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어가는 호기심
나는 온라인 게임, 정확히 말하자면 MMORPG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심리학계에서는 매우 낯선 연구 분야였다. 온라인 게임과 기존 컴퓨터 게임의 차이점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내가 공부하던 연구실에서 그런 종류의 온라인 게임을 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으며, 특히 박사과정 학생으로는 나 하나뿐이었다. 게임뿐만 아니라 다른 기술 분야에서도 나는 늘 새로운 기기와 매체에 흥미를 느꼈고 시도해보곤 했다. 블로그와 페이스북까지는 그랬다. 심지어 블로그는 내 인생에 새로운 창을 열어줬다. 그 덕분에 책을 출판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불려 다니는 기회도 얻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은 듯하다.
새로운 매체를 향한 호기심은 트위터에서 멈췄다. 인스타그램 계정은 가지고는 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그 이후의 매체에 관해서는 솔직히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른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최근 내가 밤에 혼자 하는 게임은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2009년에 발매된 것이다. 그 이후의 게임도 여럿 구매했지만, 잠깐씩 해보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니까 내 게임 경험의 경계선은 2009년에 멈춰선 셈이다. 영화를 좋아해서 관련 책도 몇 권 썼고 최근에도 영화를 주제로 강의까지 하지만, 갈수록 새로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듦을 느낀다. 물론 최근 할리우드 영화들이 만화와 CG로 점철되어가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 지정학적인 핑계도 있는데, 예전에 살던 곳에서 멀티플렉스 극장까지는 걸어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지금 사는 곳에서 극장까지는 그보다 더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동차를 몰고서 10분 남짓이라면 이 한적한 도시에서는 그리 먼 것도 아니다. 그저 영화에 대한 흥미가 예전만 못해졌다는 것이 현재 내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예전에 읽었던 스탠퍼드 대학 신경학과 교수 로버트 사폴스키의 연구에 따르면 39세의 95%는 새로운 장르 음악을 듣지 않는다. 35세까지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그 이후에 시도해볼 가능성 역시 5% 미만이다. 23세 이전에 입어본 적 없는 종류의 옷을 입을 확률은 5%를 조금 넘는다. 변화의 경계선은 청소년기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성은 청소년기에 급작스럽게 높아졌다가 25세를 전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 실험실 쥐들도 마찬가지다. 대개 새끼 시절에는 낯선 음식을 피하지만 청소년기에 도달하면 온갖 먹이들을 다 먹어보며, 성년기가 지나면 더는 새로운 먹이를 시도하지 않는다. 이런 연구 결과를 읽다 보면 우리의 뇌가 어느 시점까지는 새로운 경험들을 받아들이면서 그것들의 원형(Prototype)을 만들어내지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이전에 만들어두었던 원형을 바탕으로 이후의 경험을 걸러내고 막아서는 것 같다.
하지만 변화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떤 변화는 씁쓸하거나 슬프고 허망하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서 늙고 병들어가는 변화가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과정도 그렇다. 처음에 연애를 시작할 때의 감정과 헤어지기 직전의 감정을 비교해보면 아마 그 격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 믿음과 기대는 실망과 환멸로, 뜨거운 이끌림은 냉정한 거리감으로 바뀌어 있다. 연애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 대인관계도 비슷한 변화를 겪곤 한다. 관계의 파탄은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어떤 변화는 특정한 시기에만 일어난다. 그 시기를 지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다. 각인(Imprinting)은 그런 변화의 대표적인 예다. 아기 새들이 알에서 깨어난 며칠 이내에 일정한 크기의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물체를 보면, 본능적으로 그 물체를 최우선 추종 대상으로 여기고 따라다니려 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것이 어미 새가 아니라 사람이나 움직이는 공이라 할지라도 각인은 일어나며 일단 한번 각인이 일어나면 그 대상을 바꿀 수 없다. 각인 현상을 발견한 콘라드 로렌츠는 이를 이용해서 자기 휘하에 기러기들을 두고 졸졸 끌고 다니곤 했다. 그 기러기들은 평생 로렌츠를 따라다녔고, 번식기가 되면 구애까지 했다. 이렇듯 한번 일어나면 그 존재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변함없이 유지되는 성향이라는 점에서 각인은 로맨틱한 면도 있다.
