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에프 작가 테드 창의 소설을 출간하면서 박찬욱 감독에게 글을 청탁한 적이 있다. 그동안 꾸준히 에스에프 소설을 즐겨 읽어 왔다는 걸 알기에 본인에게 영감을 준 작품들을 골라서 리뷰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박찬욱 감독이 쓴 글을 좋아하는 팬이었고 어떤 자리에서 딱 한 번 스치듯 만났을 뿐 이렇다 할 인연은 없었다. 며칠 후 그는 정중하게 거절의 답을 보내왔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단편영화 준비로 경황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좋은 에스에프 소설을 내줘서 고맙다고. 그래서 한잔 사고 싶다고. 몇 권의 책을 전부 다시 읽고 고민하며 글을 쓰기에는 시간이 모자라지만 하룻저녁 술을 마실 여유는 있다고. 원고청탁을 거절당하고 술을 얻어먹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장소는 아마도 그의 단골집인 듯한 연남동 ‘송가’였다.
세월이 꽤 흘렀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들은 내용은 대부분 잊어버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연출뿐만 아니라 시나리오에도 일가견이 있는 박찬욱 감독의 작업 방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친절한 금자씨>를 만들 때부터 정서경 작가와 함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른바 ‘공동각본’이다. “컴퓨터 하드는 공유하면서 모니터와 키보드를 각자 한 벌씩 가지고 정서경이 초고를 쓰면 박찬욱이 그걸 수정하고 박찬욱이 써놓은 글을 정서경이 고치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해 나간다”고 그는 설명해 주었다. 예컨대 정서경 작가가 “너나 잘해”라고 써놓은 걸 박찬욱 감독이 “너나 잘하세요”로 고치면서 명대사가 탄생한 거다. 공동각본이라는 것은 말이 쉽지 막상 실행하기란 좀처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서로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박찬욱 감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비슷한 방식의 출판 기획을 시도한 적이 있다. 이승엽 선수가 개인통산 400홈런을 달성한 2015년 무렵의 일이다. 그해 연말에 나는 마음산책 출판사의 편집자, 은행나무 출판사의 편집자와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책을 만드는 이들과 함께 해외에 나가면 꼭 들르는 곳 가운데 하나는 서점이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디든 책이 가득한 공간에 가면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빼놓지 않고 들른다. 시험을 코앞에 두고 공부는 하기 싫은데 놀기는 불안하니까 쓸데없는 소설이라도 찾아 읽는 기분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실지. 일(출판)이 지겨워서 외국에 왔는데 무턱대고 놀기는 좀 그러니까 서점에라도 간다는 일종의 심리적 알리바이일지도 모르겠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에서 일주일 가량 머문 뒤 우리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영국이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앞에는 과연 크고 작은 서점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 블랙웰 서점은 하마터면 무심코 지나칠 뻔했다. 입구가 작았기 때문이다. ‘이 근처의 많은 서점을 전부 돌아볼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지나칠까’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이라도 들여다보고 가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역시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밖에서 마주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건물 두 채가 통째로 서점이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에 옥스퍼드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서점은 두 채의 아래쪽을 터서 중층 구조로 꾸며놓은 지하 매장이 압권이다. 블랙웰 서점에서 재미있었던 건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전망이 좋은 자리에 새겨진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좋아요(Photo Point)'라는 문구였는데 서점에서 이런 자신감 충만한 안내를 본 적이 없는 나는 살짝 감탄했다. 다른 하나는 ‘서프라이즈 노벨(A Novel Surprise)’이라는 이름의 매대였다.
▲ 블랙웰 서점 외부(위), 내부(아래) 전경 ⓒ김홍민
'서프라이즈 노벨' 매대 위에는 미국, 프랑스, 영국, 일본 등 각 나라에서 출간된 소설 가운데 블랙웰 서점의 스태프들이 엄선한 작품이 제목과 저자의 이름이 가려진 채 진열되어 있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출간 국가와 가격뿐이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어떻게 하면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소설을 소개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 끝에 기획되었다고 한다. 영국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서점들이 ‘블라인드 데이트 위드 어 북(Blind Date with a Book)’이라는 이름으로 각자 자신들 서점의 콘셉트에 맞게 책을 진열하여 판매한다는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봉인된 포장지에는 (1) 소설의 첫 문장만 적어둔다든가 (2) ‘기괴함’, ‘유머러스함’ 같은 키워드만 인쇄해 놓는다든가 (3) 발행한 나라의 이름만 적어놓는 식으로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한 아이디어를 담았다.
