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성평등에 대한 다양한 공격과 반격들 가운데,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남성들의 분노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여혐과 남혐(남성혐오)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고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남성에 대한 모욕이 오늘날 논의되는 여성혐오의 차원과 같아지기 위해서는 사회가 남성의 성별을 이유로 차별과 불이익을 가하고, 남성에 대한 혐오발화들이 그들을 위축시키고 사회적 실존을 위협하는 효과를 가져야 한다. 이는 단순히 욕을 먹어서 기분이 나쁜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마땅히 구분되어야 하는 문제다.
군대
하지만 남자들은 대체 어떤 불이익을 겪고 있기에, 이렇게나 억울해 하는 걸까? 가장 큰 주제는 3가지로 요약된다. ‘군대’, ‘꽃뱀’, 그리고 ‘ATM’이다. 먼저 군대에 대한 남성들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군대는 힘들고 위험하고 안갈 수 있으면 안 가는 것이 좋은 곳이지만, ▲한국은 분단국가이므로 군복무와 징병제도 유지는 불가피하며, ▲이것에 대한 보상은 군가산점이어야 하고, ▲군대에 가지 않는 여성은 군대를 다녀온 남성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인정과 돌봄을 제공해야 하며, ▲남자만 군대에 가는 것은 차별이므로 여자도 군대 가라.
한국의 징병제도는 선진국에서 시행되는 것들 중에서는 악명이 높다. 우선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가 인정되지 않고, 세계 7위에 달할 정도로 많은 수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복무기간도 길고, 보상체계가 미비하다. 지금과 같은 징병제도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박정희로, 10월 유신으로 종신 대통령이 된 이후 병무청을 신설하고 군 복무와 관련된 강력한 규정들을 만들어 냈다. 박정희 정권이 애를 썼던 것 중 하나는 병역의무를 ‘성역화’하는 것으로, 이는 냉전질서에 기대어 남성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실로 한국의 남성들은 태어날 때부터 국가의 병역자원으로 귀속되어 민방위가 끝나는 40살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국가의 부름’을 받는다. 이는 남성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시민이 아니라 ‘신민’에 더 가까운 존재로 인지하게끔 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헌법 39조 2항에 나와 있는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라는 말이 헌법 29조 2항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자가 전투·훈련등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받은 손해에 대하여는 법률이 정하는 보상외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는 조항과 충돌하며, 대체로 적용되는 것은 후자라는 것이다. 이 조항은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선포할 때 끼워 넣은 조항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군인과 가족들이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졸속으로 마련된 조항이다. 이는 오늘날까지 군에서 발생하는 안전/사망사고에 대하여 정당한 손해배상 청구와 보상을 막는 조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한국의 징병제도에는 많은 문제점이 존재하고 있다. 60만 대군을 유지할 필요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 고위 남성 장교들과 결부되어 있고, 군복무를 트라우마틱한 경험으로 만드는 지휘관, 간부, 동료병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남자들이고, 군의 특수성을 들먹이며 이 모든 것을 비호하는 것 또한 남자들이다. 게다가 국방부가 보상이라고 주장하는 군 가산점과 최근 등장한 대학생의 학점이수는 공무원시험을 보지 않거나, 대학에 다니지 않는 장병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정작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성은 이 문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아무런 권한도 행사하고 있지 못하다. 왜 여성들이 자신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는 일들에 대한 보상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성범죄와 유혹
두 번째는 꽃뱀이다. 남자들은 ▲돈을 노리고 성적인 유혹을 한 후 함정에 빠트리는 꽃뱀이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많은 수의 선량한 남성이 꽃뱀의 피해를 입고 성범죄자가 되고 있으며, ▲그러므로 성범죄에 대한 무고죄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6년을 기준으로 성범죄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된 여성은 26,116명, 남성은 1,478명이다. 성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집계된 남성은 28,627명 여성은 617명이다. 그리고 성범죄에 대한 오랜 정설과 같이 대부분은 지인이나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이들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범죄 무고가 보편적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공식적인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성범죄의 불기소율(48.3%. 2016년 기준. 대감찰청)을 곧바로 무고율로 치환하여 과장하고 있으나, 이 불기소율 중 무고와 연관이 있는 것은 혐의 없음(24.7%)이고, 이마저도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판결이 다수다. 애초에 성범죄는 단 둘이 있는 은밀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증거나 증인의 수집이 어려운 범죄다. 