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어릴 때 가장 빠른 열차는 시속 100km 정도의 ‘새마을호’였다. 빠르다고 해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 이상 걸렸는데, 분명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비행기를 타기에는 가깝고, 비용도 부담스러운 어중간한 거리였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시속 300km를 자랑하는 KTX가 등장하면서 전국이 말 그대로 당일 생활권이 되었다. 이렇게 움직임이 빨라져서 생활 반경이 넓어진다는 말은 그만큼 지역 간 교류가 잦아지고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나아가 고립되었던 지역이 교통하면서 사회적, 문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다름 아닌 ‘속도’다.
인류가 과학적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본지도 어느덧 수백 년이 흘렀다. 갈릴레오나 케플러 같은 학자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회전 법칙에 대한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전까지도 우주는 작고 반짝이는 별들이 서로 붙은 채 회전하는 하늘의 지붕이라고 여겨지곤 했지만, 이들이 발견해가던 우주는 그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것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인류는 밤하늘을 빛내는 은하수의 크기가 빛의 속도로 가로질러도 10만 년이 걸릴 정도로 거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은하 또한 광대한 우주 속의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인류의 인식 속에서 우주가 커져감과 동시에, 한편에선 지구 밖 우주로 진출하려는 인류의 꿈도 자라났다. 1957년 스푸트니크 1호가 처음 우주 공간으로 진출한 이후, 인류는 불과 12년 만에 달에 첫발을 내딛는 쾌거를 이뤘다. 그야말로 엄청난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의 흥분된 분위기로는 이런 발전 속도라면 머잖아 일반인이 달에 관광을 가고 더 먼 행성이나 태양계 너머도 쉽사리 정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거대한 우주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달은 밤하늘의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밝기와 크기를 자랑한다. 하지만 그것은 달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천체이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지구 둘레의 고작 9배 정도이기에 아폴로가 달에 도달하는 데는 단 4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우주로 향하는 바로 다음 관문이라고 할 화성만 해도 편도 8개월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달과는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목성이나 토성은 몇 년을 날아가야 하고, 태양계 경계면까지는 40년을 여행해야 한다.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인간이 달에 발을 디딘지 벌써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아직 그 너머까지 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오직 무인 탐사선들만 항로를 개척해왔을 뿐이다. 물론 아폴로 시대에 비해 세월이 많이 지났고 로켓 기술이나 우주선 기술도 많이 발전한 만큼, 다시 한 번 달에 발을 디디거나 화성을 향해 떠나 볼 여러 가지 능력을 갖췄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 등에서 관련 계획들을 수립하고 찬찬히 실행해나가는 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그럼 그 다음은’ 이라는 질문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다. 태양계 안쪽만 생각하면 일생을 바치는 용감한 우주인들의 희생으로 어찌어찌 다녀올 수 있겠지만, 빛의 속도의 1만분의 1도 되지 않는, 초속 20킬로미터 정도의 현행 로켓기술로는 태양계를 벗어나 다른 행성계에 도달하는 일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당장 우리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다른 행성계인, 즉 우리 ‘옆집’이라고 할 ‘센타우리 알파’에 도달하는 데만 빛의 속도로 4.3년, 인류의 로켓으로는 수만 년이 걸린다. 이것은 마치 종이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일과 같다.