▲ 영국 블랙웰 서점의 '서프라이즈 노벨' 매대 ⓒ김홍민
▲‘블라인드 데이트 위드 어 북(Blind Date with a Book)' 매대 ⓒ김홍민
이듬해 가을 무렵에는 일본에 다녀왔다. 마침 가격이 저렴한 비행기 티켓이 눈에 띄었고 그 시기 멤버들의 일정도 맞았다. 그때 교토의 어느 서점에 들렀다가 흥미로운 광경을 목도했다. 매대에 같은 책이 여러 권 쌓여 있었는데 책 표지에 제목 대신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 책을 어떻게 추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다’, ‘매력적이다’라고 느끼게 할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책 제목을 숨기고 팔기로 했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본에서 워낙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고X’는 책 전체를 전면 띠지로 가리고 랩핑하여 책에 대해 알 수 없게 만든 채로 판매하는 문고본이다. 내용을 추측할 수 있는 힌트라고는 (1) 500페이지가 넘는다는 것, (2) 가격이 810엔이라는 점, (3) 띠지에 쓰인 소개 문구뿐이었다. 기획자는 사와야 서점 페잔 점의 직원인 나가에 다카시 씨였다. 그는 무크지 <이 문고본이 대단하다 2016>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한 바 있다.
“2016년 7월 21일, 맨 처음에 60권을 매대에 진열했다.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을 ‘사와야 서점 올 여름 최대의 도전’이라고 이름 붙여 트위터에 올렸다. 그렇다, 이건 나에게 ‘도전’이었다. 솔직히 말해 팔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60권을 매대에 진열할 때 나는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30권이 팔릴 때까지는 매대에서 치우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자신이 없었다. 표지도 제목도 알 수 없는데다 문고본치고는 810엔이나 하는 살짝 비싼 책이다. 이 60권이, 설마 5일 만에 매진될 거라고는, 게다가 똑같은 형태로 전국에 퍼질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책은 현재 ‘문고X’라 불리고 있다.”
▲ 일본 사와야 서점의 '문고X' 매대 ⓒ김홍민
<아사히신문>과 <모리오카 경제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모리오카 역 건물 안에 자리 잡은 사와야 서점의 페잔 점에서 이 책의 판매는 한 달에 두세 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문고X’로 이름 붙이자 불과 일주일 만에 60부가 팔렸다. 이에 페잔 점의 점장인 다구치 씨는 잘 알고 지내는 다른 서점들에게도 상황을 알렸고 곧 전국 650개 이상의 서점들로 ‘문고X’ 기획이 퍼져 나갔다. 이 대목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이 책을 구입한 독자들의 반응이었다. “표지가 보이는 상태였다면 절대 사지 않았을 테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 책을 사서 읽게 되어 정말로 좋았다”는 소감이 많았다. 게다가 독자들은 ‘부디 SNS에 제목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는 문고X 기획자의 당부를 흘려듣지 않았다. 실제로 ‘문고X’가 선을 보이기 시작한 2016년 7월 21일부터 해당 서점에서 공식적으로 이 책의 제목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한 12월 9일까지 SNS에서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책의 제목을 공개하지 않았다. 책을 구입한 독자가 “나는 문고X뿐만 아니라 문고X 기획의 취지까지 함께 구매했다”는 내용의 포스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프라이즈 노벨’과 ‘문고X’를 목도한 우리는 ‘만약 이런 이벤트를 서점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진행한다면 어떤 형태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한국의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어떤 결과가 초래되든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당연하기 그지없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마음산책, 은행나무, 북스피어의 2017년 라인업 가운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책’을 선택하여 동시에 출간해 보자는 데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두 개 출판사도 아니고 세 개나 되는 출판사가 막상 콘셉트를 잡고 실무를 진행해 나가는 것은, 생색을 내자는 건 아니지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뭔가 결정할 때마다 머리를 맞대야 했고 의견이 달라서 목소리를 높인 적도 있었다. 