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인 동안에 그는 살아 있으며, 죽음이 다가온 순간에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으로서 결코 죽는 법이 없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죽지 않는다.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저 논리는 삶과 죽음 사이를 무한 분절하여 나온 결과이다. 화살은 결코 과녁을 맞힐 수 없다. 끊임없이 과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화살이 과녁에 꽂힌다는 것을 안다. 위의 말은 삶과 죽음에 대한 독특한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부정한다. 삶은 죽음에 속하지 않고 죽음 또한 삶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전혀 다른 세계의 일이며, 거기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서는 결코 죽을 수 없으며 죽으면 결코 살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삶과 죽음을 연속적으로 보려는 모든 초월적이거나 종교적인 태도를 비웃는다. 종교는 삶과 죽음의 불연속성을 부정하고 뛰어넘음으로써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저 말은 그 둘을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성립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려는 듯하다. 그에게서 삶은 죽음의 타자이며 죽음 또한 철저히 삶의 타자일 뿐이다. 이러한 세계는 정태적이며 거기에는 어떠한 운동도 없다. 하지만 여기에 운동이 개입되는 순간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장벽은 무너지며 그 둘은 관통된다. 삶과 죽음은 상호침투하면서 운동의 잔인한 법칙 속으로 밀려들어 가게 된다.
사물의 삶과 죽음
사르트르는 인간의 삶은 사물과 달리 계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것이 실존주의이다. 그것은 “신이 없다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한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이미 예비 되어 있었다. 과연 신이 없으면 자유로울까, 아니면 허무할까. 그것은 각자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다만 절대자의 부재를 허무주의로 받아들이지 않고 적극적인 삶의 선택 기회로 받아들인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 해방의 복음일 수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는 허무주의(Nihilism)의 긍정적 버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달리, 사물의 삶은 분명 계획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신이 없는지 모르지만 사물에게는 인간이라는 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사물에게 어떠한 운명을 부여하였는가. 사물은 당연히 인간의 필요에 의해 창조된 것인 만큼 인간이 필요로 하는 물리적, 기능적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인간이 사물에 물리적, 기능적 조건을 부여하는 만큼 사물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물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물리적, 기능적 조건의 한계이다. 전통사회에서는 그 최대치를 추구했다. 사물도 인간처럼 오래 사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리하여 깨진 바가지도 꿰매어 쓰면서 사물의 물리적, 기능적 조건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물의 미덕은 오래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소비사회에서 사물은 물리적 생명이 다하기도 전에 시장의 논리에 의해 퇴출된다. 이것이 바로 대중소비사회의 메커니즘이다. 이는 물론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마케팅이 되었다. 마케팅에는 제품 수명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리하여 제품의 삶은 미리 계산되며 적절한 시기에 새로운 제품이 등장하면 기존 제품은 시장에서 사라진다. 따라서 오늘날 사물의 내구성은 더 이상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수명은 갈수록 늘어나지만 사물의 수명은 갈수록 줄어든다.
디자인에 의한 죽음
오늘날 사물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이 마케팅이라고 할 때, 그것의 미적 표현은 디자인이다. 디자인에서는 이런 것을 인위폐기 또는 계획적인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라고 부른다. 새로운 디자인의 제품을 내놓음으로써 기존의 제품을 유행에 뒤떨어진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낡은 것이 새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새 것이 낡은 것을 만들어낸다고나 할까. 현대디자인에서 이러한 방법은 아주 보편적이다.
이러한 방법을 체계적으로 도입한 것은 1930년대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었다. 제너럴모터스(GM)는 ‘미술색채부’라는 이름의 디자인 부서를 설치하고 스타일링(Styling)을 주된 디자인 기법으로 도입하였다. 스타일링이란 자동차의 엔진이나 섀시 등 내부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외형만 바꾸는 것을 말한다. 미국 자동차 산업의 원조인 포드 社는 T형 이래 모델 변경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후발주자인 GM은 모델 변경을 통해 포드사의 아성에 도전했다. 그리하여 정기적인 모델 변경(model change)과 매년 일부만 조금씩 바꾸는 부분 변경(minor change) 정책을 실행하였다.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기존 모델은 구식이 된다. 새 것이 낡은 것을 창조한다. 이것은 일종의 소비자 공학(consumer engineering)이었다.
▲ 포드 모델 T. 1908년부터 1927년까지 모델 변경이 없었던, 소품종 대량생산의 신화를 이룩한 제품.
▲ 스타일링을 주된 디자인 기법으로 도입한 미국의 자동차. 캐딜락의 엘로라도(1959년).
1950년대 미국의 저널리스트였던 밴스 패커드(Vance Packard)는 <쓰레기 제조자들(The Waste Makers)>이라는 책에서 광고와 디자인이 오늘날 그 대표자들이라고 비판했다. 현대사회에서 디자인이야말로 그러한 인위폐기의 주범으로서 사물에게는 죽음의 사자(使者)인 셈이다. 독일의 철학자 볼프강 하우크(Wolfgang F. Haug)는 이를 ‘미적 혁신(Ästhetische Innovation)’이라고 부르며 자본주의 디자인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지적했다. 1970년대 미국의 디자인 교육자인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 역시 상업화된 소비주의 디자인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필요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Need)’을 주장했다.