연료를 많이 넣고 로켓의 속도와 힘을 늘리면 되지 않느냐, 항변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단지 인류의 일천한 기술문제만 가로놓인 게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질량이 있는 모든 물체의 광속 도달을 원리적으로 ‘금지’한다. 그러니 광속에 아주 근접한 신묘한 엔진을 만들어 센타우리 알파를 향해 대략 10년 잡고 출발한다 한들, 그 바깥의 무한한 세상은 여전히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지역으로 남게 된다. 우리 은하의 반대편 끝까지의 거리는 7만 광년, 빛으로 달려도 7만년이 걸리고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역시 옆집이라고 할 안드로메다 은하는 250만 광년 거리에 있다. 인류가 감히 꿈꾸어 나설 수 있는 여행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극복할 방법은 전혀 없을까? 있다! 바로 ‘축지법’을 쓰는 거다. 황당한 소리 같지만 실은 아주 진지한 개념이다. <스타트렉>이나 <스타워즈>를 필두로 한 수많은 SF 작품은 주인공이 문명이 발달한 행성들을 자유로이 왕래하지 않으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특수상대성이론을 알고 있던 작가들은 이 문제를 그럴 듯하게 해결해야 했다. 그들의 상상 속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바로 축지법, 즉 ‘공간 구부리기’다. 내가 빛보다 빨리 움직일 수 없으면 내 앞의 공간을 압축해버리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경우 나는 사실상 움직이지 않거나 매우 느리게 움직여도 되기 때문에 광속 한계와 무관해진다. 축지법의 원리도 한자에서 연상되듯 발상 자체가 같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공간 구부리기, 즉 ‘워프 warp’의 개념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거다. 1915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은 기본적으로 중력으로 구부러진 공간 개념이 핵심이다. 이를테면 이론을 발전시켜 에너지와 기술을 잘 운용하면 공간을 인위적으로 접고 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의미를 오랫동안 알고 있었지만 이것을 실제로 적용하려는 시도는 - 그 개념의 다소 황당한 면과 스케일 때문에 - 진지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스타트렉> 등의 SF 물을 접한 과학자들로 세대가 바뀌면서 이야기는 조금씩 달라졌다.
급기야 1994년, 멕시코의 물리학자이자 <스타트렉>의 오랜 팬인 미구엘 알큐비에르 박사는 공간 구부리기 방식의 워프 항행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우주선의 앞쪽 공간을 수축시키고 뒤쪽 공간을 팽창시키는 방식으로 광속보다 훨씬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물론 이런 이론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현실에 곧장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큐비에르의 방정식은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음의 에너지 밀도의 물질’을 ‘연료’로 제시하고 있고, 만약 이런 것이 우주 어딘가에 있다 하더라도 센타우리 알파까지 가려면 500킬로그램이나 모아야 한다. 당장 덤벼들 수 있는 여행은 확실히 아닌 거다.
하지만 절대 불가능에 가깝던 상황에서 물리학 이론까지 일부 정립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발전이다. 상상 속의 세계였을 뿐이었던 이야기가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크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 간 알큐비에르의 이론은 조금씩 수정되면서 효율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최근의 이론에 따르면 완성되는 경우 기존 방식으로는 수만 년이 걸리는 알파 센타우리까지의 여행을 단 2주일 만에 완료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인류는 태양계 바깥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수단을 얻게 될 것이고, 스타트렉이나 스타워즈의 이야기들이 현실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기술은 언제쯤 완성될까? 나사는 이미 2009년부터 작은 규모나마 알큐비에르의 이론을 적용시키기 위한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해롤드 화이트 박사가 이끄는 이 연구팀은 입자 규모의 크기에서 공간 수축이 가능한지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고 있지만 다른 우주 연구의 우선순위에 밀려 큰 지원을 받고 있지는 못하다. 그런데 지난 9월 25일, 미국의 우주항공학 포럼에서 앨러배마 대학의 연구원 조셉 애그뉴는 지금의 상황이 잘못돼 있으며 워프 기술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주목을 받았다. 그는 알큐비에르의 방정식을 다시 소개하고 2017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중력파 검출을 예로 들며, 이제 우리가 이 이론에 대해 깊이 연구해야 할 시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렇게 한때는 비과학의 정점이었던 광속 돌파, 워프 드라이브가 이제는 서서히 주류 과학의 범주로 편입되고 있다. <스타트렉>에 따르면(?) 인류가 처음으로 워프 드라이브를 가동시키는 때는 2063년, 즉 40여 년 후다. 나사가 몇 년 전에 발표한 워프 우주선의 컨셉 디자인에 적힌 숫자는 2086년, 즉 60여년 후를 가리키고 있다. 물론 SF영화나 우주선 디자인에 적힌 숫자들을 진지하게 따지는 것은 실상 아무 의미도 없지만, 적어도 금세기 내로 어떻게든 워프 기술을 실현시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져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 생존 중인 시대에, 오래 전 달을 향해 떠나던 아폴로의 우주인들에게서 느꼈던 것처럼, 전인미답의 머나먼 세상을 향해 출발하는 워프 우주선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그 날은 개인적으로 내 인생 최고의 날이 될 것이다. 인류가 드디어 태양계의 구속을 벗어나 광대한 우주와 그 속의 경이로움을 직접 대면하는 첫날이기 때문이다.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 성공회대 교양학부 외래교수/ 경희대학교 철학과, 런던 칼리지 오브 뮤직 앤 미디어/딴지일보 전 편집장 및 논설위원.