한데 이 과정이 또, 뜻밖에 재밌는 거다. “이렇게 하는 게 더 흥미로울 것 같아”, “아니지, 저렇게 하는 게 더 낫지”라며 다들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리고 열을 올리는 동안 주옥같은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매일 화상통화까지는 아니지만 회의+회의를 거듭하며 두 달에 걸쳐 준비했다. 세 출판사가 동시에 책을 출간하면서, 6주 동안 제목을 가린 채로 팔고 그 이후에 공개할 테니 이미 구입한 독자들은 SNS에 제목과 저자 이름을 올리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국내 출판사 마음산책, 은행나무, 북스피어가 기획한 'X' 시리즈 ⓒ김홍민
그리하여 어떤 결과가 도래하였나. 거의 모든 일간지에서 이 기획을 보도했고 6주 동안 2만부가 팔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무엇보다 “평소에는 책을 사지 않았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서 구입했다”는 독자들이 많았다는 점이 가장 뿌듯했다. 그들은 왜 이 책을 샀을까. 궁금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책이라는 것은 사는 사람은 사지만 사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사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사지 않는 사람은 사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다며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다른 모든 업종과 마찬가지로 출판사도 계속해서 새로운 독자를 늘리지 않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자를 늘릴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책을 내는 출판사들이 각각의 눈으로 함께 기획하고 잠재력을 극대화하여 다채로운 이벤트를 만들어 내는 것, 혹은 ‘책을 알리기 위한 작은 수법’을 계속해서 시도해 보는 것이 그중 하나가 아닐지. 그러고 보니 최근에 위고, 코난북스, 제철소 세 개의 출판사가 공동으로 기획한 ‘아무튼’ 시리즈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뉴스도 보인다. 이런 시도가 좀 더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로, 북스피어+마음산책+은행나무는 올해도 색다른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 깜짝 이벤트니 만큼 이 자리에서 공개하기는 좀 그렇고, 계획대로라면 10월쯤 선을 보일 수 있을 듯하다. 모쪼록 기대해 주시길.
책, 제목을 가리고 팔아 보았다
독자를 유혹하는 새로운 기획들
김홍민
2019-08-12
에스에프 작가 테드 창의 소설을 출간하면서 박찬욱 감독에게 글을 청탁한 적이 있다. 그동안 꾸준히 에스에프 소설을 즐겨 읽어 왔다는 걸 알기에 본인에게 영감을 준 작품들을 골라서 리뷰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박찬욱 감독이 쓴 글을 좋아하는 팬이었고 어떤 자리에서 딱 한 번 스치듯 만났을 뿐 이렇다 할 인연은 없었다. 며칠 후 그는 정중하게 거절의 답을 보내왔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단편영화 준비로 경황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좋은 에스에프 소설을 내줘서 고맙다고. 그래서 한잔 사고 싶다고. 몇 권의 책을 전부 다시 읽고 고민하며 글을 쓰기에는 시간이 모자라지만 하룻저녁 술을 마실 여유는 있다고. 원고청탁을 거절당하고 술을 얻어먹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장소는 아마도 그의 단골집인 듯한 연남동 ‘송가’였다.
