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라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나를 나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인공지능과 유전공학의 발달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인간 복제 역시 미래의 인간이 염두에 두어야 할 화두 중 하나가 되었다.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를 보내지 마》는 유전공학이 극도로 발달한 세상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곳에서는 인간이 노화나 병을 이유로 장기이식이 필요해질 경우를 대비해 복제인간을 만들어낸다. 복제인간 중 하나인 캐시를 주인공으로 한 이 이야기는 기억과 추억을 가진 존재를 인간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 인간다움인가 묻는다. 옛 추억,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 그리움 같은 정서들. 그래서 기억 혹은 추억은 SF가 사랑하는 주제가 되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그 유명한 대사처럼.
“난 네가 상상도 못 할 것을 봤어. 오리온 전투에 참가했었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봤어. 그 기억이 모두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복제인간 로이 베티가 죽으며 남긴 이 말은, 그 자신이 인간인지 복제인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릭 데커드의 존재와 함께 긴 여운을 남긴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한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 그렇게 한 존재가 사라지면 그가 경험한 세계가 사라진다. SF는 사고실험을 통해 기억, 추억과 인간다움을 연결 짓는 경우가 잦은 편인데, 비단 SF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이미 일어난 일 역시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과 추억으로 재조합해 보여줄 수 있다.
각기 다른 시대, 같은 기억을 공유하다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 2002)>는 문학이 인간 지성의 공동의 기억으로 존재할 때 가능한 아름다운 경험을 보여준다. <디 아워스>는 각기 다른 시기의 세 여인의 하루 동안의 삶을 그린 영화로,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역을 맡은 니콜 키드먼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1923년 런던 교외의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을 구상하고 쓰는 중이다. 그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는 충동과 싸우면서, 그녀는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을 죽게 할지 살게 할지 고민 중이다.
1949년 로스앤젤레스에 로라 브라운이 산다. 남편과 아들과 함께 사는 로라는 삶과 죽음의 갈피에서 방황하고 있다.
현재의 뉴욕. 클러리서 본은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자신에게 별명을 붙여준 친구 리처드가 문학상을 수상하자 클러리서는 축하 파티를 계획한다.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 2002)>와 소설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디 아워스>라는 제목은 버지니아 울프가 쓰던 《댈러웨이 부인》의 원래 제목이었다. ‘시간’ 혹은 ‘세월’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제목은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가 살았던 192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이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상징한다. <디 아워스> 자체가 버지니아 울프가 만든 《댈러웨이 부인》을 재창조하며 변주한 작품이 되는 셈인데, 예술작품 자체가 인류가 공유하는 기억으로 작용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은 이라면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을 더 풍부하게 해석해낼 수 있다. 만난 적 없는 사람들끼리도 기억을 공유한다. 이 작품의 경우, 공통의 기억은 누군가의 아내로 살면서 경험한 여성으로 사는 삶 그 자체가 된다.
나쁜 기억이라는 딜레마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는 어린이 문학상인 뉴베리상을 수상한 청소년 소설로 미국에서만 350만 부가 판매되었다. 이 소설은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두가 똑같은 형태의 가족을 가지고 같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 열두 살 소년 조너스는 열두 살 생일날 '기억 보유자'라는 직위를 부여받게 된다. 기억 보유자는 마을에서 과거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단 한 명의 사람으로서 공동체의 원로 역할을 한다. 선임 기억 보유자는 이제 '기억 전달자'가 되어 조너스에게 과거의 기억을 전해 준다.
▲《기억 전달자》, 로이스 로리, 장은수 옮김, 비룡소
완벽한 사회란 존재할 수 있을까. 갈등 없는 사회가 가능하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기억 전달자》는 극단적인 통제와 질서 추구가 낳을 수 있는 끔찍한 상황을 보여준다. 조너스는 전달 받은 기억을 통해 완벽한 사회를 위해 무엇이 희생되었는지를, 진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차이와 평등, 장애, 죽음, 임신과 육아가 완벽하게 통제되는 세상에서 조너스는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사라진 현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도 이유가 있다. 인류의 기억을 통해 전쟁을 비롯해 인간의 탐욕이 야기한 파괴의 기억을 접하기 때문이다. 양극화와 불평등, 가난과 고통이 인류의 기억 속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 작품 역시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영화에서는 인류의 진실을 모르던 조너스의 눈에 흑백으로 보이던 세상이, 그 모든 기억을 알게 된 뒤 컬러로 변한다.
