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수천만 장의 ‘자기소개서’에서, 스스로를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자라고 표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패션 잡지를 넘기면 적절한 외로움의 눈빛을 지닌 모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철저히 혼자라는 느낌을 줄 때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주목받기 때문일 거다. 명품가방이나 명품시계도 광고 스타일이 유사하다. ‘고급’ 소리를 듣는 상품 광고에는 우아한 고독이 묻어 있다.
사람들은 가끔 잡지 속 고독의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고자 애를 쓴다. 특히나 고독이 어울리는 계절에는 많은 이들이 ‘정해진’ 틀에 맞추어 사진을 찍기 바쁘다. 고뇌가 느껴지는 (흐리멍덩한) 눈동자와 미소 없는 창백한 입술 그리고 정적인 자세가 어우러진 순간이 포착되면 이를 ‘인생 사진’이라고 부른다. ‘고독’이 인생의 한 면이기 때문일 거다. 사람으로 살면서, 그것도 ‘헬조선’이라 불리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어찌 쓸쓸하고 외롭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그러니 슬퍼 보이는 모습에서 위안을 찾는 역설이 발생한다.
고독하지 않은 사회
고독은 SNS 공간에서나 대접받을 뿐이다. 일상에서 외롭다는 표시를 숨기지 않는 개인은 생애의 다음 단계로 안정적인 진입이 힘들다. 예를 들어 수천만 장의 ‘자기소개서’에서, 스스로를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자라고 표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분명 그런 사람이 있겠지만, 아니 많겠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다가는 진학도, 취업도 어려우니 솔직한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외향적인 사람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등으로 자신을 포장하면서 ‘소설’을 쓰기 바쁘다.
자본주의 경쟁 원리가 곧 사회의 이치인 양 이해되는 곳에서 고독하다는 이미지는 결핍일 뿐이다. ‘나는 조용한 곳에서 책 읽기를 좋아합니다’와 같은 솔직한 자기 묘사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등장할 수 있어도 이후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이 자기소개서 항목으로 묻는 말들은 이렇다. “나는 살면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든 적이 있는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적이 있는가? 있다면 그 내용을 상세하게 서술하시오.”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독이라는 이미지는 결핍으로 느껴진다. ⓒPhoto by Anthony Tran on Unsplash
이런 시대에 부유하는 말들은 어떠한가. 도전하는 자만이 성공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 당장 실천하라, 머뭇거리는 이 순간이 적기다 등등, ‘움직임’에 대한 과잉 칭찬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지배당한 사람들이 (가정이든, 회사이든) 권력을 잡으면 가만히 있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늘 ‘단합’을 위해서 함께 (꼭 업무 끝나고!) 회식을 하고 (심지어 주말에!) 산행을 강요한다.
한국에서 사회성은 사회적 관계를 ‘잘’ 맺는다는 본래의 뜻이 아니라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으로 변종되었다. 사회성이 좋다면 내향적인 인간에게도 평등하게 다가가야 함이 마땅하지만 ‘외향성’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곳에서는 단지 사람의 성격을 빌미 삼아 차별을 정당화한다. 회사가 이러하니 초등학생들도 ‘혼자 밥 먹는다’는 이유로 또래를 놀린다. 한국에서 혼자는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결핍의 존재다. 혼자를 부족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이상한 사회성이 판을 치는 곳에서는 광고 모델도 아닌 주제에 고독을 씹는 자는 ‘폼 잡았다는 이유로’ 응징의 대상이 될 뿐이다.
진정한 고독을 위하여
고독을 경시한 풍토가 우리를 행복하게라도 했다면 억지로 외향적인 인간이 되는 게 문제는 아닐 거다. 하지만 인간성의 한쪽 면만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이 편향된 정상성을 좇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발생한다. 사람들이 쉬지 않고 늘 움직인다. 그러면서 동적인 것에만 ‘부지런하다’, ‘성실하다’는 포장지를 씌운다. 자연스레 반대편의 경우를 ‘게으르다’, ‘열의가 없다’면서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결국 사람들은 움직이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움직이지 않을 때의 평판이 두려워 억지로 ‘활동’한다. 현대인들이 쉬는 것조차 불안해하는 이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휴식이지만 우리들은 ‘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자책한다.
