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공자가 제자들의 물음에 “삶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죽음은 사유할 수는 있지만 누구에게도 경험될 수 없다. 결코 경험될 수 없는 것에 매달려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대한 사유에서 떠날 수 없다. 죽음은 ‘나’라는 주체의 완벽한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은 종교와 정치와 문화를 낳았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두려움을 뛰어넘거나, 회피하거나, 혹은 그 두려움에 굴복하였다.
“만물은 한계가 없다. 어찌 보지 않았다고 하여 없다고 단언하는가? 또한 선인에 대한 기록은 과거의 문헌에 얼마든지 있다. 어찌 불사(不死)의 도가 없다고 하는가?”
《포박자》의 저자 중국의 갈홍(283-343?)은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아 신비의 환약으로 신선이 되고 불로장생하고자 하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승에서의 ‘변신’으로 해결하고자 한 도교의 해법은 현재에도 존재한다. 태반 주사, 비타민 주사, 신데렐라 주사 등은 신비의 환약과 비슷하다. 그러나 죽음에 대항하는 보다 보편적인 방법은 죽음이나 어떠한 혼란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0)는 죽음이 감각의 사라짐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게 되면 불사에 대한 헛된 욕망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죽음은 어떤 체험된 경험 대상일 수 없기 때문에 죽음과 결부된 걱정은 문자 그대로 대상이 없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감각과 이성에 대한 강조점에서 에피쿠로스학파와 조금은 결이 다르지만 스토아학파도 동일하게 절제를 통해 죽음에 대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기원전 4?~기원후 65)는 철학이 우리에게 약속할 수 있는 영원성이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현재를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라지고 없는 것은 미래의 시간일 뿐, 시간은 오직 지금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철학자란 항상 시간을 내는 자’라고 하였다. 미래에만 자신을 던져 바삐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삶도 죽음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 명의 스토아주의 철학자인 고대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라. 초조해하지 말라. 무감각해지지 말라. 태연한 척하지도 말라. 이것이야말로 인격의 완성이다.”
우리가 잘 아는 장자(기원전 365?~기원전 270?)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스승을 들판에 던져놓느냐 아니면 매장하느냐 논쟁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머를 날렸다.
“묻지 않는다면 까마귀와 독수리 밥이 될 테지만 묻어봤자 개미 밥밖에 더 되겠느냐. 너희들은 까마귀와 독수리 부리에서 먹이를 꺼내 개미 입에 채워주려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개미들 편만 드느냐?”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는 죽음을 견뎌낼 수 있는가. 이것은 너무 엘리트적인 방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스토아적 태도를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삶을 견디는 것조차 힘겨워한다.
삶에서 치워진 죽음, 삶을 위한 죽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균의 발견과 항생제의 발견, 위생학과 여러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을 비약적으로 연장시켰다. 현재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남자는 79세, 여자는 85세로 200여 년 전의 조선 시대에 비하면 30년, 40년 이상을 더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기만 한 것일까?
직업상 나는 매일 늙어가는 사람과 늙은 사람, 죽어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보고 있다. 늙어가는 사람은 지금 자신의 몸이 지난달, 지난해, 10년 전과 다름을 한탄하고 그때처럼 몸이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이미 늙은 사람은 나에게 지겹다고, 빨리 죽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죽어가는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가쁜 숨을 쉬고 있고, 그의 육체는 2~3일 후면 재가 되거나 땅에 묻힐 것이다. 죽은 사람은 차가운 냉장고에 들어가기 위해 내 눈앞에서 옮겨지고 있다. 나는 매일 이 장면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정작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영화 〈아일랜드〉처럼 낡은 내 몸의 장기(臟器)를 대체할 새로운 육체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의 몸은 각각의 장기들의 결합이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 전체다. 함께 늙어가는 시스템 회로를 바꾸지 않는 한 불완전한 수명 연장일 따름이다. 그러한 수명 연장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슬퍼하고 눈물 흘린다. 그 감정은 나도 언젠가 저처럼 죽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가까운 이라면 그와 보낸 삶의 추억 때문일 것이고, 모르는 이라면 죽어간 이들과 그를 지켜보는 가족의 아픔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애도는 비유하자면 삶에서 죽음이라는 낭떠러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낭떠러지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행위이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철학자 스피노자가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죽음은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죽음이 존재함으로써 우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 의미를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현대는 이 죽음을 지워가고 있다. 죽음을 지움으로써 삶을 더 빛나게 할 수 있다는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던 공동묘지들은 저 멀리로 치워지고, 죽어가는 자들은 병원이나 요양원에 숨겨졌다.
