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300만 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래전. 훗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 명명되는 인류의 조상이 직립보행을 시작한다. 대부분의 육상 동물이 네 발로 이동하던 때에 이들이 직립이라는 변화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지 않다. 나무 위에서 살다가 초원 지대로 내려오며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설이 가장 지배적이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아프리카는 초원보다는 숲이 많았다는 점, 직립보행을 하면서도 주로 나무에서 생활했다는 생물학적 근거가 발견된 뒤로는 예전만큼 힘을 얻는 주장은 아니다. 그 외에 직립보행이 에너지 소모가 적기 때문이라는 설, 체온조절이 용이하다는 설, 혹은 자신의 성기를 과시하기 위함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그 어떤 것도 확신하기는 어렵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인류는 직립보행을 통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얻었고 그 차별성을 기반으로 독특한 형태의 발전을 반복한다. 자유로워진 손을 이용해 도구를 만들고, 정교한 손동작은 뇌용량의 증가로 이어졌다. 비약적으로 발달한 뇌는 불의 활용이나 농경과 같은 여타 동물이 흉내 낼 수 없는 생활양식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직립보행의 등장은 인류 변화의 시작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직립보행이 장점만 지닌 것은 아니다.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과는 별개로 다리의 본질적 기능인 이동에 있어서는 지극히 취약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두 다리라는 제한된 이동 수단을 가진 인간의 생활 범위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일정 수준 이상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했다. 어찌 보면 초기 인류는 직립보행의 대가로 대지로부터의 속박을 강요받았는지도 모른다.
말, 역사를 이끈 동물
인류의 한정된 생활 반경은 약 5천 년 전부터 말을 가축화하며 변화한다. 초창기의 말은 여타 대형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식용이었으나, 달리기에 최적화된 다리 구조와 비교적 높은 지능을 확인한 인류는 ‘탈 것’으로써의 말의 가치에 주목하게 된다. 이후 수 대에 걸친 개량 및 편자, 마구 등의 발명을 통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말의 형태가 정착된다.
“기병은 전투 전에도, 전투 후에도 유리하다”란 나폴레옹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말의 장점은 전쟁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말과 인류의 관계는 전쟁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인간의 수십 배에 달하는 힘으로 물자를 운송하고 전투 시에는 특유의 기동력으로 전장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 때문에 말은 오랜 시간 귀중한 전략 자원으로 여겨졌는데, 중국의 경우 조공품으로 말을 요구하며 주변국의 군사력 억제를 꾀하기도 했다.
말의 기동력을 가장 잘 활용한 예로는 몽골제국을 들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몽골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한 제국으로, 이들은 전투 시 말을 이용한 기동력을 통해 상대방보다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며 전략적 우위를 선점할 수 있었다.
몽골제국이 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은 특유의 역참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의 체력이 한계에 다다를만한 지점에 역을 세워 말을 갈아타게 하는 역참제는 전근대 시절 가장 빠른 육상 교통수단이었다. 다만 역참이라는 제도 자체가 몽골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경우 춘추전국시대부터 역참을 운용했고, 페르시아 제국이나 로마 제국 또한 가도망을 정비하며 역참을 이용했다. 한국 또한 삼국시대부터 역참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그런데도 몽골의 역참이 가장 유명한 것은 그들이 가장 체계적이고 방대한 역참망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사신이 왕도에서 어디로 가든 25~40마일마다 역과 우편국이 있다. 역마다 황제의 사신이 묵고 갈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 게르가 있다. 그리고 사신이 이용할 수 있는 말과 말안장, 굴레 등 모든 제구가 배치되어 있어서 묵고 가기가 정말로 편하다. 역참마다 말이 400마리가 있다.”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중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서 주목할 건 어디로 가든 역이 있다는 사실인데, 이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몽골의 역참 건물인 게르는 분해와 조립이 쉬워 도로상황에 따라 역참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즉 도로상황이 나빠지면 역참을 우회도로로 이동시켜 어떤 상황에서도 신속한 교통과 통신망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골의 역참제는 당시 어떤 국가에서도 흉내 내기 힘든 선진적인 시스템이자 이동수단으로써 말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철도, 속박을 벗겨내다
말은 분명 전근대 시절 가장 빠른 육상 교통수단으로서 인류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으나 워낙 비싸 모든 사람이 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말을 소유한 사람들도 막대한 유지비용 탓에 부담이 적지 않았다. 몽골제국처럼 초원지대를 주 무대 삼은 국가야 말의 식량을 수급하는 데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적었으나 그렇지 못한 국가는 말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골머리를 앓아야만 했다. 몽골제국의 경우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나았을 뿐, 후기에는 역참당 400마리나 되는 말의 유지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그 체계가 붕괴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말의 대체재로 등장한 것이 철도이다. 사실 선로의 개념 자체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로 그리스의 코린토스 지방은 예로부터 해상 운송이 발달한 도시였는데, 교역품을 반대편 해협으로 빠르게 옮기기 위해 도로에 홈을 파고 수레를 굴렸다. 중국 또한 춘추전국시대에 수레를 빠르게 이동시키기 위해 수레 전용 홈을 파곤 했다.