세월이 꽤 흘렀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들은 내용은 대부분 잊어버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연출뿐만 아니라 시나리오에도 일가견이 있는 박찬욱 감독의 작업 방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친절한 금자씨>를 만들 때부터 정서경 작가와 함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른바 ‘공동각본’이다. “컴퓨터 하드는 공유하면서 모니터와 키보드를 각자 한 벌씩 가지고 정서경이 초고를 쓰면 박찬욱이 그걸 수정하고 박찬욱이 써놓은 글을 정서경이 고치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해 나간다”고 그는 설명해 주었다. 예컨대 정서경 작가가 “너나 잘해”라고 써놓은 걸 박찬욱 감독이 “너나 잘하세요”로 고치면서 명대사가 탄생한 거다. 공동각본이라는 것은 말이 쉽지 막상 실행하기란 좀처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서로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박찬욱 감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비슷한 방식의 출판 기획을 시도한 적이 있다. 이승엽 선수가 개인통산 400홈런을 달성한 2015년 무렵의 일이다. 그해 연말에 나는 마음산책 출판사의 편집자, 은행나무 출판사의 편집자와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책을 만드는 이들과 함께 해외에 나가면 꼭 들르는 곳 가운데 하나는 서점이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디든 책이 가득한 공간에 가면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빼놓지 않고 들른다. 시험을 코앞에 두고 공부는 하기 싫은데 놀기는 불안하니까 쓸데없는 소설이라도 찾아 읽는 기분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실지. 일(출판)이 지겨워서 외국에 왔는데 무턱대고 놀기는 좀 그러니까 서점에라도 간다는 일종의 심리적 알리바이일지도 모르겠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에서 일주일 가량 머문 뒤 우리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영국이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앞에는 과연 크고 작은 서점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 블랙웰 서점은 하마터면 무심코 지나칠 뻔했다. 입구가 작았기 때문이다. ‘이 근처의 많은 서점을 전부 돌아볼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지나칠까’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이라도 들여다보고 가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역시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밖에서 마주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건물 두 채가 통째로 서점이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에 옥스퍼드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서점은 두 채의 아래쪽을 터서 중층 구조로 꾸며놓은 지하 매장이 압권이다. 블랙웰 서점에서 재미있었던 건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전망이 좋은 자리에 새겨진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좋아요(Photo Point)'라는 문구였는데 서점에서 이런 자신감 충만한 안내를 본 적이 없는 나는 살짝 감탄했다. 다른 하나는 ‘서프라이즈 노벨(A Novel Surprise)’이라는 이름의 매대였다.
▲ 블랙웰 서점 외부(위), 내부(아래) 전경 ⓒ김홍민
'서프라이즈 노벨' 매대 위에는 미국, 프랑스, 영국, 일본 등 각 나라에서 출간된 소설 가운데 블랙웰 서점의 스태프들이 엄선한 작품이 제목과 저자의 이름이 가려진 채 진열되어 있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출간 국가와 가격뿐이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어떻게 하면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소설을 소개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 끝에 기획되었다고 한다. 영국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서점들이 ‘블라인드 데이트 위드 어 북(Blind Date with a Book)’이라는 이름으로 각자 자신들 서점의 콘셉트에 맞게 책을 진열하여 판매한다는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봉인된 포장지에는 (1) 소설의 첫 문장만 적어둔다든가 (2) ‘기괴함’, ‘유머러스함’ 같은 키워드만 인쇄해 놓는다든가 (3) 발행한 나라의 이름만 적어놓는 식으로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한 아이디어를 담았다.
▲ 영국 블랙웰 서점의 '서프라이즈 노벨' 매대 ⓒ김홍민
▲‘블라인드 데이트 위드 어 북(Blind Date with a Book)' 매대 ⓒ김홍민
이듬해 가을 무렵에는 일본에 다녀왔다. 마침 가격이 저렴한 비행기 티켓이 눈에 띄었고 그 시기 멤버들의 일정도 맞았다. 그때 교토의 어느 서점에 들렀다가 흥미로운 광경을 목도했다. 매대에 같은 책이 여러 권 쌓여 있었는데 책 표지에 제목 대신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 책을 어떻게 추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다’, ‘매력적이다’라고 느끼게 할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책 제목을 숨기고 팔기로 했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본에서 워낙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고X’는 책 전체를 전면 띠지로 가리고 랩핑하여 책에 대해 알 수 없게 만든 채로 판매하는 문고본이다. 내용을 추측할 수 있는 힌트라고는 (1) 500페이지가 넘는다는 것, (2) 가격이 810엔이라는 점, (3) 띠지에 쓰인 소개 문구뿐이었다. 기획자는 사와야 서점 페잔 점의 직원인 나가에 다카시 씨였다. 그는 무크지 <이 문고본이 대단하다 2016>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한 바 있다.
“2016년 7월 21일, 맨 처음에 60권을 매대에 진열했다.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을 ‘사와야 서점 올 여름 최대의 도전’이라고 이름 붙여 트위터에 올렸다. 그렇다, 이건 나에게 ‘도전’이었다. 솔직히 말해 팔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60권을 매대에 진열할 때 나는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30권이 팔릴 때까지는 매대에서 치우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자신이 없었다. 표지도 제목도 알 수 없는데다 문고본치고는 810엔이나 하는 살짝 비싼 책이다. 이 60권이, 설마 5일 만에 매진될 거라고는, 게다가 똑같은 형태로 전국에 퍼질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책은 현재 ‘문고X’라 불리고 있다.”