각인 너머의 가능성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도 그런 각인에 해당하는 경험들이 몇 가지 있다. 나는 고등학교 이전까지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처음 내가 다닐 대학 교정에 들어섰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날씨는 스산했고, 나무들은 앙상했으며, 교정을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어두운 표정으로 나 따위에게는 전혀 시선을 주지 않고 땅만 보고 걷고 있었다. 그때 내 마음은 혼란과 걱정뿐이었다. 고등학교에서는 누군가를 만나면 반드시 인사하거나 인사 받아야 했기에 이 새로운 학교에서 그런 원칙이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누가 그 대상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새로운 조직, 새로운 집단, 새로운 모임에 들어설 때면 비슷한 심정을 느낀다. 하지만 1987년 초의 그 순간만큼 선명하지는 않다.
인간의 마음이 각인처럼 작동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한번 사랑에 빠진 사람을 무조건 평생 사랑하게 되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한번 믿은 사람은 평생 계속 믿을 수 있다면 또 얼마나 마음 놓이겠나. 그랬더라면 우리는 배신감이나 불신, 실망이나 환멸 같은 감정을 겪어볼 기회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에게는 각인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동학자 존 보울비는 갓 태어난 아이와 그 어머니 간 애착이 각인에 해당한다고 봤지만, 사실이 아니다. 인간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도 새로운 애착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어린 시절의 관계를 저버릴 수도 있다. 연애를 생각해보라. 첫 연애는 대개 부모(혹은 양육자)를 대신할만한 애착 대상을 찾아보려는 실험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연애는 아무리 성공적이라고 해도 많은 경우 헤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그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한다.
인간에게 각인이 없다는 건 결함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우리에게는 각인 같은 경험에 못박히지 않는 유연성이 있다. 사폴스키의 연구에서도 나이든 조사 대상자의 5%는 여전히 새로운 옷을 입어보고 낯선 음식을 먹었다. 95%가 느리게 각인된 거위처럼 행동하는 동안 5%는 여전히 영장류에 걸맞은 행동을 한 셈이다. 한번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일은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여전히 변화하고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심리학자)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과 일본 리니지 유저의 라이프스타일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소년 문화심리학과 매체 심리학, 사이버공간의 심리학 연구를 수행했으며, 영화와 만화, 게임 등을 이용한 심리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팝콘 심리학』 『심리학 오디세이』 『싸이코 짱가의 영화 속 심리학』 『소심한 심리학자와 무심한 고양이』 등을 저술했고,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현재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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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각인, 변함없는 것에 대한 소망
끝없는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
장근영
2018-03-06
시들어가는 호기심
나는 온라인 게임, 정확히 말하자면 MMORPG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심리학계에서는 매우 낯선 연구 분야였다. 온라인 게임과 기존 컴퓨터 게임의 차이점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내가 공부하던 연구실에서 그런 종류의 온라인 게임을 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으며, 특히 박사과정 학생으로는 나 하나뿐이었다. 게임뿐만 아니라 다른 기술 분야에서도 나는 늘 새로운 기기와 매체에 흥미를 느꼈고 시도해보곤 했다. 블로그와 페이스북까지는 그랬다. 심지어 블로그는 내 인생에 새로운 창을 열어줬다. 그 덕분에 책을 출판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불려 다니는 기회도 얻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은 듯하다.
새로운 매체를 향한 호기심은 트위터에서 멈췄다. 인스타그램 계정은 가지고는 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그 이후의 매체에 관해서는 솔직히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른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최근 내가 밤에 혼자 하는 게임은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2009년에 발매된 것이다. 그 이후의 게임도 여럿 구매했지만, 잠깐씩 해보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니까 내 게임 경험의 경계선은 2009년에 멈춰선 셈이다. 영화를 좋아해서 관련 책도 몇 권 썼고 최근에도 영화를 주제로 강의까지 하지만, 갈수록 새로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듦을 느낀다. 물론 최근 할리우드 영화들이 만화와 CG로 점철되어가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 지정학적인 핑계도 있는데, 예전에 살던 곳에서 멀티플렉스 극장까지는 걸어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지금 사는 곳에서 극장까지는 그보다 더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동차를 몰고서 10분 남짓이라면 이 한적한 도시에서는 그리 먼 것도 아니다. 그저 영화에 대한 흥미가 예전만 못해졌다는 것이 현재 내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예전에 읽었던 스탠퍼드 대학 신경학과 교수 로버트 사폴스키의 연구에 따르면 39세의 95%는 새로운 장르 음악을 듣지 않는다. 35세까지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그 이후에 시도해볼 가능성 역시 5% 미만이다. 23세 이전에 입어본 적 없는 종류의 옷을 입을 확률은 5%를 조금 넘는다. 변화의 경계선은 청소년기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성은 청소년기에 급작스럽게 높아졌다가 25세를 전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 실험실 쥐들도 마찬가지다. 대개 새끼 시절에는 낯선 음식을 피하지만 청소년기에 도달하면 온갖 먹이들을 다 먹어보며, 성년기가 지나면 더는 새로운 먹이를 시도하지 않는다. 이런 연구 결과를 읽다 보면 우리의 뇌가 어느 시점까지는 새로운 경험들을 받아들이면서 그것들의 원형(Prototype)을 만들어내지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이전에 만들어두었던 원형을 바탕으로 이후의 경험을 걸러내고 막아서는 것 같다.
