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자신과 같은 항로를 따랐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내의 인생이 사실 스펙터클한 관계의 연속이었음을 깨닫는다.
그에게 늘 손을 내밀던 이웃의 도움으로 첫 여행을 떠나, 거기에서 젊을 적 아내가 머물렀던 성에서 아내의 예전 인연들과 또 다른 관계를 맺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원죄로 인해 평생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사회는 관계와 관계가 만든 거대한 연결망이고, 인간은 촘촘한 그물망을 이루는 부속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여러 문제는 궁극적으로 관계에서 비롯된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 한 인간의 성격이 형성된다는 이론은 근대적 세계관의 주요한 부분이 되었다.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를 맺고 끊음은 인류가 만든 거의 모든 서사의 근간이 되었다. 사직서를 내고 싶은 가장 큰 이유로도 대체로 ‘상사와의 관계’가 꼽힌다. 친구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심지어 또 다른 자아와의 관계. 우리는 그 속에 둘러싸여 관계를 맺으며 한 생 살다 떠나는 게 아닐런지.
아내의 죽음을 통한 새로운 관계
패드라 패트릭의 장편소설 『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는 기본적 관계에서 시작하는 소설이다. 주인공 아서 페퍼는 사랑하는 아내 미리엄을 저 세상으로 떠내 보낸 지 1년 된 사내이자 영국 변두리 도시의 나이든 연금생활자이다. 아내와의 관계가 그가 맺어 온 관계의 대부분이었던 이 안쓰러운 사내는 아내의 죽음 이후 1년의 시간 동안 외부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유폐시킨다. 심지어 그는 아들, 딸과의 관계조차 일정 부분 자발적으로 소원하게 만든다. 슬픔과 고독에 둘러싸여,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절대 원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삶의 질서를 만들고 이를 나름의 추념 의식으로 치른 것이다.
『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패드라 패트릭 지음, 다산책방
그런 그를 깨운 것은 아내의 유품이다. 평소 단정하고 소박한 것을 택했던 아내의 취향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팔찌가 발견되고, 거기에는 다른 대륙(인도)의 전화번호가 새겨져 있다. 집에만 머물렀던 애도의 남자 아서 페퍼가 1년 만에 세상을 두드린 첫 노크가 대륙 건너 인도가 된 것이다. 인도와의 국제전화로 시작된 아내의 과거를 향하는 그의 여행은 늘 자신과 같은 항로를 따랐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내의 인생이 사실 스펙터클한 관계의 연속이었음을 깨닫는다. 그에게 늘 손을 내밀던 이웃의 도움으로 첫 여행을 떠나, 거기에서 젊을 적 아내가 머물렀던 성에서 아내의 예전 인연들과 또 다른 관계를 맺는다. 그들에게서 힌트를 얻어 런던으로 여행을 떠나고, 대도시에서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 새로운 도시, 새로운 사람, 새로운 대화… 새로 쌓는 관계의 연쇄 속에서 이 여행은 어느새 아내의 과거가 아닌 아서 페퍼의 현재를 찾는 여행으로 보일 지경이다.
엉킨 관계를 회복하기까지
이 소설에서 가장 극적인 관계 회복을 이루는 대상은 다름 아닌 딸이다. 딸은 어머니, 그러니까 아서 페퍼의 아내인 미리엄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구태여 그때의 사정을 묻지 않았고, 굳이 그때의 상황을 변명하지 않은 둘은 대화의 연결로였던 미리엄이 빠진 채로 침묵의 강 이편과 저편에 각각 자리한다. 아서 페퍼는 딸에게 기별하지 않은 여행으로 갑자기 많은 대화를 하게 되고, 대화를 통해 마음을 열게 된다. 그에게 여행 중 만난 인연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관계에 머물지만, 그들이 남긴 대화의 여운은 딸에게 마음을 여는 데까지 그를 인도한다. 아내의 과거를 찾던 남자는 여행 속 관계를 통해 아내의 현신이라 할 수 있는 딸을 되찾게 된 것이다. 급기야 둘은 파리로 함께 미리엄의 과거를 찾는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렇게 밝혀진 미리엄의 과거는 책을 통해 확인하는 게 좋겠다.
중요한 것은 결말의 반전이나 감동, 소설적 장치가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지 않을 게 없다. 『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는 어느 남자의 로드무비이고, 여행담이다. 새로운 인연들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가장 오래되고 그래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곁의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용기를 주는 이야기이다. 아서 페퍼가 회복하는 과정은 늘 말을 걸고 그 말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출발했다. 그는 결코 죽은 아내와 말을 주고받진 못하겠지만, 죽은 아내 덕에 대화의 기술을 습득했다. 그가 딸에게 사랑한다고 겨우 말을 꺼낸 것은 아마도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말의 연습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제까지 침묵했던 사내 아서 페퍼가 그랬듯이, 아서 페퍼의 모험담을 들은 우리의 오늘이, 소설로 인해서 하나의 가능성을 얻었다.