2008년 SBS 창사특집 에너지 다큐멘터리 <코난의 시대> 작가. 휴스턴 영화제 대상 수상. 과학 팟캐스트 <과학하고 앉아있네> 진행 및 운영 - 누적 다운로드 6년간 7500만.
저서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태양계 연대기>, <파토의 호모 사이언티피쿠스>, 공저 <과학하고 앉아있네 1,2,3,4,5,6,7,8,9,10> <호모 사피엔스씨의 위험한 고민> <정치가의 연애> <희망을 통찰하다> 등. 이미지_ⓒ원종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원거리 우주여행을 위한 조건'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원거리 우주여행을 위한 조건
빛보다 빠를 수 없다면 축지법을 써라
원종우
2019-10-14
<스타트렉>이나 <스타워즈>를 필두로 한 수많은 SF 작품은
주인공이 문명이 발달한 행성들을 자유로이 왕래하지 않으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특수상대성이론을 알고 있던 작가들은 이 문제를 그럴 듯하게 해결해야 했다.
그들의 상상 속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바로 축지법, 즉 ‘공간 구부리기’다.
필자가 어릴 때 가장 빠른 열차는 시속 100km 정도의 ‘새마을호’였다. 빠르다고 해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 이상 걸렸는데, 분명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비행기를 타기에는 가깝고, 비용도 부담스러운 어중간한 거리였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시속 300km를 자랑하는 KTX가 등장하면서 전국이 말 그대로 당일 생활권이 되었다. 이렇게 움직임이 빨라져서 생활 반경이 넓어진다는 말은 그만큼 지역 간 교류가 잦아지고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나아가 고립되었던 지역이 교통하면서 사회적, 문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다름 아닌 ‘속도’다.
인류가 과학적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본지도 어느덧 수백 년이 흘렀다. 갈릴레오나 케플러 같은 학자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회전 법칙에 대한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전까지도 우주는 작고 반짝이는 별들이 서로 붙은 채 회전하는 하늘의 지붕이라고 여겨지곤 했지만, 이들이 발견해가던 우주는 그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것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인류는 밤하늘을 빛내는 은하수의 크기가 빛의 속도로 가로질러도 10만 년이 걸릴 정도로 거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은하 또한 광대한 우주 속의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인류의 인식 속에서 우주가 커져감과 동시에, 한편에선 지구 밖 우주로 진출하려는 인류의 꿈도 자라났다. 1957년 스푸트니크 1호가 처음 우주 공간으로 진출한 이후, 인류는 불과 12년 만에 달에 첫발을 내딛는 쾌거를 이뤘다. 그야말로 엄청난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의 흥분된 분위기로는 이런 발전 속도라면 머잖아 일반인이 달에 관광을 가고 더 먼 행성이나 태양계 너머도 쉽사리 정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거대한 우주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달은 밤하늘의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밝기와 크기를 자랑한다. 하지만 그것은 달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천체이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지구 둘레의 고작 9배 정도이기에 아폴로가 달에 도달하는 데는 단 4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우주로 향하는 바로 다음 관문이라고 할 화성만 해도 편도 8개월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달과는 아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목성이나 토성은 몇 년을 날아가야 하고, 태양계 경계면까지는 40년을 여행해야 한다.