▲ 미국의 저널리스트 밴스 패커드의 <쓰레기 제조자들>(1960년). 현대사회의 광고와 디자인을 쓰레기 제조자들이라고 비판했다.
▲ 소비주의 디자인을 비판하고 ‘필요를 위한 디자인’을 주장한 빅터 파파넥.
이처럼 오늘날 사물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디자인이다. 디자인만이 진정으로 사물을 죽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물의 죽음이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의 생태 위기이다. 이러한 디자인에 의한 사물의 대량학살과 그로 인한 생태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지속가능한 디자인(Sustainable Design)'이라는 명제가 제출된다. 지속가능한 디자인이란 말 그대로 디자인에서의 지속가능성의 확보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선 3R이라는 것이 있다. 자원절약(reduction), 재사용(reuse), 재활용(recycle)이 그것이다. 디자인 과정에서 이러한 것들을 고려할 것이 요구된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디자인 미학에서의 ‘지속가능성’이다. 다시 말하면 감수성 자체가 지속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지속가능한 미(Sustainable Beauty)’이다. 최근에 화두가 되고 있는 롱라이프 디자인(long-life design) 같은 것이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롱라이프 디자인을 주장하는 일본의 디자이너 나가오카 겐메이와 그가 설립한 ‘D & Department Project'
▲ 업사이클링을 목포로 설립된 서울시의 새활용플라자.
아무튼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인간은 결코 인간으로서 죽지 않듯이, 오늘날 제품도 결코 제품으로서 죽지는 않는다. 그것은 제품이 아닌 다른 논리에 의해서 죽는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고 딸이 시집을 갈 때면, 그 오동나무를 베어서 장롱을 만들어 혼수로 삼았다. 그러면 시집 간 딸은 그 장롱에 손때를 묻혀가며 대를 물려 사용했다. 이제 이러한 것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기억을 다시 호출해야 할 때가 되었다. 오래된 기억이 오래된 미래다. 인간의 수명은 갈수록 늘어 가는데 사물의 수명은 갈수록 짧아지는 시대에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죽이는 디자인, 살리는 디자인
대중소비사회에서 디자인의 역할
최범
2018-11-15
인간은 죽지 않는다
“인간은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인 동안에 그는 살아 있으며, 죽음이 다가온 순간에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으로서 결코 죽는 법이 없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죽지 않는다.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저 논리는 삶과 죽음 사이를 무한 분절하여 나온 결과이다. 화살은 결코 과녁을 맞힐 수 없다. 끊임없이 과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화살이 과녁에 꽂힌다는 것을 안다. 위의 말은 삶과 죽음에 대한 독특한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부정한다. 삶은 죽음에 속하지 않고 죽음 또한 삶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전혀 다른 세계의 일이며, 거기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서는 결코 죽을 수 없으며 죽으면 결코 살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삶과 죽음을 연속적으로 보려는 모든 초월적이거나 종교적인 태도를 비웃는다. 종교는 삶과 죽음의 불연속성을 부정하고 뛰어넘음으로써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저 말은 그 둘을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성립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려는 듯하다. 그에게서 삶은 죽음의 타자이며 죽음 또한 철저히 삶의 타자일 뿐이다. 이러한 세계는 정태적이며 거기에는 어떠한 운동도 없다. 하지만 여기에 운동이 개입되는 순간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장벽은 무너지며 그 둘은 관통된다. 삶과 죽음은 상호침투하면서 운동의 잔인한 법칙 속으로 밀려들어 가게 된다.
사물의 삶과 죽음
사르트르는 인간의 삶은 사물과 달리 계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것이 실존주의이다. 그것은 “신이 없다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한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이미 예비 되어 있었다. 과연 신이 없으면 자유로울까, 아니면 허무할까. 그것은 각자 알아서 판단할 일이다. 다만 절대자의 부재를 허무주의로 받아들이지 않고 적극적인 삶의 선택 기회로 받아들인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 해방의 복음일 수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는 허무주의(Nihilism)의 긍정적 버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달리, 사물의 삶은 분명 계획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신이 없는지 모르지만 사물에게는 인간이라는 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사물에게 어떠한 운명을 부여하였는가. 사물은 당연히 인간의 필요에 의해 창조된 것인 만큼 인간이 필요로 하는 물리적, 기능적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인간이 사물에 물리적, 기능적 조건을 부여하는 만큼 사물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물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물리적, 기능적 조건의 한계이다. 전통사회에서는 그 최대치를 추구했다. 사물도 인간처럼 오래 사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리하여 깨진 바가지도 꿰매어 쓰면서 사물의 물리적, 기능적 조건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물의 미덕은 오래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소비사회에서 사물은 물리적 생명이 다하기도 전에 시장의 논리에 의해 퇴출된다. 이것이 바로 대중소비사회의 메커니즘이다. 이는 물론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마케팅이 되었다. 마케팅에는 제품 수명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리하여 제품의 삶은 미리 계산되며 적절한 시기에 새로운 제품이 등장하면 기존 제품은 시장에서 사라진다. 따라서 오늘날 사물의 내구성은 더 이상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수명은 갈수록 늘어나지만 사물의 수명은 갈수록 줄어든다.