선한 목적이라 하더라도 극단적인 통제와 질서추구는 결국 비인간성을 낳게 된다. 조너스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모든 기억을 안 채로, 세계를 질서정연하게 유지하기 위해 다음 기억전달자에게만 이 사실을 알릴 것인가? 감정과 기억을 누릴 자유를 다시 모든 사람에게 안길 것인가?
인간은 좋은 것만 기억하지 않는다. 나쁜 기억은 인간을 성장하게도 한다. 거기서 오는 딜레마를 어떻게 처리할까에 대한 고민을 담은 소설이다.
맛의 기억
박찬일 셰프의 에세이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는 상상이 아닌 현실 속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옛 기억을 떠올릴 때, 그때 먹은 음식의 맛을 자연스레 함께 연상한다면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을 쉽게 느낄 수 있으리라.
“어렸던 시절,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시장에 갔다. 볼에 버짐을 달고 사는 형편까지는 아니었지만, 늘 단백질은 부족했다. 시장 닭전은 몇 집이 죽 늘어서서 경쟁을 하고 있었다. 누가 더 오래된, 고목의 밑둥치로 만든 도마를 쓰고 있는지, 누가 더 닭장에 닭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 경쟁했다. 최신식 닭 털 뽑는 기계가 털털거리며 깃털을 말끔하게 뽑는 시연을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아버지는 약간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보았는데, 아마도 당신 권위의 종식을 예견한 듯한 표정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아버지란 존재는, 닭의 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비틀고 이렇게 외치면서 권위를 세웠던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추억이 되고, 이후 세대에게는 부모 세대의 기억을 공유할 기회가 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박찬일, 푸른숲
닭을 잡는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경양식집’에서 “빵으로 하시겠습니까, 라이스로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 역시 신기하게 들릴 것이다. 경양식집에 가면서 웨이터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예습’을 한 일행. 빵이냐 라이스냐 물으면 빵을 선택해야 한다. 후식은 콜라 말고 커피나 립톤 홍차를 달라고 해야 한다. 우유는 절대 안 된다. 이런 매뉴얼을 숙지한 뒤 웨이터에게 주문 한다.
“다시 돌아온 웨이터는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돈가스, 선배는 정식.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웨이터는 우묵한 접시에 담긴 크림수프와 사우전 아일랜드 드레싱을 뿌린 양배추 샐러드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고기가 나오면 같이 먹기 위해 수프를 야금야금 핥듯이 조금만 먹고 샐러드도 아껴두었다. 십여 분 후 웨이터가 오더니 냉큼 그 수프와 샐러드를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눈앞에서 그 놀랍고 달콤한 수프와 녹진한 샐러드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 코스 요리의 에티켓을 우리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친구도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잇몸에 들러붙는 초여름 도다리, 반투명한 여름 오징어, 속초 바닷가 양미리 구이집에서 눈을 찌르던 연기, 남대천에서 은거하는 은어 소금구이, 양양 산골의 5년 묵은 김치 광1. 이 기억 중 어떤 것들은 이제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간다.
1세간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 두는 곳
어떤 기억은 책을 통해 살고, 어떤 추억은 책을 통해 미화되기도 한다. 책이라는 이름의 기억전달자의 생명력이 강한 이유는 거기 있으리라. 말할 사람은 죽어도, 기록은 언제까지나 남는다. 그 자체가 하나의 기억이 되어.