하지만 변화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떤 변화는 씁쓸하거나 슬프고 허망하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서 늙고 병들어가는 변화가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과정도 그렇다. 처음에 연애를 시작할 때의 감정과 헤어지기 직전의 감정을 비교해보면 아마 그 격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 믿음과 기대는 실망과 환멸로, 뜨거운 이끌림은 냉정한 거리감으로 바뀌어 있다. 연애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 대인관계도 비슷한 변화를 겪곤 한다. 관계의 파탄은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어떤 변화는 특정한 시기에만 일어난다. 그 시기를 지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다. 각인(Imprinting)은 그런 변화의 대표적인 예다. 아기 새들이 알에서 깨어난 며칠 이내에 일정한 크기의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물체를 보면, 본능적으로 그 물체를 최우선 추종 대상으로 여기고 따라다니려 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것이 어미 새가 아니라 사람이나 움직이는 공이라 할지라도 각인은 일어나며 일단 한번 각인이 일어나면 그 대상을 바꿀 수 없다. 각인 현상을 발견한 콘라드 로렌츠는 이를 이용해서 자기 휘하에 기러기들을 두고 졸졸 끌고 다니곤 했다. 그 기러기들은 평생 로렌츠를 따라다녔고, 번식기가 되면 구애까지 했다. 이렇듯 한번 일어나면 그 존재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변함없이 유지되는 성향이라는 점에서 각인은 로맨틱한 면도 있다.
각인 너머의 가능성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도 그런 각인에 해당하는 경험들이 몇 가지 있다. 나는 고등학교 이전까지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처음 내가 다닐 대학 교정에 들어섰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날씨는 스산했고, 나무들은 앙상했으며, 교정을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어두운 표정으로 나 따위에게는 전혀 시선을 주지 않고 땅만 보고 걷고 있었다. 그때 내 마음은 혼란과 걱정뿐이었다. 고등학교에서는 누군가를 만나면 반드시 인사하거나 인사 받아야 했기에 이 새로운 학교에서 그런 원칙이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누가 그 대상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새로운 조직, 새로운 집단, 새로운 모임에 들어설 때면 비슷한 심정을 느낀다. 하지만 1987년 초의 그 순간만큼 선명하지는 않다.
인간의 마음이 각인처럼 작동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한번 사랑에 빠진 사람을 무조건 평생 사랑하게 되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한번 믿은 사람은 평생 계속 믿을 수 있다면 또 얼마나 마음 놓이겠나. 그랬더라면 우리는 배신감이나 불신, 실망이나 환멸 같은 감정을 겪어볼 기회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에게는 각인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동학자 존 보울비는 갓 태어난 아이와 그 어머니 간 애착이 각인에 해당한다고 봤지만, 사실이 아니다. 인간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도 새로운 애착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어린 시절의 관계를 저버릴 수도 있다. 연애를 생각해보라. 첫 연애는 대개 부모(혹은 양육자)를 대신할만한 애착 대상을 찾아보려는 실험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연애는 아무리 성공적이라고 해도 많은 경우 헤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그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한다.
인간에게 각인이 없다는 건 결함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우리에게는 각인 같은 경험에 못박히지 않는 유연성이 있다. 사폴스키의 연구에서도 나이든 조사 대상자의 5%는 여전히 새로운 옷을 입어보고 낯선 음식을 먹었다. 95%가 느리게 각인된 거위처럼 행동하는 동안 5%는 여전히 영장류에 걸맞은 행동을 한 셈이다. 한번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일은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여전히 변화하고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심리학자)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과 일본 리니지 유저의 라이프스타일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소년 문화심리학과 매체 심리학, 사이버공간의 심리학 연구를 수행했으며, 영화와 만화, 게임 등을 이용한 심리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팝콘 심리학』 『심리학 오디세이』 『싸이코 짱가의 영화 속 심리학』 『소심한 심리학자와 무심한 고양이』 등을 저술했고,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현재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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