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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불확실성, 저주인가 축복인가

잊히고 바뀌는 기억에 대하여

이성규

2019-03-11


소설가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놀라운 기억력을 이야기할 때 곧잘 인용되는 작품 중 하나다. 자신의 유년 시절부터 20대까지를 마치 영사기를 되돌리듯 생생한 기억력으로 묘사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완서는 이 책의 집필을 위해 가족과 어릴 적 친구들을 취재하다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똑같이 겪은 일에 대해서조차 서로 기억이 너무 달랐던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결국 기억도 각자의 상상력이 따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줄 알던 사건이나 일이 똑같이 그 현장에 있었던 다른 사람에 의해 잘못된 사실로 밝혀진다면 선뜻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기억이란 자신의 존재 그 자체이자 한 개인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왜 어린 시절의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할까?


하지만 우리의 기억은 종종 불확실하다. 대표적인 것이 아주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네댓 살 이전의 일들은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 이처럼 아주 어릴 적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켜 심리학계에서는 ‘아동기 기억상실’이라 한다.


왜 어린 시절의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할까?


현재 심리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7살이 되기 전까지는 어린이가 기억 자체를 안정적으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국 에모리대학의 바우어 교수팀은 3세 때 어린이가 생일파티처럼 자신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을 때 나눈 대화를 녹음한 후 6년간에 걸쳐 그 어린이들이 특정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매년 조사하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5세 6개월 된 어린이는 3세 때 일을 80%, 7세 때는 60% 정도 기억했지만, 7세 6개월 때는 40% 이하로 감소했다. 즉, 아동기 기억상실은 너무 어려서 그 상황을 뇌에 저장하지 못한 게 아니라, 당시에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성장하면서 점차 그 기억을 상실해 간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물론 성인이 된 후에도 기억은 시간에 비례해 차츰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예 통째로 사라지는 아동기 기억상실은 성인기의 망각과는 분명히 다른 현상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아동기 기억상실의 이유는 뇌의 유연성 속에 숨어 있다. 인간의 뇌는 사춘기를 거치면서 폭풍 성장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뉴런과 뉴런 사이에 무수히 많은 연결이 새로 형성된다. 또한 기억을 저장하는 뇌의 부위도 성장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른이 된 후보다 어렸을 때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 같은 연결 및 저장 부위가 아무래도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그 결과 3세가 되기 전에 저장된 장기 기억은 나이가 들면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잘 잊히는 기억이 될 수밖에 없다.



기억은 계속 바뀐다


기억의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바로 ‘가짜 기억’이다. 이 분야에서 신기원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 것이 1995년에 행해진 ‘쇼핑몰에서 길을 잃다’라는 실험이다. 당시 워싱턴대학의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교수팀은 24명의 실험참가자에게 그들의 어릴 적 추억이 적힌 소책자를 각각 읽게 했다.


그 소책자에는 그들의 친척에게서 직접 들은 어린 시절의 실제 추억 세 가지와 다섯 살 때 쇼핑몰에서 미아가 돼 다시 찾느라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쇼핑몰의 미아 소동은 가짜로 지어낸 에피소드였다.


소책자를 다 읽힌 후 자신이 직접 기억하는 내용을 상세히 말해보라고 지시했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을 경우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면 되었다. 그런데 피실험자의 25%가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기억을 이야기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가짜 기억과 관련된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었다는 점이다.


‘가족을 다시 못 볼 것 같아서 너무 놀랐다’ ‘길을 잃고 걷다가 파란색 옷을 입은 할아버지를 만났다’ ‘울고 있는데 직원이 나를 발견하고 미아보호소로 데려다주었다’ 등등 소책자에 적혀 있지도 않은 가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해낸 것이다.


로프터스 교수가 이 실험을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짜 기억 때문에 의붓아버지를 살인죄로 법정에 세운 ‘에일린 플랭클린’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가정주부였던 에일린은 우연히 어린 시절을 회상하다 의붓아버지가 자신의 친구를 끔찍하게 살인하는 기억을 떠올렸다.


20년 전의 일이라 물적 증거가 하나도 없었지만, 의붓아버지는 즉각 기소되어 살인죄를 선고받았다. 에일린의 기억이 당시의 사건기록들과 너무나 일치했기 때문이다.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미국의 사회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던 이 사건은 로프터스 교수에 의해 결국 진실이 가려졌다.


로프터스 교수는 에일린의 기억이 당시 매스컴의 기사를 보고 환상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기억임을 밝혀냈고, 덕분에 의붓아버지는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에일린은 명백하게 언론의 오보임이 밝혀진 사실까지 자신의 기억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 후 에일린 사건과 유사한 사건들이 줄을 잇자 로프터스 교수는 가짜 기억의 생성 과정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쇼핑몰 미아 실험을 고안했다.


그럼 가짜 기억은 어떻게 해서 우리 뇌에 진짜 기억처럼 똬리를 틀게 되는 걸까. 과학자들이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을 이용해 연구한 결과, 그 흔적으로 보이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짜 기억은 진짜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서로 뒤섞여 생성된다는 것. 기억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내측 측두엽은 진짜 기억이 형성될 때만 활성화되는 반면, 정보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을 가진 좌뇌 하전두이랑은 진짜 기억과 가짜 기억이 형성될 때 모두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가짜기억(하전두이랑), 진짜기억(측두엽)



가짜 기억에 대해 여러 가지 실험을 진행한 로프터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기억이란 녹화 장치라기보다 당신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도 계속 바꿀 수 있는 위키피디아에 더 가깝다.” 위키피디아는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사용자 참여의 온라인 백과사전을 가리킨다.


위키피디아처럼 수시로 바뀔 수 있는 기억의 불확실성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환자들이다. 오래된 장기기억을 불러낸 후 마치 에일린 플랭클린이 살인사건에 대한 매스컴을 기사를 읽고 혼란되었듯이 가짜 기억을 거기에다 슬쩍 섞여버리면 자신을 괴롭히던 비극적인 기억을 혼란스럽게 해 PTSD를 치유할 수도 있다. PTSD는 물론 마약이나 알코올, 니코틴 같은 약물 중독자들을 이런 방식을 이용해 치료하는 연구가 현재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기억은 계속 바뀐다


한편, 1965년 뉴욕에서 태어난 질 프라이스는 몇 년 몇 월 며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바로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천재적인 기억력을 지녔다. 과학자들의 정밀한 검사 결과 그녀는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녀만의 독특한 기억력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조어인 셈이다.


과학 논문 등에서 ‘AJ’로 일컬어지는 그녀는 인간 기억력의 독특한 사례로 언급된다. 그런데 놀라운 기억력은 그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력을 저주라고 언급하곤 한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쾌한 기억마저도 언제나 생생하게 떠올라 수시로 그녀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기억의 불확실성은 어쩌면 뇌의 신경회로가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축복 같은 선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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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성규
이성규

각종 매체에 과학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왕조실록에 숨어 있는 과학’ ‘밥상에 오른 과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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