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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감’의 역사가 아닌 ‘창조’의 역사

역사의 진짜 기능

임용한

2019-04-26


우리나라에서 역사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행복하면서도 곤혹스러운 일이다. 90년대였던 것 같다. 교양 한국사 시간에 대학생들에게 “중고생 시절 가장 싫어했던 과목이 무엇이냐” 물은 적이 있다. 강의 후 사학과 교수들을 만나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 것 같은지 물었다. 교수들 모두가 “수학이겠지”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100여 명의 학생 중 ‘수학’이라고 대답한 학생은 2, 3명에 그쳤고, 나머지는 모두 ‘역사’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교수들 모두가 충격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가


달라질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역사 강좌를 폐지하자거나, 역사를 배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적다. 대학에서 역사 강좌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대학 교육에 대한 주장이지 역사학이 필요 없다거나, 역사학이란 학문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역사 공부가 싫은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역사학을 존중하는 것이다. TV 방송에서도 사극의 비중이 높고, 역사 교양물은 중단되는 법이 없다.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볼 때마다 나는 어느 쪽에 기대어 살아야 하나 하고 고민하게 된다. 존중받는 역사학에 기대어 살아볼까? 그 싫다는 역사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겁고 감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야 할까?


마땅히 배워야 하고 존중받아야 할 학문이지만, 내가 배우기는 끔찍한 학문. 역사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이처럼 두 줄기로 뻗어 나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암기 과목의 대명사, 최근에는 많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한 학문과 대중의 괴리, 과거의 역사와 전통이 지나치게 폄하되거나 미화되는 상반된 분위기,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근현대사의 과정과 그에 대한 대립적이고 극단적인 평가 등. 그러나 이런 것들을 조합하면 그 근저는 한 가지 결론으로 집약된다. 역사의 정의와 활용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오용이다.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가


과거에는 역사의 가치이자 효용, 역사학의 존재 근거가 ‘귀감’이라고 생각했다. ‘귀감’이란,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변치 않는 교훈’이라는 의미다. 역사가 돌고 도는 것인지,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랜 논쟁이 있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 사회에는 변치 않는 교훈이 있고 아무리 사회가 발전해도 변치 않고 발생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귀감이 필요하다. 과거의 경험과 깨달음을 기억하여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은 인간 개개인의 삶, 기업, 국가에 모두 중요한 일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수많은 돌발 상황과 오류가 발생한다. 실전에서 실수와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자가 아니라, 실수를 적게 저지르는 자가 승리한다는 전쟁의 금언도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반복되는 실수를 줄일 수 있다면, 선대, 선배, 앞사람이 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인생은 황홀하게 달라질 것이다. 집단과 국가로 가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옛날 지성인들은 역사를 소중히 여겼고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읽고 배워야 하는 학문으로 간주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오늘날에 귀감으로서의 역사는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역사의 ‘진짜 기능’은 창조와 적용이다


현대사회는 무섭도록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귀감이란 오래도록 변치 않는 교훈인데, 이제는 어제 배운 교훈도 신뢰할 수 없을 만큼 발전이 빠른 사회가 되어버렸다. 과거에는 경영 기법이나 기업을 분석할 때 교훈과 원칙을 비교하며 그것을 지키지 않은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요즘은 이전의 성공에서 얻은 교훈을 귀감으로 삼은 것이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지난해인가 한 경영자는 실리콘밸리에서 실패한 기업을 분석한 결과, 이전의 성공을 답습한 것이 패망의 원인이 된 경우가 무려 70%에 달한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 정도면 역사학은 인생의 스승이 아니라 사회의 악이 될 판이다.


사실 고대에서도 귀감으로서의 역사는 역사학 기능의 일부에 불과했다. 사회가 거의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오랜 옛날에도 시대를 이끌어 갔던 사람은 귀감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짜 기능에 주목했다. 그것은 바로 창조와 적용이다.


인간의 삶은 뒷걸음질이 아니라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인생의 필연적 고초는 우리가 걸어온 길은 가로등이 환히 켜져 있지만, 앞으로 내딛는 발은 언제나 캄캄한 어둠이라는 것이다. 귀감으로서의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은 뒤를 돌아 보면서 가로등이 켜진 길이 내 앞의 어둠 속에도 그대로 펼쳐져 있기를 소망하는 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미래는 대개 이 간절한 소망을 배신한다.


역사의 ‘진짜 기능’은 창조와 적용이다

 

역사는 되새김을 위해서가 아니라 창조를 위해 존재한다. 이런 말을 하면 당장 이런 의문이 따라온다. 과거를 소재로 하는 역사가 어떻게 미래 창조의 소재가 될 수 있는가?


역사의 진정한 소재는 과거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다. 심리학이나 생물학 대상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 집단의 일원으로서 인간의 생각과 행동, 반응, 고민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인간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욕구와 욕망이 시대라는 환경적, 기술적 제한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고 어떤 현상, 장단점을 발휘하였는가를 보는 것이다. 환경은 계속 바뀌지만 인간 본성의 요구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거에 인간과 사회(환경)의 화학 반응을 연구하면 미래의 새로운 조합에서 발생할 현상을 예측하거나 새로운 대안을 찾아낼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고대 그리스에서는 재산이 있는 사람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 이유를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부자, 가진 자들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지한 이유도 있다. 그리스 민주정의 진정한 고민은 귀족과 대부호들의 금권 살포였다. 또한 당장의 표를 얻기 위해 국가의 장기적 전망보다 단기적 이익으로 시민들을 선동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돈과 근시안적 결정으로 국가가 몰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책임감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재산이란 반민주적 방식이 책임감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재산으로 책임감을 보정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현대 민주사회는 재산이라는 기준을 용인할 수 없다. 하지만 포퓰리즘, 근시안적 선택이 민주주의의 영원한 딜레마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는 재산이라는 방법을 동원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민주주의의 암에 대항하고 있는가? 그 방법을 유용하게 만든 조건은 무엇이며, 그 조건과 환경이 달라지는 미래에는 어떤 방법을 고안해야 하는가?


이것이 역사의 프로세스이고 진정한 역사의 가치이자 역사적 사고다. 우리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다. 과거의 폐쇄적 사회에서 글로벌 사회로, 농업 국가에서 산업, 무역 국가로 변했다. 우리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도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귀감의 역사가 아닌, 창조의 역사적 사고가 필요하다. 과거의 땅에서 자란 가치와 방법을 재활용해서도 안되고, 파묻거나 부조리로 비난하기만 해서도 안된다. 인간과 사회, 시대의 메커니즘 속에서 분석하고, 현재와 미래의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악과 적폐, 전통론, 진보와 보수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역사를 청산의 대상으로 보는 소아병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100년 전 진보적 방법이 지금도 진보적일 수 없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부터가 과거의 산물이다. 과거 정체되고 단조롭던 귀감의 역사 시절에 남용되던 방법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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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 인문경영연구원, 한국역사고전 연구소 대표. 충북대학교 연구교수. 국방 TV 토크멘터리 전쟁사 진행, 이코노미 조선 등 다수의 매체에서 강연 및 연재 중. 저서 《전쟁과 역사 1~3 (삼국편~고려후기 편)》, 《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조선국왕 이야기 1,2》, 《한국고대전쟁사 1~3》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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