이런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고 무고율이 높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무마하기 위해 무고죄 고소를 통해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성범죄자들의 논리에 동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도 최근 미투운동을 두고 ‘무서워서 여자를 못 만나겠다’고 말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가 성범죄과 동의에 의한 성적 교제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저 높은 불기소율에서도 드러나듯이 한국의 법원은 이미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으로 성범죄의 성립여부를 심판하고 있다. 대체 남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일까? 성폭력을 저지를 자유? 혹은 ‘정당한 성폭력’이 있다는 주장일까? 설마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며 생존에 대해 말하는 여성들이 ‘나의 성적 접근 가능성을 차단할까’ 두려운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자신이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길 빈다. 그리고 인권이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에 충분한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더치페이
마지막 주장은 ATM이다. 이는 ▲남자들은 돈 버는 기계이자 그렇게 취급되며, ▲여자들은 남자(아버지, 애인,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편하게 살고 있고, ▲그럼에도 여자들은 그에 합당한 취급을 해주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데이트비용 등 남녀관계에서 발생하는 소비는 더치페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먼저 이는 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규범으로 여겨져 왔던 “남성생계부양자”의 존재를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한 논문 <최선영, 장경섭 (2012). 압축산업화 시대 노동계급가족 가부장제의 물질적 모순. 한국사회학, 46(2), 203-230>에 따르면, 한국의 산업화시기에도 남성이 평생 동안 온전하게 생계를 부양했던 경우는 드물다. 남성들은 대체로 경력의 정점이 되는 45세를 전후하여 직업이동을 경험하는데, 대부분의 수가 주변부노동시장으로 이동하거나, 자영업자가 되는 식이다. 그리고 이런 하향이동에 따른 수입은 그 전까지 집에서 가사노동을 담당하던 여성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경제활동을 하는 것으로 벌충되었다. 논문의 저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산업자본주의의 물질적 지원 하에서 유지된 것이 아니라, 매우 허약한 물질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작동해 왔다”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는 남성생계부양자의 남아있던 신화를 박살내버렸다. 과거를 돌이켜볼 것도 없이 맞벌이를 하지 않는 여성이 “이기적이다”라는 소리를 듣게 된 오늘날에는 당연히 의문스러운 가정이다.
게다가 20대의 취업률을 보면 여성의 취업률이 남자보다 높다. (여 59.4 남 55.6, 2017년 기준), 10대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서 여성이 남성을 앞서게 된지도 오래고, 대학진학률, 각종 고시 합격률에서도 여성이 더 높은 성취를 보이고 있다. 애초에 여성의 경제활동을 도울 목적으로 만들어진 여성 채용 목표제가, 2003년 양성 평등 채용 목표제(성별 당 최소 30%)로 바뀐 이후에, 2010년 이후 이 제도에 의해서 구제받은 성별은 74%이상이 남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문에 붙여져야 하는 것은 OECD 1위를 수성중인 성별임금격차다.
이렇듯 상황은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집에 있는 여성들 역시 조금도 편하지 않다. 통계청이 무급가사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여 발표한 <가계생산 위성계정>에 따르면, 무급가사노동의 가치는 2014년을 기준으로 명목 GDP의 24.3%(약 360조 7천억 원)다. 심지어 맞벌이를 하는 가구에서도 가사노동은 대부분 여성의 몫이다. 여성가족부의 <가족실태조사>를 통해 2015년을 기준 맞벌이 가구의 가사노동 참여율을 보면 청소와 쓰레기 버리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항목에서 여성은 90%대의 참여율을 보인 반면 남성들은 가장 높은 참여율을 보인 항목이 60.4%(집안청소)에 그쳤다. 주당 소요시간 역시 쓰레기 버리기를 제외하면 여성이 남성의 2배에서 4배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더치페이는? 더치페이의 전제는 교재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치페이를 소리높여 외치는 이들의 면모를 보면 전형적인 여성 혐오자들이다. 뭣보다 연애와 성매매의 ‘가성비’를 따져 묻고 있는 이들에게 시급한 것이 더치페이일까 아니면 앞서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우는 것일까?
지금까지 살펴본바 남자들이 억울해 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들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억울함은 그 감정의 본성상 ‘주관적인 것이다’ 일찍이 국정농단 사범 최순실은 조사를 받으러 가는 길에 언론을 향해 “억울하다!”고 외쳤다. 나는 그 억울함이 가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에게 들려줄 답은 그날 어느 여성 청소노동자가 반복해서 외쳤다던 말 뿐이다. 자신의 억울함이 이와 같지는 않은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최태섭
저서로 《한국, 남자》, 《잉여사회》,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등을 썼다. 성공회대 사회학과 박사를 수료하고 계급, 젠더, 노동, 문화 등의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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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을 가로막는 억울한 남자들에 대한 논증
무엇이 남자들을 억울하게 하는가?