행동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고독’조차 상품이 된다. 최근의 베스트셀러들은 남과 부대끼면 살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기 바쁘다. 사람들은 고독조차도 다른 사람의 경험을 흉내 내고 전문가가 제안한 매뉴얼을 연습한다. 철저히 혼자가 되어 남의 눈치 아랑곳하지 않는 고독의 본 모습은 없다. 고독에 어울리는 가구들을 사야 하고 조명도 바꿔야 한다. 자신의 외로움을 공유할 반려동물은 필수다. 그리고 이를 사진 찍어 어디엔가 올린 후 타인의 ‘좋아요’에 웃음을 짓는다. 사람들은 고독을 통해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위로가 될 만한 수준의 고독을 설정하고 사람들에게 평가받는다.
‘고독’조차 상품화되어 보여지고 평가받는 시대가 되었다. ⓒPhoto by Georgia de Lotz on Unsplash
고독은 만인이 지닌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기득권들은 이를 ‘인간 자격 결핍’으로 칭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평범한 고독한 개인을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활기차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시스템의 결함은 쉽사리 공론화되지 못한다. 조직의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이 적극적인 사람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고독의 가치를 살려야 한다. 이 사회가 지금껏 추구했던 적극성은 너무 많은 사람을 아프게 했다. 고독에 덧씌워진 부정적 의미를 벗겨내자. 그러기 위해 고독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행동임을 이해하는 글들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고독은 죄가 없다. 지금껏 고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틀렸을 뿐이다.
고독은 죄가 없다
고독을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
오찬호
2018-09-28
고독은 SNS 공간에서나 대접받을 뿐이다.
일상에서 외롭다는 표시를 숨기지 않는 개인은 생애의 다음 단계로 안정적인 진입이 힘들다.
예를 들어 수천만 장의 ‘자기소개서’에서, 스스로를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자라고 표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패션 잡지를 넘기면 적절한 외로움의 눈빛을 지닌 모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철저히 혼자라는 느낌을 줄 때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주목받기 때문일 거다. 명품가방이나 명품시계도 광고 스타일이 유사하다. ‘고급’ 소리를 듣는 상품 광고에는 우아한 고독이 묻어 있다.
사람들은 가끔 잡지 속 고독의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고자 애를 쓴다. 특히나 고독이 어울리는 계절에는 많은 이들이 ‘정해진’ 틀에 맞추어 사진을 찍기 바쁘다. 고뇌가 느껴지는 (흐리멍덩한) 눈동자와 미소 없는 창백한 입술 그리고 정적인 자세가 어우러진 순간이 포착되면 이를 ‘인생 사진’이라고 부른다. ‘고독’이 인생의 한 면이기 때문일 거다. 사람으로 살면서, 그것도 ‘헬조선’이라 불리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어찌 쓸쓸하고 외롭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그러니 슬퍼 보이는 모습에서 위안을 찾는 역설이 발생한다.
고독하지 않은 사회
고독은 SNS 공간에서나 대접받을 뿐이다. 일상에서 외롭다는 표시를 숨기지 않는 개인은 생애의 다음 단계로 안정적인 진입이 힘들다. 예를 들어 수천만 장의 ‘자기소개서’에서, 스스로를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자라고 표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분명 그런 사람이 있겠지만, 아니 많겠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다가는 진학도, 취업도 어려우니 솔직한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외향적인 사람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등으로 자신을 포장하면서 ‘소설’을 쓰기 바쁘다.
