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사랑을 달콤 씁쓸하게 추억하듯, 지나간 더위를 추억할 시간이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다.
미칠 것 같은, 더위
무더위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대학생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페테르부르크의 숨이 막히는 더위 속에서 도끼로 노파를 내리치지 않았던가. 폭염의 날씨에 『죄와 벌』을 읽었던 나 같은 독자들이 또 있다면 소설의 줄거리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도 라스콜리니코프의 정신 상태가 어땠을지 정확히 이해한다고 자만하게 될 것이다. ‘그래, 이런 더위라면 누구라도 도끼를 들 수 있을지 몰라.’라면서.
물론 미칠 듯이 덥다고 누구나 도끼를 들진 않는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극도의 궁핍과 병적인 몽상 속에서 니체식의 초인 사상에 경도되었던 것도 우리는 잘 안다. 하지만 사람을 광기로 몰고 갈 것만 같은 무더위가 아니었다면 그처럼 범상치 않은 생각과 실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소설은 “7월 초순,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날 저녁 무렵”이라는 묘사로 시작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청년의 정신을 뒤흔들었던 무더위가 어땠는지 자세히 묘사한다.
“찌는 듯한 거리의 무더위는 숨이 막힐 지경일 뿐 아니라 혼잡과 도처에 널려져 있는 석탄재, 신축 건물의 발판‧벽돌‧먼지, 게다가 별장을 빌릴 만한 여유가 없는 페테르부르크의 주민이라면 누구든지 모를 사람이 없을, 그 특수한 여름철의 악취 등, 이러한 것들이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혼탁해져 있는 이 청년의 신경을 일시에 불쾌하게 뒤흔드는 것이다. 이 근처의 유별나게 많은 술집에서 발산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악취와, 평일인데도 빈번히 마주치게 되는 주정뱅이들이 이러한 정경을 더 한층 지겹고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중에서
이 정도면 페테르부르크의 무더위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 먼 곳에 가본 적이 없어서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본 결과는, 당혹스러웠다. 한국의 여름 날씨에 비하면 ‘천국이 여기 있구나!’ 싶었다. 오히려 언젠가 여름 피서 여행지로 이곳에 가보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슬며시 들었다. 더위 역시 상대적인 것일까. 누군가의 극심한 무더위가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이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겨울에는 영하 20도의 추위가 보통일 러시아 날씨를 생각해보면, 페테르부르크의 여름 더위는, 적어도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는 광기의 사유를 낳게 할 만하지 않을까. 게다가 더러운 뒷골목의 무더위라면 한층 더 고역스러운 것이 아닌가. 자연도 공평하지 않다. 어디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위는 더 고통스러운 것이므로. 그렇게 더위 역시 한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곤란한 현실과 그림 속 풍경
이를테면, 김애란의 단편소설 <풍경의 쓸모>도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이 겨울일 때 태국으로 여행을 간다. 이국의 풍경을 보러 여행을 간다면, 계절이 다른 곳으로의 여행이야말로 목적에 적합한 것일 테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견뎌야 하는 한겨울에 만나는 더위는 어쩌면 달콤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이국의 여름 풍경을 편히 즐기지 못한다.
“한국은 겨울인데 태국은 여름이었다. 일 년에 세 마디, 결이 다른 삼계가 있다지만 나 같은 한국 사람에겐 그저 ‘보통 여름’과 ‘후텁지근한 여름’ ‘몹시 더운 여름’으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관광버스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한국 날씨와 뉴스, 주가와 환율을 확인했다. 1월. 연이은 한파와 폭설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분주해 보였다. 반면 차창 너머 여름은 느긋했다. 푸르고 풍요롭고 축축해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된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스노볼을 쥔 기분이었다. 유리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인, 그런.”
-김애란, <풍경의 쓸모> 중에서
그는 여행 중에 어째서 낯설어하고 불편해하는 걸까. 대학 시간강사인 그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지만 아내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태국에 온 참이다. 한겨울의 한국에서 태국으로 날아와 전혀 다른 계절의 풍경을 대하고 온전히 즐길 수 없다. “한파와 폭설”이 그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라면, 태국에서 만난 “푸르고 풍요”로운 여름의 더위는 그림 속의 풍경이거나 남의 풍경 같다. 실은, 그는 여행지에서도 폰을 들고 교수 채용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가족이 되어버린 아버지 문제로 따로 신경 쓸 일도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더위나 추위뿐 아니라 삶의 온도에도 시달린다.