최태섭
2018-12-21
오늘날 성평등에 대한 다양한 공격과 반격들 가운데,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남성들의 분노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여혐과 남혐(남성혐오)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고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남성에 대한 모욕이 오늘날 논의되는 여성혐오의 차원과 같아지기 위해서는 사회가 남성의 성별을 이유로 차별과 불이익을 가하고, 남성에 대한 혐오발화들이 그들을 위축시키고 사회적 실존을 위협하는 효과를 가져야 한다. 이는 단순히 욕을 먹어서 기분이 나쁜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마땅히 구분되어야 하는 문제다.
군대
하지만 남자들은 대체 어떤 불이익을 겪고 있기에, 이렇게나 억울해 하는 걸까? 가장 큰 주제는 3가지로 요약된다. ‘군대’, ‘꽃뱀’, 그리고 ‘ATM’이다. 먼저 군대에 대한 남성들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군대는 힘들고 위험하고 안갈 수 있으면 안 가는 것이 좋은 곳이지만, ▲한국은 분단국가이므로 군복무와 징병제도 유지는 불가피하며, ▲이것에 대한 보상은 군가산점이어야 하고, ▲군대에 가지 않는 여성은 군대를 다녀온 남성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인정과 돌봄을 제공해야 하며, ▲남자만 군대에 가는 것은 차별이므로 여자도 군대 가라.
한국의 징병제도는 선진국에서 시행되는 것들 중에서는 악명이 높다. 우선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가 인정되지 않고, 세계 7위에 달할 정도로 많은 수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복무기간도 길고, 보상체계가 미비하다. 지금과 같은 징병제도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박정희로, 10월 유신으로 종신 대통령이 된 이후 병무청을 신설하고 군 복무와 관련된 강력한 규정들을 만들어 냈다. 박정희 정권이 애를 썼던 것 중 하나는 병역의무를 ‘성역화’하는 것으로, 이는 냉전질서에 기대어 남성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실로 한국의 남성들은 태어날 때부터 국가의 병역자원으로 귀속되어 민방위가 끝나는 40살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국가의 부름’을 받는다. 이는 남성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시민이 아니라 ‘신민’에 더 가까운 존재로 인지하게끔 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헌법 39조 2항에 나와 있는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라는 말이 헌법 29조 2항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자가 전투·훈련등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받은 손해에 대하여는 법률이 정하는 보상외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는 조항과 충돌하며, 대체로 적용되는 것은 후자라는 것이다. 이 조항은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선포할 때 끼워 넣은 조항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군인과 가족들이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졸속으로 마련된 조항이다. 이는 오늘날까지 군에서 발생하는 안전/사망사고에 대하여 정당한 손해배상 청구와 보상을 막는 조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한국의 징병제도에는 많은 문제점이 존재하고 있다. 60만 대군을 유지할 필요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 고위 남성 장교들과 결부되어 있고, 군복무를 트라우마틱한 경험으로 만드는 지휘관, 간부, 동료병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남자들이고, 군의 특수성을 들먹이며 이 모든 것을 비호하는 것 또한 남자들이다. 게다가 국방부가 보상이라고 주장하는 군 가산점과 최근 등장한 대학생의 학점이수는 공무원시험을 보지 않거나, 대학에 다니지 않는 장병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정작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성은 이 문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아무런 권한도 행사하고 있지 못하다. 왜 여성들이 자신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는 일들에 대한 보상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성범죄와 유혹
두 번째는 꽃뱀이다. 남자들은 ▲돈을 노리고 성적인 유혹을 한 후 함정에 빠트리는 꽃뱀이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많은 수의 선량한 남성이 꽃뱀의 피해를 입고 성범죄자가 되고 있으며, ▲그러므로 성범죄에 대한 무고죄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6년을 기준으로 성범죄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된 여성은 26,116명, 남성은 1,478명이다. 성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집계된 남성은 28,627명 여성은 617명이다. 그리고 성범죄에 대한 오랜 정설과 같이 대부분은 지인이나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이들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범죄 무고가 보편적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공식적인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성범죄의 불기소율(48.3%. 2016년 기준. 대감찰청)을 곧바로 무고율로 치환하여 과장하고 있으나, 이 불기소율 중 무고와 연관이 있는 것은 혐의 없음(24.7%)이고, 이마저도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판결이 다수다. 애초에 성범죄는 단 둘이 있는 은밀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증거나 증인의 수집이 어려운 범죄다. 