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배경은 인간의 삶을 현재보다 더 긍정적인 상황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래서 변화의 주체가 인간이 되어야 함을 당연시한다. 그런데 세계사를 살펴보면 인간이 주체가 되었던 시기는 근세뿐이었다. 고대는 신인동형 시대였고 중세는 신본주의 시대였으며 근세는 인본주의가 시작되긴 했지만 그 바탕에 고대 신본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근대에는 ‘기계’가 모든 변화의 주제어가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기계의 발달로 물질이 풍족해 인간의 삶이 나아질 줄 알았지만,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새로운 신분이 만들어졌을 뿐 실질적으로 혜택을 보는 부류는 많지 않았다. 이후 전기의 발명에 의한 제2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며 군사력이 곧 국가의 능력이던 시대의 기준이 경제적인 수준으로 바뀌게 되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라는 국가 간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지하자원 전쟁이 식민지배체계를 만들어내면서 세계 경제 대국이 패권을 잡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이제 제3차 산업혁명 IT(컴퓨터)의 발달은 경제뿐 아니라 지하자원 하나 없는 한국도 기술력을 갖추어 선진국 반열로 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있어 국가 경제력을 갖출 기회가 있었던 이 시기와 다르게, 최근 도래한 제4차 산업혁명(IoT 또는 ICT 사물인터넷)은 그 변화의 시간이 너무 짧아서 IT가 준비되지 않은 나라들은 감히 시도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가 간 새로운 빈익빈 부익부의 미래가 예상되고 있다.
주체성을 잃은 도시 변화
이렇게 사회가 급변함에 따라 생활방식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근대 초기에는 건축 디자인의 관심이 ‘탈과거’였기에 생활 방식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지역에 통용되는 ‘국제양식’이라는 건축형태가 등장하면서 토속적 건축물을 탈피하고 세계는 하나의 건축형태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형태 변화뿐 아니라 생활방식, 식생활, 의복, 세대 간의 가치관 그리고 대인관계의 변화까지 불러왔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급격하게 구조형태가 바뀌면서 서양식도 아니고 우리의 전통 방식도 아닌 라이프 스타일이 형성됐다. 이는 우리가 주체 되지 못하고 급변하는 흐름과 건설사가 주체가 되어 만들어진 주거 변화에 문제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서양은 거의 7천여 년에 걸친 지속적인 변화를 통해 현재까지 왔지만, 우리의 변화는 사실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 관한 책을 쓰던 중 1750년대 한양 지도를 본 적이 있다. 이 시기 서울의 영역은 한강 이북으로, 지금의 강북 위치였다. 산이 감싸고 있어 요새처럼 보이고 그 안에 마을이 있으며 중심부에 궁궐이 자리한다. 나는 산이 융기한 모양을 보면서 문득 지문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의 지문이 다른 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당시의 서울 지도 또한 현대적인 도시 계획은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흐름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도시 계획은 초기 도로의 형태가 기초가 되고 시대가 변하면서 여러 요인에 의해 세분되어 간다. 이때 그 변화의 내용은 일정해야 하며 주어지는 상황에 따른 적응 반복을 통해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도시는 일제강점기에 변화의 주체가 바뀌었고 6·25 전쟁 이후 폐허로 변한 도시를 복구하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는 중단되었다. 그 후로도 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이미 우리 주도 하의 변화는 연속성을 잃었고, 단시일 내에 기본적인 삶을 해결해야 한다는 정책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하여 세계 어디에도 없는 무작위 주택과 마을을 형성했다. 도시가 우리 것이 아닌 근거를 알 수 없는 외국 건축물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자연스러움 없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에서는 구조적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물리적 문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민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되어 사회문제로 대두된다.