스노볼 안과 바깥이 다르듯 이국의 풍경이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결국 그가 바라는 욕망의 ‘풍경’은 그의 것이 되지 못한다. 이 소설에서 ‘풍경’이란 여유 있는 자들만이 누리는 것이다. 이국과 현실의 시차처럼 이국과 현실의 온도 차도 풍경을 누릴 수 있는 자들만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슬프다. 한편으로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이 여름의 풍경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 즉 ‘풍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더위가 덜 고통스러울지 모르겠다. 게다가 차마 우리의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풍경’을 꿈꿀 권리가 있지 않던가.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더위
김애란의 소설에 나타난 더위는 이국적인 풍경 속의 더위라는 점에서 특이한 편이다. 죽음의 계절로 비유되는 겨울에 비해 여름은 풍요와 절정의 계절로 인식되곤 하지만, 또 많은 작가들은 극심한 무더위를 삶의 절망스러운 순간에 배치하기를 즐겼다. 추위뿐만 아니라 무더위 역시 고난의 은유이거나 고난의 배경이 되기 좋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봄‧봄>의 작가로, 봄을 그리기 좋아했던 소설가 김유정은 <땡볕>이란 짧은 작품을 쓴 적 있다. 제목이 알려주듯 이 소설의 여름은 풍요나 행복 따위와는 거리가 먼 계절로 그려져 있다.
“덕순이는 어린 깍쟁이가 턱으로 가리킨 대로 그 길을 북으로 접어들며 다시 내걷기 시작한다. 내딛는 한 발짝마다 무거운 지게는 어깨에 배기고 등줄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진땀에 궁둥이는 쓰라릴 만치 물렀다. 속 타는 불김을 입으로 불어 가며 허덕지덕 올라오다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힝 풀어 그 옆 전봇대 허리에 쓱 문댈 때에는 그는 어지간히 가슴이 답답하였다. 당장 지게를 벗어던지고 푸른 그늘에 가 나자빠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으련만 그걸 못 하니 짜증이 안 날 수 없다.”
- 김유정, <땡볕> 중에서
“때는 중복, 허리의 쇠뿔도 녹이려는 뜨거운 땡볕”인데, 덕순은 병에 걸린 아내를 지게에 지고 대학병원을 찾아 나선다. 대학병원에서는 연구 목적으로 희귀한 병을 앓는 환자를 치료해주면서 월급까지 준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가난한 형편에 덕순은 그 말에 희망을 걸어본다. 욕을 하며 지게를 내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심한 무더위 속에서 그는 참고 아내를 병원으로 데려가 본다.
뱃속에 죽은 아기가 있어 그대로 둔다면 일주일을 못 가니 수술해야 한다는 말을 듣지만, 아내는 배를 가를 바에야 그저 죽기를 바란다. 순덕은 어쩔 수 없이 아내를 지게에 짊어지고 되돌아간다. “이게 웬일일까, 아까 오던 때와는 갑절이나 무거웠다.” 순덕은 담배를 사려던 돈으로 얼음냉수를 아내에게 사준다. 덕순의 땀이 빗발같이 내리붓는 것처럼 아내는 지게 위에서 유언을 그칠 줄 모르고 쏟아낸다.
이 소설처럼 삼복의 무더위는 여름을 생명력으로 끓어 넘치는 계절이 아니라 사산(死産)의 계절로 느끼게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더위가 있어 저 가난하고 바보 같은 부부의 사랑이 완성된다는 사실. 무더위 속에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만약 김유정의 짧은 이야기가 조금 아쉬운 독자라면 김이설의 더 길고 더 독한 단편소설 <폭염>(소설집 <오늘처럼 고요히>)을 읽어봐도 좋겠다.)
