의 조합으로 거대한 시스템을 이해하려는 환원주의적인 노력은 초연결 시대에 들어서서 또 한 번 한계를 절감한다. 되새기되,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3D 프린터로 만든 두개골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현대에 태어나 성장해온 인간은 과거 환경에서는 살기 어려울 것이다. 샤워를 못하고 날벌레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서만은 아니다. 성 차별, 신분 차별, 인권 억압도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더욱 큰 고통은 어쩌면 스마트폰이 없이 사는 삶일 수 있다. 관계는 곧 인간 자체이고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옆집 사는 사람과는 잘 모르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와는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다양한 원소들이 분포하는 창백한 행성 지구에서 원자들은 분자를 만들고 분자들은 생명체를 만든다.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에너지에 힘입어, 탄소가 대기와 해양, 육지를 순환하며 균형을 이룬다. 한없이 이기적인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우주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지구도 무심한 성주괴공(成住壞空)2)을 도도히 거듭했을 것이다. 어쩌면 끝내 견뎌내지 못할 충격을 지구에게 가하고 있는 결점 투성이 인간의 폭주는 현재진행형이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그들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생각할 줄 아는 존재라는 점이다.

2) 성주괴공(成住壞空): 세계가 성립되는 지극히 긴 기간인 성겁(成劫), 머무르는 기간인 주겁(住劫), 파괴되어 가는 기간인 괴겁(壞劫), 파괴되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지속되는 기간인 공겁(空劫)을 말함.

 

앞으로 우리의 삶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더 편리하고 더 오래 사는 삶이 아니다. 일자리가 부족해지고 아날로그 인간관계가 엷어지는 삶만도 아니다. 그마저도 과거로부터 미래를 그리는 선형적 유추일 뿐이다. 이제 인류는 비 유클리드 시공간을 살아갈 것이다. 이동과 앎의 범주가 넓어지면서 당연시되던 기존 불문율들이 도전받을 것이다. 접촉과 교류의 형태가 달라지면서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물음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할 것이다. 과거 동시대를 살았던 인간들 사이에 이루어졌던 석연치 않은 타협이 오늘날 상식과 규칙으로 상속된 사례는 흔해빠졌다. 덮어두고 있던 모순들은 당혹스러운 질문에 직면할 것이다. 새로운 합의로 새로운 상식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느냐, 얼마나 유연하고 신속하게 대처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바야흐로 우리 사회는 우리 뇌를 닮아가고 있다. 복잡성이 늘어나면서 개별 자아의 연계와 네트워킹을 통해 새로운 집단 자아가 탄생하고 있다. 삶의 모든 양상들이 데이터가 되고, 가뭇없이 잊힌 사실들이 모조리 기억되고 있다. 어느 기업의 어느 개발자에 의해 태어난 인공자아는 인간들의 압축된 경험을 자양분으로 초고속 진화한다. 그들은 새로운 자신을 복제하고 새로운 존재들을 탄생시킬 것이다. 특이점(singular point)이다. SF영화의 배경이 아니라 여기저기 스며드는 현실이다. 

 

혹자는 이미 특이점이 가까워졌다고 말하고 혹자는 아직은 지나친 염려라고 한다. 왈가왈부를 떠나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특이점까지 남은 여유는 기술 진보를 위한 물리적인 시간만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성찰에 따른 함수라는 점이다. 우리가 바꾸어놓은 세계에 걸맞는 인간관을 가질 수 있다면 특이점은 미루어지거나 특이점이 오더라도 최소한 덜 당혹스러울 것이다.

 

 

마트료시카

 

 

우리가 얼떨결에 태어난 우주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Matryoshka)’를 연상케 한다. 우리가 만들어나가고 있는 구조는 우리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구조의 변주일지도 모른다. 연결과 분절의 모순적 조합 속에서 변주곡은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가슴이 벌렁거리지만 당황하거나 막연히 두려워해서는 뭐가 뭔지 모르고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숨을 고르자. 내가 누군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 편이 차라리 희망의 단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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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동
정택동

전기화학 연구자. 현재 서울대학교 화학부 교수. 초미세 계면 전기화학, 고속 다중분석시스템, 신경-전자 인터페이스 등을 연구하고 있다. 대한화학회 학술대상(2014),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연구대상(2017) 등 다수의 학술상을 수상했고 여러 국제학술지의 편집과 자문 활동을 하고 있다.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원장, 대한화학회 전기화학분과회장 등을 역임했다. 카오스 강연, 서울대학교 자연과학 공개강연 등 과학을 매개로 대중과 호흡을 맞추어 오고 있다.

(이미지 제공: ⓒ정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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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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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이미지

이**

2020-04-04

좋다. 시청홈페이지로 인문학사이트를 찾아냈다. 다양한 분야의 글이 있어 그저 좋다. 과학과 관련된 용어를 오랜만에 새로운 단어로 접해봤다. 천천히 읽어보니 이해가 간다. 새로운 시대에 살아가면서 배우고 익힐 것이 많아져 복잡하긴한데 그만큼 생활이 편리하다! 네트워크 연결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옆집사람보다 멀리 살고 인종도다르고.. 그런 사람들과 여러 주제로 채팅은 참 쉬운데 정말 옆집이웃?새로운 친구?사람?과 대면하기 어려워졌다. 어렸을 때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위해 대화했던 그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 달라진 건지 아님 사회성이 부족해진건지 껄끄러워진건지 아니면 이 모든게 다 해당되는지 모르겠다. 휴대전화로 편하게 소통하기도 좋은데 사람을 대하는 가치관? 사람존중? 공감에 더 집중하는게 먼저인듯하다. 그보다 나를 돌보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야겠다.. 숨을 고르고 나를 봐야겠다..는 말을 이런 뜻으로 해석했다. 이 교수님은 빠르게 변화하고있는 시대에서 발생가능한 일들에 우왕좌왕하지말고 나를 먼저 보라고 한걸까.. 코로나19로 사람과의 접촉을 덜하면서 집생활로 인해 참 많은 생각들을 해봤고 해본다. '우리가 만들어나가고 있는 구조는 우리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구조의 변주일지도 모른다.' 오... 그런거같다. 그래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라는 걸까.. 평소와 다른 생각을 해보니 그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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