이런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고 무고율이 높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무마하기 위해 무고죄 고소를 통해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성범죄자들의 논리에 동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도 최근 미투운동을 두고 ‘무서워서 여자를 못 만나겠다’고 말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가 성범죄과 동의에 의한 성적 교제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저 높은 불기소율에서도 드러나듯이 한국의 법원은 이미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으로 성범죄의 성립여부를 심판하고 있다. 대체 남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일까? 성폭력을 저지를 자유? 혹은 ‘정당한 성폭력’이 있다는 주장일까? 설마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며 생존에 대해 말하는 여성들이 ‘나의 성적 접근 가능성을 차단할까’ 두려운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자신이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길 빈다. 그리고 인권이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에 충분한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더치페이
마지막 주장은 ATM이다. 이는 ▲남자들은 돈 버는 기계이자 그렇게 취급되며, ▲여자들은 남자(아버지, 애인,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편하게 살고 있고, ▲그럼에도 여자들은 그에 합당한 취급을 해주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데이트비용 등 남녀관계에서 발생하는 소비는 더치페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먼저 이는 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규범으로 여겨져 왔던 “남성생계부양자”의 존재를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한 논문 <최선영, 장경섭 (2012). 압축산업화 시대 노동계급가족 가부장제의 물질적 모순. 한국사회학, 46(2), 203-230>에 따르면, 한국의 산업화시기에도 남성이 평생 동안 온전하게 생계를 부양했던 경우는 드물다. 남성들은 대체로 경력의 정점이 되는 45세를 전후하여 직업이동을 경험하는데, 대부분의 수가 주변부노동시장으로 이동하거나, 자영업자가 되는 식이다. 그리고 이런 하향이동에 따른 수입은 그 전까지 집에서 가사노동을 담당하던 여성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경제활동을 하는 것으로 벌충되었다. 논문의 저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산업자본주의의 물질적 지원 하에서 유지된 것이 아니라, 매우 허약한 물질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작동해 왔다”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는 남성생계부양자의 남아있던 신화를 박살내버렸다. 과거를 돌이켜볼 것도 없이 맞벌이를 하지 않는 여성이 “이기적이다”라는 소리를 듣게 된 오늘날에는 당연히 의문스러운 가정이다.
게다가 20대의 취업률을 보면 여성의 취업률이 남자보다 높다. (여 59.4 남 55.6, 2017년 기준), 10대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서 여성이 남성을 앞서게 된지도 오래고, 대학진학률, 각종 고시 합격률에서도 여성이 더 높은 성취를 보이고 있다. 애초에 여성의 경제활동을 도울 목적으로 만들어진 여성 채용 목표제가, 2003년 양성 평등 채용 목표제(성별 당 최소 30%)로 바뀐 이후에, 2010년 이후 이 제도에 의해서 구제받은 성별은 74%이상이 남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문에 붙여져야 하는 것은 OECD 1위를 수성중인 성별임금격차다.
이렇듯 상황은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집에 있는 여성들 역시 조금도 편하지 않다. 통계청이 무급가사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여 발표한 <가계생산 위성계정>에 따르면, 무급가사노동의 가치는 2014년을 기준으로 명목 GDP의 24.3%(약 360조 7천억 원)다. 심지어 맞벌이를 하는 가구에서도 가사노동은 대부분 여성의 몫이다. 여성가족부의 <가족실태조사>를 통해 2015년을 기준 맞벌이 가구의 가사노동 참여율을 보면 청소와 쓰레기 버리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항목에서 여성은 90%대의 참여율을 보인 반면 남성들은 가장 높은 참여율을 보인 항목이 60.4%(집안청소)에 그쳤다. 주당 소요시간 역시 쓰레기 버리기를 제외하면 여성이 남성의 2배에서 4배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더치페이는? 더치페이의 전제는 교재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치페이를 소리높여 외치는 이들의 면모를 보면 전형적인 여성 혐오자들이다. 뭣보다 연애와 성매매의 ‘가성비’를 따져 묻고 있는 이들에게 시급한 것이 더치페이일까 아니면 앞서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우는 것일까?
지금까지 살펴본바 남자들이 억울해 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들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억울함은 그 감정의 본성상 ‘주관적인 것이다’ 일찍이 국정농단 사범 최순실은 조사를 받으러 가는 길에 언론을 향해 “억울하다!”고 외쳤다. 나는 그 억울함이 가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에게 들려줄 답은 그날 어느 여성 청소노동자가 반복해서 외쳤다던 말 뿐이다. 자신의 억울함이 이와 같지는 않은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저서로 《한국, 남자》, 《잉여사회》,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등을 썼다. 성공회대 사회학과 박사를 수료하고 계급, 젠더, 노동, 문화 등의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에 칼럼을 연재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성평등을 가로막는 억울한 남자들에 대한 논증'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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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진정한 유토피아는 존재하는가
박문국
인간의 유토피아는 지방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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