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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조선 시대 과학 기술을 말하다

선조실록에 숨겨져 있던 천문학적 쾌거

이성규

2019-04-22


일본 도쿄대의 이토 준타로 연구팀이 1983년에 편찬한 《과학사기술사사전》을 보면 마치 암호문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C4 J0 K21 O19’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 여기서 C는 China, J는 Japan, K는 Korea, O는 Others를 뜻하며, 뒤의 숫자들은 15세기 초엽부터 중엽까지 세계적으로 눈여겨볼 과학적 성취 건수를 의미한다. 정리하자면 중국은 당시 세계 과학사에서 최고기술로 평가받은 실적이 4건, 일본은 0건, 조선은 21건, 그 외 유럽 및 중동 등의 기타 국가는 19건이라는 뜻이다.


이 시기는 바로 애민군주로 불리는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이 재위했던 때다. 문명대국을 자처하던 중국의 약 5배에 이르고, 한중일 3국을 제외한 전 세계도 19건에 불과하다니 당시 조선의 과학기술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은 제련법을 발견하다


그로부터 불과 50여 년 후인 1503년(연산군 9년)에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양인 김감불과 장례원(掌隷院)1의 노비 김검동이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니자, 연산군이 그들을 궁중으로 불러서 직접 시연 명령을 내린 것이다.


당시 납은 어디에서나 나는 흔한 금속이었던 반면, 은은 금과 함께 오래전부터 대우를 받아온 귀한 금속이었다. 심지어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순수한 상태의 은은 자연 상태의 금보다 그 양이 훨씬 적었다. 다른 금속과 뒤섞인 광석으로부터 순도 높은 은만 뽑아내야 하는데, 그 제련 과정이 다른 금속에 비해 상당히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이 그들의 주장에 관심을 보인 건 당연한 일이다. 연산군 앞으로 불려간 김감불과 김검동은 실제로 납으로 은을 만들어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개발한 ‘단천연은법’을 선보인 것이다. 함경도 단천에서 많이 채굴되는 납광석으로부터 순수한 은을 제련해내는 방식이었다.


이 새로운 은 제련법은 은과 납의 녹는점 및 끓는점의 차이와 녹아 있는 상태의 비중 분리를 이용한 건식제련법의 일종이었다. 단천연은법은 당시 유럽이나 중국보다 뛰어난 방식으로서, 전 세계에 내놓을 만한 훌륭한 은 제련 기술이었다. 덕분에 함경도 단천은 조선 제일의 은 산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 조선시대 노비를 관장하던 관청


제련, 실버바 FINESILVER 999 0 5000g,

 


국가에서 활용하지 못해 아쉬운 은 제련 기술


정작 희한한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연산군은 그들이 실제로 은을 만들어 보이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 만약 그들이 실패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게 틀림없다. 더구나 중종반정 이후 조정은 명나라의 지나친 조공 요구를 우려해 은광들을 폐쇄해버렸다. 제2의 장영실을 꿈꾸었던 김감불과 김검동은 어렵게 개발한 자신들의 놀라운 기술이 사장될 위기에 놓이자 해외로 눈을 돌렸던 것 같다.


그 같은 정황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연산군에 이어 즉위한 중종 때 어숙권이란 학자가 저술한 《패관잡기》에 의하면 “왜인들은 처음에 납으로 은을 만드는 방법을 몰라 연철만 가지고 왔는데, 중종 말년에 어떤 은장이가 몰래 왜인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어 이때부터 왜인이 은을 많이 가지고 왔으므로 한양의 은값이 폭락하고 말았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