▲ 일본 사와야 서점의 '문고X' 매대 ⓒ김홍민
<아사히신문>과 <모리오카 경제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모리오카 역 건물 안에 자리 잡은 사와야 서점의 페잔 점에서 이 책의 판매는 한 달에 두세 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문고X’로 이름 붙이자 불과 일주일 만에 60부가 팔렸다. 이에 페잔 점의 점장인 다구치 씨는 잘 알고 지내는 다른 서점들에게도 상황을 알렸고 곧 전국 650개 이상의 서점들로 ‘문고X’ 기획이 퍼져 나갔다. 이 대목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이 책을 구입한 독자들의 반응이었다. “표지가 보이는 상태였다면 절대 사지 않았을 테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 책을 사서 읽게 되어 정말로 좋았다”는 소감이 많았다. 게다가 독자들은 ‘부디 SNS에 제목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는 문고X 기획자의 당부를 흘려듣지 않았다. 실제로 ‘문고X’가 선을 보이기 시작한 2016년 7월 21일부터 해당 서점에서 공식적으로 이 책의 제목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한 12월 9일까지 SNS에서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책의 제목을 공개하지 않았다. 책을 구입한 독자가 “나는 문고X뿐만 아니라 문고X 기획의 취지까지 함께 구매했다”는 내용의 포스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프라이즈 노벨’과 ‘문고X’를 목도한 우리는 ‘만약 이런 이벤트를 서점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진행한다면 어떤 형태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한국의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어떤 결과가 초래되든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당연하기 그지없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마음산책, 은행나무, 북스피어의 2017년 라인업 가운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책’을 선택하여 동시에 출간해 보자는 데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두 개 출판사도 아니고 세 개나 되는 출판사가 막상 콘셉트를 잡고 실무를 진행해 나가는 것은, 생색을 내자는 건 아니지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뭔가 결정할 때마다 머리를 맞대야 했고 의견이 달라서 목소리를 높인 적도 있었다. 한데 이 과정이 또, 뜻밖에 재밌는 거다. “이렇게 하는 게 더 흥미로울 것 같아”, “아니지, 저렇게 하는 게 더 낫지”라며 다들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리고 열을 올리는 동안 주옥같은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매일 화상통화까지는 아니지만 회의+회의를 거듭하며 두 달에 걸쳐 준비했다. 세 출판사가 동시에 책을 출간하면서, 6주 동안 제목을 가린 채로 팔고 그 이후에 공개할 테니 이미 구입한 독자들은 SNS에 제목과 저자 이름을 올리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국내 출판사 마음산책, 은행나무, 북스피어가 기획한 'X' 시리즈 ⓒ김홍민
그리하여 어떤 결과가 도래하였나. 거의 모든 일간지에서 이 기획을 보도했고 6주 동안 2만부가 팔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무엇보다 “평소에는 책을 사지 않았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서 구입했다”는 독자들이 많았다는 점이 가장 뿌듯했다. 그들은 왜 이 책을 샀을까. 궁금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책이라는 것은 사는 사람은 사지만 사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사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사지 않는 사람은 사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다며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다른 모든 업종과 마찬가지로 출판사도 계속해서 새로운 독자를 늘리지 않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자를 늘릴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책을 내는 출판사들이 각각의 눈으로 함께 기획하고 잠재력을 극대화하여 다채로운 이벤트를 만들어 내는 것, 혹은 ‘책을 알리기 위한 작은 수법’을 계속해서 시도해 보는 것이 그중 하나가 아닐지. 그러고 보니 최근에 위고, 코난북스, 제철소 세 개의 출판사가 공동으로 기획한 ‘아무튼’ 시리즈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뉴스도 보인다. 이런 시도가 좀 더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로, 북스피어+마음산책+은행나무는 올해도 색다른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 깜짝 이벤트니 만큼 이 자리에서 공개하기는 좀 그렇고, 계획대로라면 10월쯤 선을 보일 수 있을 듯하다. 모쪼록 기대해 주시길.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한겨레>, <시사인>, <경향> 등에 잡문을 기고하고 엑스플렉스에서 <1인 출판 스타트업> 강의를 하며 SBS <책하고 놀자>에서 장르문학을 소개하고 있다.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어크로스)를 썼다. 이미지_ⓒ김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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