‘책’이라는 이름의 기억전달자
전달되고 공유되는 나를 이루는 기억
이다혜
2019-03-15
존재를 증명하는 기억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라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나를 나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인공지능과 유전공학의 발달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인간 복제 역시 미래의 인간이 염두에 두어야 할 화두 중 하나가 되었다.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를 보내지 마》는 유전공학이 극도로 발달한 세상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곳에서는 인간이 노화나 병을 이유로 장기이식이 필요해질 경우를 대비해 복제인간을 만들어낸다. 복제인간 중 하나인 캐시를 주인공으로 한 이 이야기는 기억과 추억을 가진 존재를 인간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 인간다움인가 묻는다. 옛 추억,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 그리움 같은 정서들. 그래서 기억 혹은 추억은 SF가 사랑하는 주제가 되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그 유명한 대사처럼.
“난 네가 상상도 못 할 것을 봤어. 오리온 전투에 참가했었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봤어. 그 기억이 모두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복제인간 로이 베티가 죽으며 남긴 이 말은, 그 자신이 인간인지 복제인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릭 데커드의 존재와 함께 긴 여운을 남긴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한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 그렇게 한 존재가 사라지면 그가 경험한 세계가 사라진다. SF는 사고실험을 통해 기억, 추억과 인간다움을 연결 짓는 경우가 잦은 편인데, 비단 SF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이미 일어난 일 역시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과 추억으로 재조합해 보여줄 수 있다.
각기 다른 시대, 같은 기억을 공유하다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 2002)>는 문학이 인간 지성의 공동의 기억으로 존재할 때 가능한 아름다운 경험을 보여준다. <디 아워스>는 각기 다른 시기의 세 여인의 하루 동안의 삶을 그린 영화로,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역을 맡은 니콜 키드먼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1923년 런던 교외의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을 구상하고 쓰는 중이다. 그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는 충동과 싸우면서, 그녀는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을 죽게 할지 살게 할지 고민 중이다.
1949년 로스앤젤레스에 로라 브라운이 산다. 남편과 아들과 함께 사는 로라는 삶과 죽음의 갈피에서 방황하고 있다.
현재의 뉴욕. 클러리서 본은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자신에게 별명을 붙여준 친구 리처드가 문학상을 수상하자 클러리서는 축하 파티를 계획한다.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 2002)>와 소설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디 아워스>라는 제목은 버지니아 울프가 쓰던 《댈러웨이 부인》의 원래 제목이었다. ‘시간’ 혹은 ‘세월’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제목은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가 살았던 192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이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를 상징한다. <디 아워스> 자체가 버지니아 울프가 만든 《댈러웨이 부인》을 재창조하며 변주한 작품이 되는 셈인데, 예술작품 자체가 인류가 공유하는 기억으로 작용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은 이라면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을 더 풍부하게 해석해낼 수 있다. 만난 적 없는 사람들끼리도 기억을 공유한다. 이 작품의 경우, 공통의 기억은 누군가의 아내로 살면서 경험한 여성으로 사는 삶 그 자체가 된다.
나쁜 기억이라는 딜레마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는 어린이 문학상인 뉴베리상을 수상한 청소년 소설로 미국에서만 350만 부가 판매되었다. 이 소설은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두가 똑같은 형태의 가족을 가지고 같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 열두 살 소년 조너스는 열두 살 생일날 '기억 보유자'라는 직위를 부여받게 된다. 기억 보유자는 마을에서 과거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단 한 명의 사람으로서 공동체의 원로 역할을 한다. 선임 기억 보유자는 이제 '기억 전달자'가 되어 조너스에게 과거의 기억을 전해 준다.
▲《기억 전달자》, 로이스 로리, 장은수 옮김, 비룡소
완벽한 사회란 존재할 수 있을까. 갈등 없는 사회가 가능하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기억 전달자》는 극단적인 통제와 질서 추구가 낳을 수 있는 끔찍한 상황을 보여준다. 조너스는 전달 받은 기억을 통해 완벽한 사회를 위해 무엇이 희생되었는지를, 진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차이와 평등, 장애, 죽음, 임신과 육아가 완벽하게 통제되는 세상에서 조너스는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사라진 현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도 이유가 있다. 인류의 기억을 통해 전쟁을 비롯해 인간의 탐욕이 야기한 파괴의 기억을 접하기 때문이다. 양극화와 불평등, 가난과 고통이 인류의 기억 속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 작품 역시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영화에서는 인류의 진실을 모르던 조너스의 눈에 흑백으로 보이던 세상이, 그 모든 기억을 알게 된 뒤 컬러로 변한다.