또 한 일본 학자에 의하면, 일본은 17세기에 이르러 전 세계 은 생산량의 약 30%를 생산하게 되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었는데, 이는 16세기 중엽 조선이 지니고 있던 은 제련 기술을 몰래 수입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16세기 중엽이라면 바로 김감불과 김검동이 단천연은법을 개발한 이후이다. 이에 비해 정작 조선에서는 그 후로 단천연은법에 대한 언급이나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단천연은법의 도입으로 당시 세계 2위의 은 생산국가로 올라선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은을 주고 화승총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즉, 일본은 연산군과 중종이 소홀히 한 단천연은법 덕분에 조총을 수입해 임진왜란 초기의 일방적인 승리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이후 다시 과학기술의 부흥을 이끈 조선의 왕은 22대 정조다. 그는 계유정란으로 집권한 세조가 없애버린 집현전을 대신해 새로 규장각을 만들었으며, 정약용 등으로 하여금 많은 기계를 제작하거나 설계하게 했다. 수원화성 축조를 위한 거중기 고안이나 한강의 부교 설계 등이 그 대표적 성과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조선이 과학기술을 천시하여 일제에 의해 강점당하는 치욕을 겪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조선에서 일어난 과학적 사건들은 대부분 경시하고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쯤에서 주목해야 할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선조신록, 케플러보다 케플러 초신성을 더 정확하게 기록하다


1966년 중국에서 온 두 명의 과학자가 서울대 규장각에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검토하던 중 중요한 자료를 찾아냈다. 1604년(선조 37) 9월 21자의 기록이 그중 하나다. ‘밤 1경에 객성이 미수 10도의 위치에 있었는데, 북극성과는 110도의 위치였다. 형체는 세성2 보다 작고 황적색이었으며 동요하였다’고 쓰여 있는데, 이 기록은 바로 당시의 밤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케플러 초신성의 관측자료였다.


초신성이란 별이 일생의 마지막 순간에 폭발해 순간적으로 평소보다 최고 수억 배나 밝은 빛을 내는 현상을 말한다. 뱀주인자리의 발 부분에서 등장한 케플러 초신성은 인간이 목격한 우리은하의 초신성 중 가장 최근에 폭발한 천체로서,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가 정확한 관측기록을 남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 목성, 옛날 중국에서는 목성을 세성(歲星)이라 불렀다.


케플러 초신성

▲ 케플러 초신성 잔해


그런데 선조실록에 남아 있는 약 7개월간 130회의 관측기록은 케플러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구체적이다. 당시 유럽의 날씨가 흐려 중요 관측기록에 공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케플러의 기록에 의하면 이 초신성은 밝기 곡선이 불규칙적인 유형-2로 추정되지만, 좀 더 정확한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밝기 곡선이 규칙적인 유형-1 초신성인 것이 확실시된다.



우리가 선조들의 기록에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


그럼 이 사실이 왜 그리 중요할까. 과학자들은 초신성에도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사실을 선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알게 됐다. 또한 유형-1은 폭발 질량과 밝기가 일정해서 먼 거리에 위치한 성간 거리를 재는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


실제로 미국 및 호주 연구진은 유형-1 초신성을 이용하는 새로운 기법으로 우주 팽창속도가 약 40억년 전부터 갑자기 가속도가 붙으며 빨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해 201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처럼 세계 과학자들은 케플러 관측기록보다 선조실록을 더 자주 인용하며, 초신성의 특성을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세계적인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중국 과학자들이 우리의 초신성 관측기록을 찾아냈다는 사실조차 1990년대 후반까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선조들이 기술을 천시했다고 탓할 게 아니라 정작 우리가 중요한 역사적인 기록들을 천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한양에 살던 시절, 집 마당에 국화 화분 수십 개를 길렀다. 지나가던 행인이 그 광경을 보고는 열매가 맺히는 유실수라면 몰라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꽃을 키운다고 타박했다. 우연히 그 소리를 들은 다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무릇 실용이란 입에 넣어 목구멍을 넘기는 것만 가리키지 않는다.”


형체만 기르면 정신은 굶주린다는 의미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역사를 아는 것은 마치 다산 선생의 말처럼 국화를 키우는 일과 같다. 자신들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선조들의 정신과 기록을 천시하는 실용주의는 마치 허(虛) 위에 실(實)을 쌓는 행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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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성규
이성규

각종 매체에 과학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왕조실록에 숨어 있는 과학’ ‘밥상에 오른 과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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