디자인에 의한 죽음
오늘날 사물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이 마케팅이라고 할 때, 그것의 미적 표현은 디자인이다. 디자인에서는 이런 것을 인위폐기 또는 계획적인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라고 부른다. 새로운 디자인의 제품을 내놓음으로써 기존의 제품을 유행에 뒤떨어진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낡은 것이 새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새 것이 낡은 것을 만들어낸다고나 할까. 현대디자인에서 이러한 방법은 아주 보편적이다.
이러한 방법을 체계적으로 도입한 것은 1930년대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었다. 제너럴모터스(GM)는 ‘미술색채부’라는 이름의 디자인 부서를 설치하고 스타일링(Styling)을 주된 디자인 기법으로 도입하였다. 스타일링이란 자동차의 엔진이나 섀시 등 내부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외형만 바꾸는 것을 말한다. 미국 자동차 산업의 원조인 포드 社는 T형 이래 모델 변경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후발주자인 GM은 모델 변경을 통해 포드사의 아성에 도전했다. 그리하여 정기적인 모델 변경(model change)과 매년 일부만 조금씩 바꾸는 부분 변경(minor change) 정책을 실행하였다.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기존 모델은 구식이 된다. 새 것이 낡은 것을 창조한다. 이것은 일종의 소비자 공학(consumer engineering)이었다.
▲ 포드 모델 T. 1908년부터 1927년까지 모델 변경이 없었던, 소품종 대량생산의 신화를 이룩한 제품.
▲ 스타일링을 주된 디자인 기법으로 도입한 미국의 자동차. 캐딜락의 엘로라도(1959년).
1950년대 미국의 저널리스트였던 밴스 패커드(Vance Packard)는 <쓰레기 제조자들(The Waste Makers)>이라는 책에서 광고와 디자인이 오늘날 그 대표자들이라고 비판했다. 현대사회에서 디자인이야말로 그러한 인위폐기의 주범으로서 사물에게는 죽음의 사자(使者)인 셈이다. 독일의 철학자 볼프강 하우크(Wolfgang F. Haug)는 이를 ‘미적 혁신(Ästhetische Innovation)’이라고 부르며 자본주의 디자인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지적했다. 1970년대 미국의 디자인 교육자인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 역시 상업화된 소비주의 디자인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필요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Need)’을 주장했다.
▲ 미국의 저널리스트 밴스 패커드의 <쓰레기 제조자들>(1960년). 현대사회의 광고와 디자인을 쓰레기 제조자들이라고 비판했다.
▲ 소비주의 디자인을 비판하고 ‘필요를 위한 디자인’을 주장한 빅터 파파넥.
이처럼 오늘날 사물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디자인이다. 디자인만이 진정으로 사물을 죽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물의 죽음이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의 생태 위기이다. 이러한 디자인에 의한 사물의 대량학살과 그로 인한 생태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지속가능한 디자인(Sustainable Design)'이라는 명제가 제출된다. 지속가능한 디자인이란 말 그대로 디자인에서의 지속가능성의 확보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선 3R이라는 것이 있다. 자원절약(reduction), 재사용(reuse), 재활용(recycle)이 그것이다. 디자인 과정에서 이러한 것들을 고려할 것이 요구된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디자인 미학에서의 ‘지속가능성’이다. 다시 말하면 감수성 자체가 지속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지속가능한 미(Sustainable Beauty)’이다. 최근에 화두가 되고 있는 롱라이프 디자인(long-life design) 같은 것이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롱라이프 디자인을 주장하는 일본의 디자이너 나가오카 겐메이와 그가 설립한 ‘D & Department Project'
▲ 업사이클링을 목포로 설립된 서울시의 새활용플라자.
아무튼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인간은 결코 인간으로서 죽지 않듯이, 오늘날 제품도 결코 제품으로서 죽지는 않는다. 그것은 제품이 아닌 다른 논리에 의해서 죽는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고 딸이 시집을 갈 때면, 그 오동나무를 베어서 장롱을 만들어 혼수로 삼았다. 그러면 시집 간 딸은 그 장롱에 손때를 묻혀가며 대를 물려 사용했다. 이제 이러한 것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기억을 다시 호출해야 할 때가 되었다. 오래된 기억이 오래된 미래다. 인간의 수명은 갈수록 늘어 가는데 사물의 수명은 갈수록 짧아지는 시대에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디자인 평론가.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등 여러 권의 평론집을 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죽이는 디자인, 살리는 디자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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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라짐, 죽음을 마주하다
이다혜
더 적극적으로 여유 부릴 궁리를 해보자
박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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