독일의 사회학자 엘리아스는 이런 ‘때 이른 죽음’의 길 위에서의 상태를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라고 표현했다. 문명화는 죽음을 위생적으로 제거하면서 그 두려움과 고통과 죄의식을 문명화라는 이름 밑으로 포장해버린다. 죽어가는 자들은 치워지고 격리되어 살아 움직이는 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확률이 필요 없는 명백함이다. 명백하다면 우리는 이것을 우리 삶을 지탱하고 반성하는 거울 기둥으로 만들어야 한다. 죽음을 드러내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스스로의 삶을 기만하는 것이 아닐까?
아르스 모르엔디(Ars moriendi, 죽음의 기술)!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을 살아가는 기술일 것이다.
본업은 시인이라고 스스로 말하지만 시를 자주 쓰지는 않는다. 시는 시 이전이므로... 어쩌다가 영남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여 시골의 요양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또 어쩌다가 계명대학교와 경북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스피노자주의자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정작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 모른다. 팔리지 않은 시집만 세 권 냈다. 『유리에 가서 불탄다』 『푸른 염소를 부르다』 『벽암록을 불태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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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기술(Ars moriendi)
삶을 비추는 거울
노태맹
2018-11-19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슬퍼하고 눈물 흘린다.
그 감정은 나도 언젠가 저처럼 죽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가까운 이라면 그와 보낸 삶의 추억 때문일 것이고,
모르는 이라면 죽어간 이들과 그를 지켜보는 가족의 아픔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애도는 비유하자면 삶에서 죽음이라는 낭떠러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낭떠러지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행위이다.
죽음에 대처하는 철학자들의 사유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공자가 제자들의 물음에 “삶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죽음은 사유할 수는 있지만 누구에게도 경험될 수 없다. 결코 경험될 수 없는 것에 매달려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대한 사유에서 떠날 수 없다. 죽음은 ‘나’라는 주체의 완벽한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은 종교와 정치와 문화를 낳았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두려움을 뛰어넘거나, 회피하거나, 혹은 그 두려움에 굴복하였다.
“만물은 한계가 없다. 어찌 보지 않았다고 하여 없다고 단언하는가? 또한 선인에 대한 기록은 과거의 문헌에 얼마든지 있다. 어찌 불사(不死)의 도가 없다고 하는가?”
《포박자》의 저자 중국의 갈홍(283-343?)은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아 신비의 환약으로 신선이 되고 불로장생하고자 하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승에서의 ‘변신’으로 해결하고자 한 도교의 해법은 현재에도 존재한다. 태반 주사, 비타민 주사, 신데렐라 주사 등은 신비의 환약과 비슷하다. 그러나 죽음에 대항하는 보다 보편적인 방법은 죽음이나 어떠한 혼란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0)는 죽음이 감각의 사라짐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게 되면 불사에 대한 헛된 욕망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죽음은 어떤 체험된 경험 대상일 수 없기 때문에 죽음과 결부된 걱정은 문자 그대로 대상이 없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감각과 이성에 대한 강조점에서 에피쿠로스학파와 조금은 결이 다르지만 스토아학파도 동일하게 절제를 통해 죽음에 대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기원전 4?~기원후 65)는 철학이 우리에게 약속할 수 있는 영원성이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현재를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라지고 없는 것은 미래의 시간일 뿐, 시간은 오직 지금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철학자란 항상 시간을 내는 자’라고 하였다. 미래에만 자신을 던져 바삐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삶도 죽음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 명의 스토아주의 철학자인 고대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라. 초조해하지 말라. 무감각해지지 말라. 태연한 척하지도 말라. 이것이야말로 인격의 완성이다.”