이후 오랫동안 잊혔던 레일이 부활하는 건 16세기°æ 유럽의 광산에서였다. 이 시기에는 나무로 된 길을 만들어 광물을 효율적으로 나르는 방법을 썼는데, 재질의 한계로 쉽게 망가지곤 했다. 증기기관 발명 이후에는 영국의 리처드 트레이빅이 최초로 증기기관차를 개발해 운용에 성공했으나 역시 선로 문제 때문에 상용화에는 실패한다. 이 당시 선로의 재료는 주석이었는데, 기관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깨지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트레이빅 이후로도 여러 발명가가 증기기관차를 제작했으나 같은 이유로 상용화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건 증기기관차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스티븐슨이다. 그는 원래 기관차의 무게를 어떻게 분산할지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진행했으나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방향을 바꿔 선로의 재질 변화를 꾀하게 된다. 그 결과 개발한 것이 연철 선로이다. 동시에 스티븐슨은 현재까지 가장 많은 국가에서 사용하는 궤간인 표준궤, 모든 증기기관차의 프로토타입이 된 로켓호까지 발명하며 이후 철도 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스티븐슨에 의해 상용화된 철도와 기관차는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확산되며 기존 체제를 뒤흔든다. 철도의 등장 이후 비약적으로 상승한 운송 능력은 국가의 능력을 결집하는 데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며 국민국가의 등장을 부채질한다. 경제적으로는 철도 사업 모델이 대기업 주도 제조업의 근간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경영학의 원리 및 관료제의 형태를 정착시킨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태어난 곳에서 평생 발을 떼지 못하던 대다수 인간이 철도의 등장 이후부터 대지로부터의 속박을 벗고 활발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철도 이후로도 변화는 반복되었다. 변화를 통해 인류의 영역은 확장되었고 더 큰 자유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인류에게 각인된 변화의 전통은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의 문명을 견인해냈고, 앞으로도 그 전통은 지속될 것이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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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두 다리에서 말, 그리고 철도로
인류의 역사를 바꾼 교통수단의 변화
박문국
2018-05-08
인류, 두 발로 서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만 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래전. 훗날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 명명되는 인류의 조상이 직립보행을 시작한다. 대부분의 육상 동물이 네 발로 이동하던 때에 이들이 직립이라는 변화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지 않다. 나무 위에서 살다가 초원 지대로 내려오며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설이 가장 지배적이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아프리카는 초원보다는 숲이 많았다는 점, 직립보행을 하면서도 주로 나무에서 생활했다는 생물학적 근거가 발견된 뒤로는 예전만큼 힘을 얻는 주장은 아니다. 그 외에 직립보행이 에너지 소모가 적기 때문이라는 설, 체온조절이 용이하다는 설, 혹은 자신의 성기를 과시하기 위함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그 어떤 것도 확신하기는 어렵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인류는 직립보행을 통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얻었고 그 차별성을 기반으로 독특한 형태의 발전을 반복한다. 자유로워진 손을 이용해 도구를 만들고, 정교한 손동작은 뇌용량의 증가로 이어졌다. 비약적으로 발달한 뇌는 불의 활용이나 농경과 같은 여타 동물이 흉내 낼 수 없는 생활양식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직립보행의 등장은 인류 변화의 시작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직립보행이 장점만 지닌 것은 아니다.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과는 별개로 다리의 본질적 기능인 이동에 있어서는 지극히 취약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두 다리라는 제한된 이동 수단을 가진 인간의 생활 범위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일정 수준 이상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했다. 어찌 보면 초기 인류는 직립보행의 대가로 대지로부터의 속박을 강요받았는지도 모른다.
말, 역사를 이끈 동물
인류의 한정된 생활 반경은 약 5천 년 전부터 말을 가축화하며 변화한다. 초창기의 말은 여타 대형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식용이었으나, 달리기에 최적화된 다리 구조와 비교적 높은 지능을 확인한 인류는 ‘탈 것’으로써의 말의 가치에 주목하게 된다. 이후 수 대에 걸친 개량 및 편자, 마구 등의 발명을 통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말의 형태가 정착된다.
“기병은 전투 전에도, 전투 후에도 유리하다”란 나폴레옹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말의 장점은 전쟁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말과 인류의 관계는 전쟁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인간의 수십 배에 달하는 힘으로 물자를 운송하고 전투 시에는 특유의 기동력으로 전장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 때문에 말은 오랜 시간 귀중한 전략 자원으로 여겨졌는데, 중국의 경우 조공품으로 말을 요구하며 주변국의 군사력 억제를 꾀하기도 했다.