여름의 열기, 사랑의 열병
김유정이 무더위로 가난한 부부의 미련한 사랑을 그렸던 것처럼, 더위가 언제나 그저 괴로운 것만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최은영의 단편소설 「그 여름」에서처럼 한여름의 더위는 사랑의 열병으로 비유되곤 한다. 달콤 씁쓸한 사랑은 우리를 뜨겁게 끓어오르게 하고 괴로움 속으로 빠뜨리기도 한다.
“손가락 하나 잡지 않고도, 조금도 스치지 않고도 수이 옆에 다가서면 몸이 반응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수이의 손을 잡았을 때,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창고 구석에서 수이를 처음 안으면서 이경은 자신이 뼈와 살과 피부를 가진 존재라는 것에 감사했고, 언젠가 죽을 때가 되면 기억에 남는 건 이런 일들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둘이 함께한 첫해의 여름은 그렇게 흘렀다. “
- 최은영, <그 여름>중에서
최은영의 소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그리고 그 감정의 뿌리인 신체적 반응을 이렇게 실감 나게 그려놓았다. 남들처럼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어쩌면 별다를 것도 없는 연애담을 다루는 이 사랑의 소설이 빼어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랑에도 사계(四季)가 있다면, 이 소설은 절정의 시간, 여름의 뜨거움에 특별히 민감하다.
하지만 무더위도 가을바람에 멀리 날아가 버리듯, 소설의 제목은 ‘이 여름’이 아니고 ‘그 여름’이다. 뜨거운 사랑도 언젠가는 식는다. 사랑도 지나간다. 어떤 시의 제목처럼 ‘그 여름’에도 ‘끝’이 있다. 지나간 사랑을 달콤 씁쓸하게 추억하듯, 지나간 더위를 추억할 시간이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법칙이고 사계의 순리이므로. 그러고 보니 창밖에서 가을의 향기를 담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다.
광기와 절망, 혹은 사랑의 열병
들끓는 문장들, 더위의 은유들
노대원
2018-08-20
뜨거운 사랑도 언젠가는 식는다.
사랑도 지나간다.
어떤 시의 제목처럼 ‘그 여름’에도 ‘끝’이 있다.
지나간 사랑을 달콤 씁쓸하게 추억하듯, 지나간 더위를 추억할 시간이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다.
미칠 것 같은, 더위
무더위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대학생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페테르부르크의 숨이 막히는 더위 속에서 도끼로 노파를 내리치지 않았던가. 폭염의 날씨에 『죄와 벌』을 읽었던 나 같은 독자들이 또 있다면 소설의 줄거리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도 라스콜리니코프의 정신 상태가 어땠을지 정확히 이해한다고 자만하게 될 것이다. ‘그래, 이런 더위라면 누구라도 도끼를 들 수 있을지 몰라.’라면서.
물론 미칠 듯이 덥다고 누구나 도끼를 들진 않는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극도의 궁핍과 병적인 몽상 속에서 니체식의 초인 사상에 경도되었던 것도 우리는 잘 안다. 하지만 사람을 광기로 몰고 갈 것만 같은 무더위가 아니었다면 그처럼 범상치 않은 생각과 실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소설은 “7월 초순,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날 저녁 무렵”이라는 묘사로 시작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청년의 정신을 뒤흔들었던 무더위가 어땠는지 자세히 묘사한다.