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인간이 달에 발을 디딘지 벌써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아직 그 너머까지 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오직 무인 탐사선들만 항로를 개척해왔을 뿐이다. 물론 아폴로 시대에 비해 세월이 많이 지났고 로켓 기술이나 우주선 기술도 많이 발전한 만큼, 다시 한 번 달에 발을 디디거나 화성을 향해 떠나 볼 여러 가지 능력을 갖췄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 등에서 관련 계획들을 수립하고 찬찬히 실행해나가는 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그럼 그 다음은’ 이라는 질문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다. 태양계 안쪽만 생각하면 일생을 바치는 용감한 우주인들의 희생으로 어찌어찌 다녀올 수 있겠지만, 빛의 속도의 1만분의 1도 되지 않는, 초속 20킬로미터 정도의 현행 로켓기술로는 태양계를 벗어나 다른 행성계에 도달하는 일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당장 우리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다른 행성계인, 즉 우리 ‘옆집’이라고 할 ‘센타우리 알파’에 도달하는 데만 빛의 속도로 4.3년, 인류의 로켓으로는 수만 년이 걸린다. 이것은 마치 종이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일과 같다.
연료를 많이 넣고 로켓의 속도와 힘을 늘리면 되지 않느냐, 항변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단지 인류의 일천한 기술문제만 가로놓인 게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질량이 있는 모든 물체의 광속 도달을 원리적으로 ‘금지’한다. 그러니 광속에 아주 근접한 신묘한 엔진을 만들어 센타우리 알파를 향해 대략 10년 잡고 출발한다 한들, 그 바깥의 무한한 세상은 여전히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지역으로 남게 된다. 우리 은하의 반대편 끝까지의 거리는 7만 광년, 빛으로 달려도 7만년이 걸리고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역시 옆집이라고 할 안드로메다 은하는 250만 광년 거리에 있다. 인류가 감히 꿈꾸어 나설 수 있는 여행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극복할 방법은 전혀 없을까? 있다! 바로 ‘축지법’을 쓰는 거다. 황당한 소리 같지만 실은 아주 진지한 개념이다. <스타트렉>이나 <스타워즈>를 필두로 한 수많은 SF 작품은 주인공이 문명이 발달한 행성들을 자유로이 왕래하지 않으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특수상대성이론을 알고 있던 작가들은 이 문제를 그럴 듯하게 해결해야 했다. 그들의 상상 속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바로 축지법, 즉 ‘공간 구부리기’다. 내가 빛보다 빨리 움직일 수 없으면 내 앞의 공간을 압축해버리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경우 나는 사실상 움직이지 않거나 매우 느리게 움직여도 되기 때문에 광속 한계와 무관해진다. 축지법의 원리도 한자에서 연상되듯 발상 자체가 같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공간 구부리기, 즉 ‘워프 warp’의 개념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거다. 1915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은 기본적으로 중력으로 구부러진 공간 개념이 핵심이다. 이를테면 이론을 발전시켜 에너지와 기술을 잘 운용하면 공간을 인위적으로 접고 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의미를 오랫동안 알고 있었지만 이것을 실제로 적용하려는 시도는 - 그 개념의 다소 황당한 면과 스케일 때문에 - 진지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스타트렉> 등의 SF 물을 접한 과학자들로 세대가 바뀌면서 이야기는 조금씩 달라졌다.
