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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서 개인으로

68운동이 제시한 새로운 인간상

박문국

2019-01-14


‘요즘 젊은것들’에서 드러나는 공동체주의


세상에는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회자되는 유명한 문구들이 존재한다. 개중에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문구는 여러 형태로 변주되며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회자될 이 마법 같은 문장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14세기 초 대학생들의 한심함을 지적하는 알바루스 펠라기우스(Alvarus Pelagiu)1가 등장하고, 좀 더 과거인 고대 로마 시절 당대 세태에 대해 좌절하는 키케로2의 탄식이 나타난다. 이보다 더 과거에는 요즘 어린 것들은 폭군과도 같다며 폴리스(Polis)3 의 미래를 걱정하는 소크라테스가 있다.


역사적 지성들의 지적을 모두 폄하할 수는 없겠으나 이러한 발언은 구조적 변화를 등한시한 채 과거의 기준만을 고집하는 구세대의 불통에서 온다. 그리고 구세대의 불통은 자신들이 해당 공동체를 지탱해왔다는 신념을 통해 힘을 얻게 된다. 즉, ‘요즘 젊은것들’이라는 레퍼토리는 인류 역사에 뿌리내린 공동체주의 토양 위에서 생명력을 유지한다고 봐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68운동은 세계를 근본적으로 공동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변화시킨 사건으로써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14세기 스페인 프렌체스코회의 사제, 1311년 <대학생들에 대한 개탄>이라는 글을 통해 당시 젊은 대학생들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2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 ~ B.C. 43.12.7. 고대 로마의 정치가 겸 저술가로 당시 무너져가는 공화제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3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몇 세기에 걸쳐 단단하게 구축된 공동체주의가 가져온 비극


흔히 서양은 개인선, 동양은 공공선을 우선했을 거란 통념이 있으나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당장 서양 철학사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 플라톤부터가 전체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공공선을 강조한 바 있고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정의한 데에서 알 수 있듯 시민들이 정치적 의무를 지니는 폴리스의 공동체 전통을 중시했다. 고대 로마의 시민들 역시 공화국에 대한 복종이 개인의 권리에 선행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로마인들이 바람직하게 여긴 인간상은 개인의 영광을 추구하던 아킬레우스(Achilleus)4 가 아닌 트로이의 수호자 헥토르였다.


천부인권의 가치가 퍼지고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던 시절에도 개인주의는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이 추구한 건 어디까지나 부르봉 왕조(House of Bourbon)5 와 구별되는 새로운 공화주의 국가였지 개인이 주인 되는 방종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혁명정부에 저항하는 방데(Vendée)6 의 농민들은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되었고, 그 결과 약 20만 명의 농민이 혁명군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


4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으로, 그의 활약은 호메로스(Homeros)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d)』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인간 펠레우스 왕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태티스는 아킬레우스를 불사신으로 만들기 위해 저승의 스틱스 강에 그의 몸을 담갔으나 그녀가 아이를 담그기 위해 잡았던 발뒤꿈치는 강물에 닿지 못했다. 강물이 닿지 않은 발뒤꿈치는 그의 유일한 약점이 되었으며, 약점을 뜻하는 '아킬레스의 건' 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5 프랑스의 왕조(1589∼1792, 1814∼30). 루이 9세의 마지막 아들 클레르몽의 백작 로베르 드 프랑스(Robert de France)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프랑스 혁명(1789~1794)으로 몰락하였으나 나폴레옹 이후 다시 복귀하였다. 

6 프랑스 중서부에 위치한 페이드라루아르 지방의 주


프랑스혁명

▲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개인주의는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장 뒤플레시 베르토(Jean Duplessis-Bertaux·1747~1819), <튈르리 궁전의 습격>,1793, 캔버스에 유화, 124×192cm, 베르사유 궁전


혁명 이후 유럽 각지에서 시도된 국민국가 건설은 혁명 이전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강요한다. 이 새로운 국민국가들은 공동체 구성원들을 국민(혹은 민족)으로 재정의했고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통해 국민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국민교육이다. 하나 된 언어를 위해 국어를 가르치고 공통된 기억을 위해 국사를 강조했으며 일관된 정체성을 위해 국민윤리를 신설한다. 그리고 교육 중 다른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창의적인 의견은 권위의 이름 아래 배제된다.


이러한 국민교육의 효과는 굉장하여 수백 년간 독일 계통에 속했던 알자스 지방은 프랑스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고 불과 백여 년 만에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지니게 될 정도였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에서 독일식 이름을 가진 주인공 프란츠가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을 들으며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한다.


이처럼 당대의 국민교육은 기본적으로 자국민과 타국민을 구분하는 용도로써 사용되었고 또 그 목적을 이루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국민교육은 자국가에 대한 맹목적 우월감과 타 국가에 대한 배타성을 지닌다는 부작용도 내포하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의 우수성을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풍조를 낳기도 했다. 그 결과가 공동체주의의 극단인 전체주의였으며, 잘 알려져 있듯 전체주의의 팽창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된다.



개개인의 가치에 주목하게 된 68운동


68운동의 배경에는 전체주의를 일으킨 구세대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었다. 노동자, 혹은 부르주아와 같은 경제 계층이 중심이 된 이전의 사회운동과는 달리 68운동을 이끈 건 대학생이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1945년 전후로 태어난 세대로, 대학 내의 전통적인 권위주의와 열악한 교육환경에 저항하는 ‘행동하는 젊음’을 강조했다. 대학 외적으로는 냉전의 그림자 아래 나치 부역자들이 여전히 사회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과 베트남 전쟁, 알제리 전쟁과 같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회의감이 존재했다.


1968년 1월 베트콩의 구정 대공세로 인해 미국 대사관이 점령당하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방영된 것은 그간 미군이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와 그간 정의의 편이라고 선전하던 미국의 도덕적 정당성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이에 대한 충격이 적지 않아 같은 해 전 세계적인 반전운동, 미국의 인권운동, 프라하의 봄, 프랑스 파리의 5월 혁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이처럼 68운동은 세계적 차원의 운동이었다.


68운동 Il est interdit d'interdire

▲ 68운동의 슬로건 “금지함을 금지하라( Il est interdit d'interdire)” ⓒ위키피디아


특히 프랑스의 5월 혁명은 공동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넘어가는 변화의 분수령이 되었다. ‘금지함을 금지하라’,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란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당시 혁명은 집단이 아닌 개인이 더욱 부각되어 이전까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장애인이나 여성, 동성애자와 같은 소수자도 혁명의 주류로서 행동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정치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관습을 부정하는 반문화운동으로도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은 정의롭지 못한 구세대라는 명제 아래 상당한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물론 68운동의 당사자들이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68운동의 탈권위적 움직임은 당시 점차 세력을 불려나가던 신좌파의 사상과 연결되었는데, 신좌파가 주장하는 ‘방어적 폭력’, 즉 관용을 막는 자에게 폭력을 행사함은 정당하다는 이론에 힘입어 극단적인 폭력성을 보였다. 때문에 초창기 68운동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지식인들도 그 과격성으로 인해 68운동을 비판하는 지경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68운동을 통한 정치적 변혁은 실패했다. 대중은 평화를 부르짖으면서도 폭력성을 지니는 이중적 모습에 경계심을 나타냈고 그 결과 전 유럽에서 보수파가 집권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68운동이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건 문화적인 변혁이 광범위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서양의 분위기로 인식하는 탈권위적인 모습과 소수자에 대한 인권 존중,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는 사실상 68운동 이후의 유산이다. 공동체를 위한 개인이 아닌, 개인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다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상이 제시되었기에 가능한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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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문국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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