평지가 많은 유럽과 달리 대지의 70%가 산과 언덕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도시 구조
대지의 차이
건축물의 형태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주목적이며 그에 따른 외형적 기능은 도시의 몫이다. 각 나라가 저마다 다른 도시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 주된 요소가 바로 건축물의 형태이다. 그리고 이 형태를 디자인하는 데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대지, 즉 땅이다. 인구 증가에 따른 주거 문제로 아파트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파트의 형태나 기능이 아니라 대지를 읽지 않고 건물을 짓는 건설회사의 역할이다. 처음 등장한 아파트는 산업혁명 후 도시로 인구가 몰리면서 파리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고자 르코르뷔지에가 제안한 ‘빛나는 도시(La Ville Radieuse)’이다. 무려 300만 명을 위한 이 기획은 당시의 인구문제를 타개할 훌륭한 제안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럽과 우리나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대지의 조건이다. 유럽은 평지가 많은 반면 우리는 국토의 70% 이상이 언덕으로 이루어졌다. 건축은 건축물의 형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대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평지에 놓인 건축물을 대지를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기에 도시를 만들면서 먼저 언덕을 모두 평지로 만들어야 했다. 공간 바닥의 레벨이 대지 레벨을 반영하고 공간의 레벨이 생활의 레벨을 다르게 한다. 레벨은 물리적 높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시야(사고)의 레벨에 영향을 준다. 평지로 변한 아파트 단지에 같이 등장하는 것이 옹벽 또는 산을 깎아 내는 행위다. 과거의 서울은 지금보다 훨씬 경사가 있는 도시였다. 문제는 이 지형이 5천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인체처럼 뼈대, 힘줄, 핏줄 그리고 심장이 있다. 그런데 한국인의 그것을 마치 서양사람처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지는 과거의 기억으로 만들어졌다. 대지는 물의 흐름이 바뀐 줄 모르고 물을 흘려보내기에 홍수가 일고 물이 옹벽을 뚫고 나오려 하는 것이다. 이것만큼 심각한 것이 바로 우리의 생활방식이다. 도시와 농촌의 차이는 지역의 기능 외에는 없어야 하는데 생활방식마저 다르다. 우리의 명절과 대인관계는 서양과 다르며 우리의 철학이 또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의 도시에 우리의 생활방식을 맞추며 살다 보니 이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 외국이 우리의 도시에서 그들과 다름을 보고 싶어 하듯 우리도 외국에서 우리와 다른 변화의 차이를 보아야 하는데 점차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도시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것이다. 한국의 건축도 이제는 우리의 건축을 스스로 결정하여 우리의 삶을 닮은 성숙한 공간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독일 건축가이자 건축학 교수. 독일 다름슈타트 대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박사, 독일 호프만 설계사무소, (주)쌍용건설 등을 거쳐 현재는 안산대학교에서 건축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건축물에는 건축이 없다』 『음악 미술 그리고 건축』 『건축 인문의 집을 짓다』 『철학이 있는 건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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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삶을 통해 변하는 도시
주체적이고 자연스러운 도시변화
양용기
2018-03-21
변화의 기점
변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배경은 인간의 삶을 현재보다 더 긍정적인 상황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래서 변화의 주체가 인간이 되어야 함을 당연시한다. 그런데 세계사를 살펴보면 인간이 주체가 되었던 시기는 근세뿐이었다. 고대는 신인동형 시대였고 중세는 신본주의 시대였으며 근세는 인본주의가 시작되긴 했지만 그 바탕에 고대 신본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근대에는 ‘기계’가 모든 변화의 주제어가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기계의 발달로 물질이 풍족해 인간의 삶이 나아질 줄 알았지만,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새로운 신분이 만들어졌을 뿐 실질적으로 혜택을 보는 부류는 많지 않았다. 이후 전기의 발명에 의한 제2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며 군사력이 곧 국가의 능력이던 시대의 기준이 경제적인 수준으로 바뀌게 되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라는 국가 간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지하자원 전쟁이 식민지배체계를 만들어내면서 세계 경제 대국이 패권을 잡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이제 제3차 산업혁명 IT(컴퓨터)의 발달은 경제뿐 아니라 지하자원 하나 없는 한국도 기술력을 갖추어 선진국 반열로 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있어 국가 경제력을 갖출 기회가 있었던 이 시기와 다르게, 최근 도래한 제4차 산업혁명(IoT 또는 ICT 사물인터넷)은 그 변화의 시간이 너무 짧아서 IT가 준비되지 않은 나라들은 감히 시도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가 간 새로운 빈익빈 부익부의 미래가 예상되고 있다.