급기야 1994년, 멕시코의 물리학자이자 <스타트렉>의 오랜 팬인 미구엘 알큐비에르 박사는 공간 구부리기 방식의 워프 항행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우주선의 앞쪽 공간을 수축시키고 뒤쪽 공간을 팽창시키는 방식으로 광속보다 훨씬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물론 이런 이론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현실에 곧장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큐비에르의 방정식은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음의 에너지 밀도의 물질’을 ‘연료’로 제시하고 있고, 만약 이런 것이 우주 어딘가에 있다 하더라도 센타우리 알파까지 가려면 500킬로그램이나 모아야 한다. 당장 덤벼들 수 있는 여행은 확실히 아닌 거다.
하지만 절대 불가능에 가깝던 상황에서 물리학 이론까지 일부 정립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발전이다. 상상 속의 세계였을 뿐이었던 이야기가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크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 간 알큐비에르의 이론은 조금씩 수정되면서 효율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최근의 이론에 따르면 완성되는 경우 기존 방식으로는 수만 년이 걸리는 알파 센타우리까지의 여행을 단 2주일 만에 완료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인류는 태양계 바깥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수단을 얻게 될 것이고, 스타트렉이나 스타워즈의 이야기들이 현실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워프 기술'을 도입시킨 나사의 IXS Enterprise ⓒhttps://space-engine.fandom.com
그렇다면 이런 기술은 언제쯤 완성될까? 나사는 이미 2009년부터 작은 규모나마 알큐비에르의 이론을 적용시키기 위한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해롤드 화이트 박사가 이끄는 이 연구팀은 입자 규모의 크기에서 공간 수축이 가능한지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고 있지만 다른 우주 연구의 우선순위에 밀려 큰 지원을 받고 있지는 못하다. 그런데 지난 9월 25일, 미국의 우주항공학 포럼에서 앨러배마 대학의 연구원 조셉 애그뉴는 지금의 상황이 잘못돼 있으며 워프 기술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주목을 받았다. 그는 알큐비에르의 방정식을 다시 소개하고 2017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중력파 검출을 예로 들며, 이제 우리가 이 이론에 대해 깊이 연구해야 할 시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렇게 한때는 비과학의 정점이었던 광속 돌파, 워프 드라이브가 이제는 서서히 주류 과학의 범주로 편입되고 있다. <스타트렉>에 따르면(?) 인류가 처음으로 워프 드라이브를 가동시키는 때는 2063년, 즉 40여 년 후다. 나사가 몇 년 전에 발표한 워프 우주선의 컨셉 디자인에 적힌 숫자는 2086년, 즉 60여년 후를 가리키고 있다. 물론 SF영화나 우주선 디자인에 적힌 숫자들을 진지하게 따지는 것은 실상 아무 의미도 없지만, 적어도 금세기 내로 어떻게든 워프 기술을 실현시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져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 생존 중인 시대에, 오래 전 달을 향해 떠나던 아폴로의 우주인들에게서 느꼈던 것처럼, 전인미답의 머나먼 세상을 향해 출발하는 워프 우주선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그 날은 개인적으로 내 인생 최고의 날이 될 것이다. 인류가 드디어 태양계의 구속을 벗어나 광대한 우주와 그 속의 경이로움을 직접 대면하는 첫날이기 때문이다.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 성공회대 교양학부 외래교수/ 경희대학교 철학과, 런던 칼리지 오브 뮤직 앤 미디어/딴지일보 전 편집장 및 논설위원. 2008년 SBS 창사특집 에너지 다큐멘터리 <코난의 시대> 작가. 휴스턴 영화제 대상 수상. 과학 팟캐스트 <과학하고 앉아있네> 진행 및 운영 - 누적 다운로드 6년간 7500만. 저서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태양계 연대기>, <파토의 호모 사이언티피쿠스>, 공저 <과학하고 앉아있네 1,2,3,4,5,6,7,8,9,10> <호모 사피엔스씨의 위험한 고민> <정치가의 연애> <희망을 통찰하다> 등. 이미지_ⓒ원종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원거리 우주여행을 위한 조건'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댓글(0)
우주소년, 집을 떠날 준비를 마치다
최진영
뉴스페이스 시대와 우리나라 발사체의 미래
김진한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