선한 목적이라 하더라도 극단적인 통제와 질서추구는 결국 비인간성을 낳게 된다. 조너스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모든 기억을 안 채로, 세계를 질서정연하게 유지하기 위해 다음 기억전달자에게만 이 사실을 알릴 것인가? 감정과 기억을 누릴 자유를 다시 모든 사람에게 안길 것인가?
인간은 좋은 것만 기억하지 않는다. 나쁜 기억은 인간을 성장하게도 한다. 거기서 오는 딜레마를 어떻게 처리할까에 대한 고민을 담은 소설이다.
맛의 기억
박찬일 셰프의 에세이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는 상상이 아닌 현실 속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옛 기억을 떠올릴 때, 그때 먹은 음식의 맛을 자연스레 함께 연상한다면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을 쉽게 느낄 수 있으리라.
“어렸던 시절,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시장에 갔다. 볼에 버짐을 달고 사는 형편까지는 아니었지만, 늘 단백질은 부족했다. 시장 닭전은 몇 집이 죽 늘어서서 경쟁을 하고 있었다. 누가 더 오래된, 고목의 밑둥치로 만든 도마를 쓰고 있는지, 누가 더 닭장에 닭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 경쟁했다. 최신식 닭 털 뽑는 기계가 털털거리며 깃털을 말끔하게 뽑는 시연을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아버지는 약간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보았는데, 아마도 당신 권위의 종식을 예견한 듯한 표정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아버지란 존재는, 닭의 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비틀고 이렇게 외치면서 권위를 세웠던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추억이 되고, 이후 세대에게는 부모 세대의 기억을 공유할 기회가 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박찬일, 푸른숲
닭을 잡는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경양식집’에서 “빵으로 하시겠습니까, 라이스로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 역시 신기하게 들릴 것이다. 경양식집에 가면서 웨이터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예습’을 한 일행. 빵이냐 라이스냐 물으면 빵을 선택해야 한다. 후식은 콜라 말고 커피나 립톤 홍차를 달라고 해야 한다. 우유는 절대 안 된다. 이런 매뉴얼을 숙지한 뒤 웨이터에게 주문 한다.
“다시 돌아온 웨이터는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돈가스, 선배는 정식.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웨이터는 우묵한 접시에 담긴 크림수프와 사우전 아일랜드 드레싱을 뿌린 양배추 샐러드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고기가 나오면 같이 먹기 위해 수프를 야금야금 핥듯이 조금만 먹고 샐러드도 아껴두었다. 십여 분 후 웨이터가 오더니 냉큼 그 수프와 샐러드를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눈앞에서 그 놀랍고 달콤한 수프와 녹진한 샐러드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 코스 요리의 에티켓을 우리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친구도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잇몸에 들러붙는 초여름 도다리, 반투명한 여름 오징어, 속초 바닷가 양미리 구이집에서 눈을 찌르던 연기, 남대천에서 은거하는 은어 소금구이, 양양 산골의 5년 묵은 김치 광1. 이 기억 중 어떤 것들은 이제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간다.
1 세간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 두는 곳
어떤 기억은 책을 통해 살고, 어떤 추억은 책을 통해 미화되기도 한다. 책이라는 이름의 기억전달자의 생명력이 강한 이유는 거기 있으리라. 말할 사람은 죽어도, 기록은 언제까지나 남는다. 그 자체가 하나의 기억이 되어.
작가. 지은 책으로는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등이 있다. 라디오 <책으로 행복한 12시>,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 등의 프로그램에서 책과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일을 한다. <씨네21> 편집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책’이라는 이름의 기억전달자'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댓글(1)
김**
2019-03-16잘 읽었습니다.
기억의 불확실성, 저주인가 축복인가
이성규
대중음악, 기억과 추억의 언어
임진모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