자본주의 경쟁 원리가 곧 사회의 이치인 양 이해되는 곳에서 고독하다는 이미지는 결핍일 뿐이다. ‘나는 조용한 곳에서 책 읽기를 좋아합니다’와 같은 솔직한 자기 묘사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등장할 수 있어도 이후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이 자기소개서 항목으로 묻는 말들은 이렇다. “나는 살면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든 적이 있는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적이 있는가? 있다면 그 내용을 상세하게 서술하시오.”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독이라는 이미지는 결핍으로 느껴진다. ⓒPhoto by Anthony Tran on Unsplash
이런 시대에 부유하는 말들은 어떠한가. 도전하는 자만이 성공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 당장 실천하라, 머뭇거리는 이 순간이 적기다 등등, ‘움직임’에 대한 과잉 칭찬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지배당한 사람들이 (가정이든, 회사이든) 권력을 잡으면 가만히 있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늘 ‘단합’을 위해서 함께 (꼭 업무 끝나고!) 회식을 하고 (심지어 주말에!) 산행을 강요한다.
한국에서 사회성은 사회적 관계를 ‘잘’ 맺는다는 본래의 뜻이 아니라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으로 변종되었다. 사회성이 좋다면 내향적인 인간에게도 평등하게 다가가야 함이 마땅하지만 ‘외향성’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곳에서는 단지 사람의 성격을 빌미 삼아 차별을 정당화한다. 회사가 이러하니 초등학생들도 ‘혼자 밥 먹는다’는 이유로 또래를 놀린다. 한국에서 혼자는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결핍의 존재다. 혼자를 부족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이상한 사회성이 판을 치는 곳에서는 광고 모델도 아닌 주제에 고독을 씹는 자는 ‘폼 잡았다는 이유로’ 응징의 대상이 될 뿐이다.
진정한 고독을 위하여
고독을 경시한 풍토가 우리를 행복하게라도 했다면 억지로 외향적인 인간이 되는 게 문제는 아닐 거다. 하지만 인간성의 한쪽 면만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이 편향된 정상성을 좇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발생한다. 사람들이 쉬지 않고 늘 움직인다. 그러면서 동적인 것에만 ‘부지런하다’, ‘성실하다’는 포장지를 씌운다. 자연스레 반대편의 경우를 ‘게으르다’, ‘열의가 없다’면서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결국 사람들은 움직이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움직이지 않을 때의 평판이 두려워 억지로 ‘활동’한다. 현대인들이 쉬는 것조차 불안해하는 이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휴식이지만 우리들은 ‘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자책한다.
행동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고독’조차 상품이 된다. 최근의 베스트셀러들은 남과 부대끼면 살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기 바쁘다. 사람들은 고독조차도 다른 사람의 경험을 흉내 내고 전문가가 제안한 매뉴얼을 연습한다. 철저히 혼자가 되어 남의 눈치 아랑곳하지 않는 고독의 본 모습은 없다. 고독에 어울리는 가구들을 사야 하고 조명도 바꿔야 한다. 자신의 외로움을 공유할 반려동물은 필수다. 그리고 이를 사진 찍어 어디엔가 올린 후 타인의 ‘좋아요’에 웃음을 짓는다. 사람들은 고독을 통해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위로가 될 만한 수준의 고독을 설정하고 사람들에게 평가받는다.
‘고독’조차 상품화되어 보여지고 평가받는 시대가 되었다. ⓒPhoto by Georgia de Lotz on Unsplash
고독은 만인이 지닌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기득권들은 이를 ‘인간 자격 결핍’으로 칭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평범한 고독한 개인을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활기차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시스템의 결함은 쉽사리 공론화되지 못한다. 조직의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이 적극적인 사람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고독의 가치를 살려야 한다. 이 사회가 지금껏 추구했던 적극성은 너무 많은 사람을 아프게 했다. 고독에 덧씌워진 부정적 의미를 벗겨내자. 그러기 위해 고독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행동임을 이해하는 글들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고독은 죄가 없다. 지금껏 고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틀렸을 뿐이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한다. 개인의 행복은 사회가 상식적이어야 가능하다고 믿고 나쁜 고정관념을 깨는 글쓰기를 주로 한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등 여러 책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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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 고독을 자처하는 자들의 특권
이다혜
현대인 vs 원시인, 누가 더 많이 잘까
이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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