주체성을 잃은 도시 변화
이렇게 사회가 급변함에 따라 생활방식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근대 초기에는 건축 디자인의 관심이 ‘탈과거’였기에 생활 방식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지역에 통용되는 ‘국제양식’이라는 건축형태가 등장하면서 토속적 건축물을 탈피하고 세계는 하나의 건축형태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형태 변화뿐 아니라 생활방식, 식생활, 의복, 세대 간의 가치관 그리고 대인관계의 변화까지 불러왔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급격하게 구조형태가 바뀌면서 서양식도 아니고 우리의 전통 방식도 아닌 라이프 스타일이 형성됐다. 이는 우리가 주체 되지 못하고 급변하는 흐름과 건설사가 주체가 되어 만들어진 주거 변화에 문제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서양은 거의 7천여 년에 걸친 지속적인 변화를 통해 현재까지 왔지만, 우리의 변화는 사실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 관한 책을 쓰던 중 1750년대 한양 지도를 본 적이 있다. 이 시기 서울의 영역은 한강 이북으로, 지금의 강북 위치였다. 산이 감싸고 있어 요새처럼 보이고 그 안에 마을이 있으며 중심부에 궁궐이 자리한다. 나는 산이 융기한 모양을 보면서 문득 지문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의 지문이 다른 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당시의 서울 지도 또한 현대적인 도시 계획은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흐름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도시 계획은 초기 도로의 형태가 기초가 되고 시대가 변하면서 여러 요인에 의해 세분되어 간다. 이때 그 변화의 내용은 일정해야 하며 주어지는 상황에 따른 적응 반복을 통해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도시는 일제강점기에 변화의 주체가 바뀌었고 6·25 전쟁 이후 폐허로 변한 도시를 복구하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는 중단되었다. 그 후로도 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이미 우리 주도 하의 변화는 연속성을 잃었고, 단시일 내에 기본적인 삶을 해결해야 한다는 정책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하여 세계 어디에도 없는 무작위 주택과 마을을 형성했다. 도시가 우리 것이 아닌 근거를 알 수 없는 외국 건축물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자연스러움 없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에서는 구조적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물리적 문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민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되어 사회문제로 대두된다.
평지가 많은 유럽과 달리 대지의 70%가 산과 언덕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도시 구조
대지의 차이
건축물의 형태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주목적이며 그에 따른 외형적 기능은 도시의 몫이다. 각 나라가 저마다 다른 도시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 주된 요소가 바로 건축물의 형태이다. 그리고 이 형태를 디자인하는 데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대지, 즉 땅이다. 인구 증가에 따른 주거 문제로 아파트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파트의 형태나 기능이 아니라 대지를 읽지 않고 건물을 짓는 건설회사의 역할이다. 처음 등장한 아파트는 산업혁명 후 도시로 인구가 몰리면서 파리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고자 르코르뷔지에가 제안한 ‘빛나는 도시(La Ville Radieuse)’이다. 무려 300만 명을 위한 이 기획은 당시의 인구문제를 타개할 훌륭한 제안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럽과 우리나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대지의 조건이다. 유럽은 평지가 많은 반면 우리는 국토의 70% 이상이 언덕으로 이루어졌다. 건축은 건축물의 형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대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평지에 놓인 건축물을 대지를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기에 도시를 만들면서 먼저 언덕을 모두 평지로 만들어야 했다. 공간 바닥의 레벨이 대지 레벨을 반영하고 공간의 레벨이 생활의 레벨을 다르게 한다. 레벨은 물리적 높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시야(사고)의 레벨에 영향을 준다. 평지로 변한 아파트 단지에 같이 등장하는 것이 옹벽 또는 산을 깎아 내는 행위다. 과거의 서울은 지금보다 훨씬 경사가 있는 도시였다. 문제는 이 지형이 5천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인체처럼 뼈대, 힘줄, 핏줄 그리고 심장이 있다. 그런데 한국인의 그것을 마치 서양사람처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지는 과거의 기억으로 만들어졌다. 대지는 물의 흐름이 바뀐 줄 모르고 물을 흘려보내기에 홍수가 일고 물이 옹벽을 뚫고 나오려 하는 것이다. 이것만큼 심각한 것이 바로 우리의 생활방식이다. 도시와 농촌의 차이는 지역의 기능 외에는 없어야 하는데 생활방식마저 다르다. 우리의 명절과 대인관계는 서양과 다르며 우리의 철학이 또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의 도시에 우리의 생활방식을 맞추며 살다 보니 이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 외국이 우리의 도시에서 그들과 다름을 보고 싶어 하듯 우리도 외국에서 우리와 다른 변화의 차이를 보아야 하는데 점차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도시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것이다. 한국의 건축도 이제는 우리의 건축을 스스로 결정하여 우리의 삶을 닮은 성숙한 공간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독일 건축가이자 건축학 교수. 독일 다름슈타트 대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박사, 독일 호프만 설계사무소, (주)쌍용건설 등을 거쳐 현재는 안산대학교에서 건축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건축물에는 건축이 없다』 『음악 미술 그리고 건축』 『건축 인문의 집을 짓다』 『철학이 있는 건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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