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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변화하는 설렁탕의 맛

설렁탕의 기원과 변화

박찬일

2018-03-28

아마도 한식을 떠올리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음식이 설렁탕 아닐까 한다. 말도 많은 음식이다. 우리가 설렁탕을 사랑하고 관심 두는 건 그저 음식이 아니라 민족정신이 깃든(?) 존재로 보는 이유도 있다. 어떤 방송에서 이 음식에 100% 사골이 아닌, 땅콩버터와 커피 크림을 넣은 업체를 고발했다. 그러자 국민이 흥분하고, 업체에선 사과 아닌 사과를 하기도 했다. 크림 스파게티에 크림 말고 정체불명의 무엇을 넣는다고 해도 아무 말이 없을 텐데 말이다. 다른 음식도 아니고 설렁탕에 이상한(!) 것을 넣다니. 이런 의식이 우리 기저에 도도하게 흐른다는 뜻이다. ‘한식=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우리는 여전히 숭고하게 수호한다. 조금 각도가 다른 얘기지만, 일본인이 김치를 기무치라고 부르는 것조차 우리는 싫어한다. 짜장면을 중국식이 아닌 우리 마음대로 변형시켜 먹는 건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말이다. 심지어 짜장면은 중국과는 아무 상관 없는 한식이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다. 

 

몽골의 초원 풍경
▲ photo ⓒ Jeanne Menjoulet

 

몽골 요리와 설렁탕의 관계


흥미롭게도 설렁탕도 세월을 살아오면서 외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설렁탕이라는 요리가 고려 시대 원의 간섭에 의해 들어온 외래 음식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몽골은 기마에 의한 기습 전술로 정평이 나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장기전에도 능했으며 당연히 보급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었다. 날고기를 안장에 깔고 달리며 화살을 쏟아붓는 신속 기동전만 치른 것은 아니었다. 소처럼 크고 힘 좋은 가축을 이용해서 수레를 끌었고, 대량의 보급품을 조달해야 하는 공성전도 벌였다. 공성전은 성내의 식량이 고갈되어 항복할 때까지 심하게는 몇 년씩 이어졌다. 소는 수레를 끌지만, 식품이 되기도 한다. 말이 그렇듯이. 말고기, 양고기를 먹는 몽골이 소고기를 마다했을 리 없다. 특히 몽골족은 여유 있게 오랫동안 고기를 삶고 끓이는 요리도 많았다. 날고기나 구운 고기만 먹은 것은 아니었다. 과거 방식과 연관 관계를 정확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 지금 몽골 전통 육류요리 중 상당수는 물에 삶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설렁탕 몽골 기원설의 한 자료가 될 것이다.

어쨌든 설렁탕은 오래전부터 우리가 먹기 시작했고, 민족 음식이 되었다. 더구나 조선 시대 이후로 가장 강력한 권력이 존재했던 서울의 전통음식이다. 서울은 돈이 돌았고, 소도 많이 먹었다. 소고기의 주요 부산물은 뼈다. 그것을 오래 삶아서 먹는 건 당연한 요리법이었다. 설렁탕은 저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음식이었고, 서민들도 양반들도 좋아했다. 이 설렁탕의 조리법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는 자료가 별로 없다. 소머리를 쓴다는 증거는 일제강점기 출판된 일본 매체에 그림이 나오면서 지금도 전해지는데, 그것이 소머리 곰탕 방식인지, 아니면 설렁탕에 소머리를 많이 넣었다는 뜻인지는 분류하기 어렵다. 하여튼 소 사골을 고든, 머리를 삶든 뿌연 국물이 나온 것만은 틀림없어서 설렁탕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들지는 않는다. 

 

파

 

설렁탕의 변신

 

설렁탕이 획기적으로 변한 것은 뜻밖에도 사소한 이유였다. 바로 대파다. 대파를 우리가 원래부터 심지 않았는지, 비슷한 것을 심어 먹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890년대 이후부터 중국 산둥성에서 이주한 화교들에 의해 지금의 대파와 유사한 파가 널리 퍼졌다는 것은 정설이다. 흔히 산둥 화교의 주특기로 요리, 이발, 석공, 주물을 꼽는다. 여기에 채소 재배도 있다. 그들은 인천과 서울(영등포)에서 채소 재배를 많이 했다. 북창동에 화교 타운이 꽤 강했을 시절(~1970년대), 그 거리에는 아침이면 중국 채소를 파는 화교가 많았다고 한다. 북창동 일대는 현재의 프라자호텔이 들어서기 전에는 그 위치까지 길게 화교 거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산둥성 화교의 주 재배 채소는 배추, 양파, 대파, 당근 등이었다. 그중에 대파가 설렁탕에 투입되면서 이 요리의 맛이 변하게 되었다. 대파는 누린내를 없애는 탁효가 있다. 설렁탕은 아마도 누린내가 꽤 났을 것이다. 현재의 요리 공학은 누린내를 없애는 다채로운 향채와 첨가물의 효과를 보증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화교로부터 사들인 대파를 썰어서 얹어 먹었다. 누린내가 없어지고 입맛이 돌았을 것이다. 이것으로써 대파는 설렁탕집에서 중요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소면설렁탕

 

국수사리를 넣게 된 이유

 

또 하나의 변화는 정치 권력에 의해서였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식량 문제 해결은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였다. 특히 주곡 문제에 역량을 집중했다. 쌀의 소비를 억제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식당에서 점심에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 실제로 집행됐다. 그래서 재미있게도 탕 요리에 쌀밥 제공량을 줄이기 위해 국수를 일부 제공했던 것이다. 밥을 줄이되, 그 분량을 벌충할 요량으로 국수를 삶아 탕에 넣으라는 대안이었다. 밀가루는 당시 수입과 원조가 늘면서 아주 싼 곡물이 되었다. 국수를 삶아서 설렁탕에 넣으면 열량을 보전하고, 쌀 소비도 줄일 수 있었다. 이 정책은 나중에 강제조치가 폐기되었지만, 요식업의 습관으로 남아버렸다. 쌀밥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데도 탕에 국수를 넣어주었다. 국수 대신 당면 사리를 넣어주는 것도 같은 이치다. 현재 우리 요식업에서 탕은 물론 각종 전골 요리에 국수사리를 같이 쓰는 것은 이런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된 관습일 가능성이 크다.

설렁탕에 가는 국수사리를 넣는 관습은 아마도 오랫동안 존재할 것 같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전통의 설렁탕 요리법으로 수용했다. 전쟁, 박정희 정권, 미국 원조와 같은, 미각과는 전혀 상관없는 배경이 실제로는 우리 혀에 작동된다. 설렁탕 속 국수사리를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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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찬일
박찬일

글 쓰는 요리사. 어린 시절 어머니 치맛자락 앞에서 콩나물과 마늘을 다듬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몇몇 인기 있는 식당을 열었다. 한국 식재료를 이용한 이탈리아 요리를 최초로 시도했으며, 세세한 원산지를 표기하는 메뉴 역시 그의 고안이다. 요리하고 쓰는 일이 일과다. 결국 죽기 위해 먹어야 하는 생명의 허망함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먹고 마시며, 그 기록을 남기기 위해 다시 쓴다. 저서로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이 있다. 현재 서교동에서 <로칸다 몽로>라는 술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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