우리가 잘 아는 장자(기원전 365?~기원전 270?)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스승을 들판에 던져놓느냐 아니면 매장하느냐 논쟁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머를 날렸다.
“묻지 않는다면 까마귀와 독수리 밥이 될 테지만 묻어봤자 개미 밥밖에 더 되겠느냐. 너희들은 까마귀와 독수리 부리에서 먹이를 꺼내 개미 입에 채워주려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개미들 편만 드느냐?”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는 죽음을 견뎌낼 수 있는가. 이것은 너무 엘리트적인 방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스토아적 태도를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삶을 견디는 것조차 힘겨워한다.
삶에서 치워진 죽음, 삶을 위한 죽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균의 발견과 항생제의 발견, 위생학과 여러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을 비약적으로 연장시켰다. 현재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남자는 79세, 여자는 85세로 200여 년 전의 조선 시대에 비하면 30년, 40년 이상을 더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기만 한 것일까?
직업상 나는 매일 늙어가는 사람과 늙은 사람, 죽어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보고 있다. 늙어가는 사람은 지금 자신의 몸이 지난달, 지난해, 10년 전과 다름을 한탄하고 그때처럼 몸이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이미 늙은 사람은 나에게 지겹다고, 빨리 죽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죽어가는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가쁜 숨을 쉬고 있고, 그의 육체는 2~3일 후면 재가 되거나 땅에 묻힐 것이다. 죽은 사람은 차가운 냉장고에 들어가기 위해 내 눈앞에서 옮겨지고 있다. 나는 매일 이 장면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정작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영화 〈아일랜드〉처럼 낡은 내 몸의 장기(臟器)를 대체할 새로운 육체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의 몸은 각각의 장기들의 결합이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 전체다. 함께 늙어가는 시스템 회로를 바꾸지 않는 한 불완전한 수명 연장일 따름이다. 그러한 수명 연장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슬퍼하고 눈물 흘린다. 그 감정은 나도 언젠가 저처럼 죽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가까운 이라면 그와 보낸 삶의 추억 때문일 것이고, 모르는 이라면 죽어간 이들과 그를 지켜보는 가족의 아픔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애도는 비유하자면 삶에서 죽음이라는 낭떠러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낭떠러지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행위이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철학자 스피노자가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죽음은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죽음이 존재함으로써 우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 의미를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현대는 이 죽음을 지워가고 있다. 죽음을 지움으로써 삶을 더 빛나게 할 수 있다는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던 공동묘지들은 저 멀리로 치워지고, 죽어가는 자들은 병원이나 요양원에 숨겨졌다.
독일의 사회학자 엘리아스는 이런 ‘때 이른 죽음’의 길 위에서의 상태를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라고 표현했다. 문명화는 죽음을 위생적으로 제거하면서 그 두려움과 고통과 죄의식을 문명화라는 이름 밑으로 포장해버린다. 죽어가는 자들은 치워지고 격리되어 살아 움직이는 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확률이 필요 없는 명백함이다. 명백하다면 우리는 이것을 우리 삶을 지탱하고 반성하는 거울 기둥으로 만들어야 한다. 죽음을 드러내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스스로의 삶을 기만하는 것이 아닐까?
아르스 모르엔디(Ars moriendi, 죽음의 기술)!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을 살아가는 기술일 것이다.
본업은 시인이라고 스스로 말하지만 시를 자주 쓰지는 않는다. 시는 시 이전이므로... 어쩌다가 영남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여 시골의 요양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또 어쩌다가 계명대학교와 경북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스피노자주의자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정작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 모른다. 팔리지 않은 시집만 세 권 냈다. 『유리에 가서 불탄다』 『푸른 염소를 부르다』 『벽암록을 불태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죽음의 기술(Ars moriendi)'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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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적극적으로 여유 부릴 궁리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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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인생의 쉼표라면, 죽음은 인생의 마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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