“찌는 듯한 거리의 무더위는 숨이 막힐 지경일 뿐 아니라 혼잡과 도처에 널려져 있는 석탄재, 신축 건물의 발판‧벽돌‧먼지, 게다가 별장을 빌릴 만한 여유가 없는 페테르부르크의 주민이라면 누구든지 모를 사람이 없을, 그 특수한 여름철의 악취 등, 이러한 것들이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혼탁해져 있는 이 청년의 신경을 일시에 불쾌하게 뒤흔드는 것이다. 이 근처의 유별나게 많은 술집에서 발산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악취와, 평일인데도 빈번히 마주치게 되는 주정뱅이들이 이러한 정경을 더 한층 지겹고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중에서
이 정도면 페테르부르크의 무더위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 먼 곳에 가본 적이 없어서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본 결과는, 당혹스러웠다. 한국의 여름 날씨에 비하면 ‘천국이 여기 있구나!’ 싶었다. 오히려 언젠가 여름 피서 여행지로 이곳에 가보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슬며시 들었다. 더위 역시 상대적인 것일까. 누군가의 극심한 무더위가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이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겨울에는 영하 20도의 추위가 보통일 러시아 날씨를 생각해보면, 페테르부르크의 여름 더위는, 적어도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는 광기의 사유를 낳게 할 만하지 않을까. 게다가 더러운 뒷골목의 무더위라면 한층 더 고역스러운 것이 아닌가. 자연도 공평하지 않다. 어디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위는 더 고통스러운 것이므로. 그렇게 더위 역시 한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곤란한 현실과 그림 속 풍경
이를테면, 김애란의 단편소설 <풍경의 쓸모>도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이 겨울일 때 태국으로 여행을 간다. 이국의 풍경을 보러 여행을 간다면, 계절이 다른 곳으로의 여행이야말로 목적에 적합한 것일 테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견뎌야 하는 한겨울에 만나는 더위는 어쩌면 달콤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이국의 여름 풍경을 편히 즐기지 못한다.
“한국은 겨울인데 태국은 여름이었다. 일 년에 세 마디, 결이 다른 삼계가 있다지만 나 같은 한국 사람에겐 그저 ‘보통 여름’과 ‘후텁지근한 여름’ ‘몹시 더운 여름’으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관광버스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한국 날씨와 뉴스, 주가와 환율을 확인했다. 1월. 연이은 한파와 폭설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분주해 보였다. 반면 차창 너머 여름은 느긋했다. 푸르고 풍요롭고 축축해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된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스노볼을 쥔 기분이었다. 유리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인, 그런.”
-김애란, <풍경의 쓸모> 중에서
그는 여행 중에 어째서 낯설어하고 불편해하는 걸까. 대학 시간강사인 그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지만 아내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태국에 온 참이다. 한겨울의 한국에서 태국으로 날아와 전혀 다른 계절의 풍경을 대하고 온전히 즐길 수 없다. “한파와 폭설”이 그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라면, 태국에서 만난 “푸르고 풍요”로운 여름의 더위는 그림 속의 풍경이거나 남의 풍경 같다. 실은, 그는 여행지에서도 폰을 들고 교수 채용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가족이 되어버린 아버지 문제로 따로 신경 쓸 일도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더위나 추위뿐 아니라 삶의 온도에도 시달린다.
스노볼 안과 바깥이 다르듯 이국의 풍경이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결국 그가 바라는 욕망의 ‘풍경’은 그의 것이 되지 못한다. 이 소설에서 ‘풍경’이란 여유 있는 자들만이 누리는 것이다. 이국과 현실의 시차처럼 이국과 현실의 온도 차도 풍경을 누릴 수 있는 자들만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슬프다. 한편으로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이 여름의 풍경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 즉 ‘풍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더위가 덜 고통스러울지 모르겠다. 게다가 차마 우리의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풍경’을 꿈꿀 권리가 있지 않던가.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더위
김애란의 소설에 나타난 더위는 이국적인 풍경 속의 더위라는 점에서 특이한 편이다. 죽음의 계절로 비유되는 겨울에 비해 여름은 풍요와 절정의 계절로 인식되곤 하지만, 또 많은 작가들은 극심한 무더위를 삶의 절망스러운 순간에 배치하기를 즐겼다. 추위뿐만 아니라 무더위 역시 고난의 은유이거나 고난의 배경이 되기 좋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봄‧봄>의 작가로, 봄을 그리기 좋아했던 소설가 김유정은 <땡볕>이란 짧은 작품을 쓴 적 있다. 제목이 알려주듯 이 소설의 여름은 풍요나 행복 따위와는 거리가 먼 계절로 그려져 있다.
“덕순이는 어린 깍쟁이가 턱으로 가리킨 대로 그 길을 북으로 접어들며 다시 내걷기 시작한다. 내딛는 한 발짝마다 무거운 지게는 어깨에 배기고 등줄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진땀에 궁둥이는 쓰라릴 만치 물렀다. 속 타는 불김을 입으로 불어 가며 허덕지덕 올라오다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힝 풀어 그 옆 전봇대 허리에 쓱 문댈 때에는 그는 어지간히 가슴이 답답하였다. 당장 지게를 벗어던지고 푸른 그늘에 가 나자빠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으련만 그걸 못 하니 짜증이 안 날 수 없다.”