말의 기동력을 가장 잘 활용한 예로는 몽골제국을 들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몽골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한 제국으로, 이들은 전투 시 말을 이용한 기동력을 통해 상대방보다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며 전략적 우위를 선점할 수 있었다.
몽골제국이 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은 특유의 역참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의 체력이 한계에 다다를만한 지점에 역을 세워 말을 갈아타게 하는 역참제는 전근대 시절 가장 빠른 육상 교통수단이었다. 다만 역참이라는 제도 자체가 몽골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경우 춘추전국시대부터 역참을 운용했고, 페르시아 제국이나 로마 제국 또한 가도망을 정비하며 역참을 이용했다. 한국 또한 삼국시대부터 역참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그런데도 몽골의 역참이 가장 유명한 것은 그들이 가장 체계적이고 방대한 역참망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사신이 왕도에서 어디로 가든 25~40마일마다 역과 우편국이 있다. 역마다 황제의 사신이 묵고 갈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 게르가 있다. 그리고 사신이 이용할 수 있는 말과 말안장, 굴레 등 모든 제구가 배치되어 있어서 묵고 가기가 정말로 편하다. 역참마다 말이 400마리가 있다.”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중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서 주목할 건 어디로 가든 역이 있다는 사실인데, 이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몽골의 역참 건물인 게르는 분해와 조립이 쉬워 도로상황에 따라 역참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즉 도로상황이 나빠지면 역참을 우회도로로 이동시켜 어떤 상황에서도 신속한 교통과 통신망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골의 역참제는 당시 어떤 국가에서도 흉내 내기 힘든 선진적인 시스템이자 이동수단으로써 말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철도, 속박을 벗겨내다
말은 분명 전근대 시절 가장 빠른 육상 교통수단으로서 인류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으나 워낙 비싸 모든 사람이 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말을 소유한 사람들도 막대한 유지비용 탓에 부담이 적지 않았다. 몽골제국처럼 초원지대를 주 무대 삼은 국가야 말의 식량을 수급하는 데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적었으나 그렇지 못한 국가는 말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골머리를 앓아야만 했다. 몽골제국의 경우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나았을 뿐, 후기에는 역참당 400마리나 되는 말의 유지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그 체계가 붕괴해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말의 대체재로 등장한 것이 철도이다. 사실 선로의 개념 자체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로 그리스의 코린토스 지방은 예로부터 해상 운송이 발달한 도시였는데, 교역품을 반대편 해협으로 빠르게 옮기기 위해 도로에 홈을 파고 수레를 굴렸다. 중국 또한 춘추전국시대에 수레를 빠르게 이동시키기 위해 수레 전용 홈을 파곤 했다.
이후 오랫동안 잊혔던 레일이 부활하는 건 16세기°æ 유럽의 광산에서였다. 이 시기에는 나무로 된 길을 만들어 광물을 효율적으로 나르는 방법을 썼는데, 재질의 한계로 쉽게 망가지곤 했다. 증기기관 발명 이후에는 영국의 리처드 트레이빅이 최초로 증기기관차를 개발해 운용에 성공했으나 역시 선로 문제 때문에 상용화에는 실패한다. 이 당시 선로의 재료는 주석이었는데, 기관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깨지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트레이빅 이후로도 여러 발명가가 증기기관차를 제작했으나 같은 이유로 상용화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건 증기기관차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스티븐슨이다. 그는 원래 기관차의 무게를 어떻게 분산할지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진행했으나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방향을 바꿔 선로의 재질 변화를 꾀하게 된다. 그 결과 개발한 것이 연철 선로이다. 동시에 스티븐슨은 현재까지 가장 많은 국가에서 사용하는 궤간인 표준궤, 모든 증기기관차의 프로토타입이 된 로켓호까지 발명하며 이후 철도 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스티븐슨에 의해 상용화된 철도와 기관차는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확산되며 기존 체제를 뒤흔든다. 철도의 등장 이후 비약적으로 상승한 운송 능력은 국가의 능력을 결집하는 데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며 국민국가의 등장을 부채질한다. 경제적으로는 철도 사업 모델이 대기업 주도 제조업의 근간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경영학의 원리 및 관료제의 형태를 정착시킨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태어난 곳에서 평생 발을 떼지 못하던 대다수 인간이 철도의 등장 이후부터 대지로부터의 속박을 벗고 활발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철도 이후로도 변화는 반복되었다. 변화를 통해 인류의 영역은 확장되었고 더 큰 자유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인류에게 각인된 변화의 전통은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의 문명을 견인해냈고, 앞으로도 그 전통은 지속될 것이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변화]두 다리에서 말, 그리고 철도로'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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