여행하기, 말 걸기, 관계 맺기
패드라 패트릭 『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서효인
2018-02-21
인도와의 국제전화로 시작된 아내의 과거를 향하는 그의 여행은
늘 자신과 같은 항로를 따랐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내의 인생이 사실 스펙터클한 관계의 연속이었음을 깨닫는다.
그에게 늘 손을 내밀던 이웃의 도움으로 첫 여행을 떠나, 거기에서 젊을 적 아내가 머물렀던 성에서 아내의 예전 인연들과 또 다른 관계를 맺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원죄로 인해 평생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사회는 관계와 관계가 만든 거대한 연결망이고, 인간은 촘촘한 그물망을 이루는 부속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여러 문제는 궁극적으로 관계에서 비롯된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 한 인간의 성격이 형성된다는 이론은 근대적 세계관의 주요한 부분이 되었다.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를 맺고 끊음은 인류가 만든 거의 모든 서사의 근간이 되었다. 사직서를 내고 싶은 가장 큰 이유로도 대체로 ‘상사와의 관계’가 꼽힌다. 친구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심지어 또 다른 자아와의 관계. 우리는 그 속에 둘러싸여 관계를 맺으며 한 생 살다 떠나는 게 아닐런지.
아내의 죽음을 통한 새로운 관계
패드라 패트릭의 장편소설 『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는 기본적 관계에서 시작하는 소설이다. 주인공 아서 페퍼는 사랑하는 아내 미리엄을 저 세상으로 떠내 보낸 지 1년 된 사내이자 영국 변두리 도시의 나이든 연금생활자이다. 아내와의 관계가 그가 맺어 온 관계의 대부분이었던 이 안쓰러운 사내는 아내의 죽음 이후 1년의 시간 동안 외부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유폐시킨다. 심지어 그는 아들, 딸과의 관계조차 일정 부분 자발적으로 소원하게 만든다. 슬픔과 고독에 둘러싸여,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절대 원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삶의 질서를 만들고 이를 나름의 추념 의식으로 치른 것이다.
『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패드라 패트릭 지음, 다산책방
그런 그를 깨운 것은 아내의 유품이다. 평소 단정하고 소박한 것을 택했던 아내의 취향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팔찌가 발견되고, 거기에는 다른 대륙(인도)의 전화번호가 새겨져 있다. 집에만 머물렀던 애도의 남자 아서 페퍼가 1년 만에 세상을 두드린 첫 노크가 대륙 건너 인도가 된 것이다. 인도와의 국제전화로 시작된 아내의 과거를 향하는 그의 여행은 늘 자신과 같은 항로를 따랐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내의 인생이 사실 스펙터클한 관계의 연속이었음을 깨닫는다. 그에게 늘 손을 내밀던 이웃의 도움으로 첫 여행을 떠나, 거기에서 젊을 적 아내가 머물렀던 성에서 아내의 예전 인연들과 또 다른 관계를 맺는다. 그들에게서 힌트를 얻어 런던으로 여행을 떠나고, 대도시에서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 새로운 도시, 새로운 사람, 새로운 대화… 새로 쌓는 관계의 연쇄 속에서 이 여행은 어느새 아내의 과거가 아닌 아서 페퍼의 현재를 찾는 여행으로 보일 지경이다.
엉킨 관계를 회복하기까지
이 소설에서 가장 극적인 관계 회복을 이루는 대상은 다름 아닌 딸이다. 딸은 어머니, 그러니까 아서 페퍼의 아내인 미리엄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구태여 그때의 사정을 묻지 않았고, 굳이 그때의 상황을 변명하지 않은 둘은 대화의 연결로였던 미리엄이 빠진 채로 침묵의 강 이편과 저편에 각각 자리한다. 아서 페퍼는 딸에게 기별하지 않은 여행으로 갑자기 많은 대화를 하게 되고, 대화를 통해 마음을 열게 된다. 그에게 여행 중 만난 인연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관계에 머물지만, 그들이 남긴 대화의 여운은 딸에게 마음을 여는 데까지 그를 인도한다. 아내의 과거를 찾던 남자는 여행 속 관계를 통해 아내의 현신이라 할 수 있는 딸을 되찾게 된 것이다. 급기야 둘은 파리로 함께 미리엄의 과거를 찾는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렇게 밝혀진 미리엄의 과거는 책을 통해 확인하는 게 좋겠다.
중요한 것은 결말의 반전이나 감동, 소설적 장치가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좋지 않을 게 없다. 『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는 어느 남자의 로드무비이고, 여행담이다. 새로운 인연들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가장 오래되고 그래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곁의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용기를 주는 이야기이다. 아서 페퍼가 회복하는 과정은 늘 말을 걸고 그 말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출발했다. 그는 결코 죽은 아내와 말을 주고받진 못하겠지만, 죽은 아내 덕에 대화의 기술을 습득했다. 그가 딸에게 사랑한다고 겨우 말을 꺼낸 것은 아마도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말의 연습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제까지 침묵했던 사내 아서 페퍼가 그랬듯이, 아서 페퍼의 모험담을 들은 우리의 오늘이, 소설로 인해서 하나의 가능성을 얻었다.
시인, 에세이스트, 출판편집자.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했으며 2011년에는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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