- 김유정, <땡볕> 중에서
“때는 중복, 허리의 쇠뿔도 녹이려는 뜨거운 땡볕”인데, 덕순은 병에 걸린 아내를 지게에 지고 대학병원을 찾아 나선다. 대학병원에서는 연구 목적으로 희귀한 병을 앓는 환자를 치료해주면서 월급까지 준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가난한 형편에 덕순은 그 말에 희망을 걸어본다. 욕을 하며 지게를 내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심한 무더위 속에서 그는 참고 아내를 병원으로 데려가 본다.
뱃속에 죽은 아기가 있어 그대로 둔다면 일주일을 못 가니 수술해야 한다는 말을 듣지만, 아내는 배를 가를 바에야 그저 죽기를 바란다. 순덕은 어쩔 수 없이 아내를 지게에 짊어지고 되돌아간다. “이게 웬일일까, 아까 오던 때와는 갑절이나 무거웠다.” 순덕은 담배를 사려던 돈으로 얼음냉수를 아내에게 사준다. 덕순의 땀이 빗발같이 내리붓는 것처럼 아내는 지게 위에서 유언을 그칠 줄 모르고 쏟아낸다.
이 소설처럼 삼복의 무더위는 여름을 생명력으로 끓어 넘치는 계절이 아니라 사산(死産)의 계절로 느끼게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더위가 있어 저 가난하고 바보 같은 부부의 사랑이 완성된다는 사실. 무더위 속에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만약 김유정의 짧은 이야기가 조금 아쉬운 독자라면 김이설의 더 길고 더 독한 단편소설 <폭염>(소설집 <오늘처럼 고요히>)을 읽어봐도 좋겠다.)
여름의 열기, 사랑의 열병
김유정이 무더위로 가난한 부부의 미련한 사랑을 그렸던 것처럼, 더위가 언제나 그저 괴로운 것만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최은영의 단편소설 「그 여름」에서처럼 한여름의 더위는 사랑의 열병으로 비유되곤 한다. 달콤 씁쓸한 사랑은 우리를 뜨겁게 끓어오르게 하고 괴로움 속으로 빠뜨리기도 한다.
“손가락 하나 잡지 않고도, 조금도 스치지 않고도 수이 옆에 다가서면 몸이 반응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수이의 손을 잡았을 때,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창고 구석에서 수이를 처음 안으면서 이경은 자신이 뼈와 살과 피부를 가진 존재라는 것에 감사했고, 언젠가 죽을 때가 되면 기억에 남는 건 이런 일들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둘이 함께한 첫해의 여름은 그렇게 흘렀다. “
- 최은영, <그 여름>중에서
최은영의 소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그리고 그 감정의 뿌리인 신체적 반응을 이렇게 실감 나게 그려놓았다. 남들처럼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어쩌면 별다를 것도 없는 연애담을 다루는 이 사랑의 소설이 빼어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랑에도 사계(四季)가 있다면, 이 소설은 절정의 시간, 여름의 뜨거움에 특별히 민감하다.
하지만 무더위도 가을바람에 멀리 날아가 버리듯, 소설의 제목은 ‘이 여름’이 아니고 ‘그 여름’이다. 뜨거운 사랑도 언젠가는 식는다. 사랑도 지나간다. 어떤 시의 제목처럼 ‘그 여름’에도 ‘끝’이 있다. 지나간 사랑을 달콤 씁쓸하게 추억하듯, 지나간 더위를 추억할 시간이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법칙이고 사계의 순리이므로. 그러고 보니 창밖에서 가을의 향기를 담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다.
세상사와 인간사가 궁금해서 책을 들여다봤습니다. 그 중엔 문학책이 꽤 많았습니다. 그러다 문학평론을 쓰게 되었습니다. 문학을 통해 세상살이와 삶을 말하는 방식이 맘에 들었나 봅니다. 제주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선생님을 꿈꾸는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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