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감옥’에 갇힌 동양적인 인간관
‘인간(人間)’은 글자 그대로 하면 ‘사람(人) 사이(間)’라는 뜻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인간을 언제나 혼자가 아닌 관계적 존재로 본다. 그러면서 서양의 개인은 외로운 데 반해 동양의 ‘관계 인간’은 따뜻하다고 자족한다. 정말 그럴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답게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인간 사회에서 공통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이’에 근거하지 않는 인간과 사회는 없다. 서양도 ‘관계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동양적인 인간은 관계적’이라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가 아니라, 동양적 인간에게 ‘관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동양적 인간관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관계의 인간’이다. 인간보다 관계가 우선하며, 인간이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인간을 결정한다. 이것이 동양적 인간관의 핵심이다. 이때 ‘관계’란 바로 ‘신분’이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수직적 질서 속 인간이 곧 동양적 의미에서의 인간이며, 그러므로 그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속해 있는 신분 질서상의 ‘관계’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동양적 인간관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델로 생각해야 한다. 동양만이 아니라 서양도 근대 이전에는 그러했기 때문이다. 동양적 인간관은 신분적 관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역사적 모델을 가리킨다.
동양적 인간관에서는 신분적 질서 내의 관계가 중심적이다.
‘수기치인(修己治人)-나를 닦고 남을 다스린다’. 여기에서 ‘나(己)’는 지배자이며 ‘남(人)’은 피지배자이다. ‘인(人)’은 내(己)가 아니라 ‘남(他)’이며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지배자인 군자가 먼저 능력을 갖춘 뒤에 민중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주체적인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인간의 본질과 행위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주인이 아니라 관계가 주인인 것이다.
이러한 동양적 윤리관에서는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없다. 관계가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관계만 남고 정작 나는 사라진다. 주체적 개인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인간=사람 사이’, 참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이 말의 진짜 의미는 그런 것이다. ‘인간의 관계’가 아닌 ‘관계의 인간’을 지향하는 동양적 인간관은 그래서 억압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관계의 감옥에 갇힌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신분과 장식: ‘예(禮)’와 디자인
동양적 인간관을 눈에 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예(禮)’이다. 그러니까 ‘예’란 신분질서에 기반을 둔 사회적 관계를 분절하고 가시화한 것이다. “천자는 수레 만 대, 제후는 수레 천 대, 대부는 수레 백 대...”(『맹자』 ‘양혜왕’ 편) 이것은 신분에 따른 차이를 양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이를 상징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디자인이 된다. 그래서 동양 전통사회의 디자인은 한마디로 ‘예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는 고대 중국에서 매우 이른 시기(하夏, 상商, 주周)부터 나타나지만, 공자에 의해 재정의되면서 유교의 대표적인 규칙과 약속이 되었다.
신분 사회에서 ‘예’는 핵심적인 상징의 기능을 한다. 그러한 상징을 시각화한 것이 장식이다. 장식이란 질서를 부여하는 조형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굳이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말(『The Sense of Order』)을 빌리지 않더라도, 신분 사회에서 장식이 신분 질서를 정당화해주는 기능을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장식은 신분의 조형적 대응물이자 ‘예’의 시각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 디자인’은 형식화되고 마침내 과잉된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처음에 부여되었던 상징성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질서감을 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는 그냥 놔두면 형식적인 측면으로 발전해서 끝내는 실재를 소외시켜버리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겉만 화려해질 뿐 본래의 기능은 잃게 된다. 따라서 예가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려면 늘 실재를 포섭할 수 있어야 한다." (김근 『예(禮)란 무엇인가』)
그 실재가 무엇이었든 간에, 실재감을 상실한 형식은 상징성의 위기에 처하게 되고 마침내 새로운 시대와 문화의 도전을 받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가 초래한 가장 극적인 장면을 서구의 모던 디자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구의 개인주의와 모던 디자인
서양의 근대적 인간관은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란 개인을 사회의 기본 단위로 삼는 사고방식이다. (동양에서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문중(門中)’ 또는 ‘가족’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근대는 개인들의 집합체인 사회가 개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사회를 구성한다는 생각 위에 세워진 세계이다. 개인주의는 합리주의이기도 하다. 서구의 모던 디자인은 바로 이러한 합리적 개인주의의 조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장식은 범죄다”라고 비판한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디자인한 슈타이너하우스(1910년)와 빌라 뮐러(1930년)
20세기 초에 등장하는 모던 디자인은 크게 두 가지 모습을 보이는데, 바로 ‘반장식주의(Anti-ornamentalism)’와 ‘기능주의(Functionalism)’다.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장식을 부정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논리적 결과로서 기능 중심의 디자인을 지향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는 『장식과 범죄』라는 에세이에서 ‘장식은 범죄’라고 규탄한다. 그가 보기에 장식은 야만의 상징이며 노동의 낭비였던 것이다. 물론 장식이 인류의 조형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그리 단순하게 이해하고 부정할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전투적 모더니스트들은 장식을 중세적인 귀족문화의 잔존으로 보고 퇴치하려 했다. 기능주의는 그러한 반장식주의에 더하여 현대 세계를 합리적으로 조형하고자 한 운동이었다.
물론 서양의 개인주의가 언제나 그 이념대로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때로는 뭉쳐져서 패권적 민족주의(제국주의)로 발전하기도 하고, 에리히 프롬의 지적처럼 ‘자유로부터 도피’하거나 ‘존재가 아닌 소유로서의 삶’을 추구하면서 자신을 소외시키기도 하였다. 이런 것들은 진정한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적어도 이념상으로 모던 디자인은 그러한 합리적 개인주의에 기반한 조형 운동이고자 했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모던 디자인이 본래의 취지와 달리 원자적 개인주의와 기계적 유물론에 빠져서 반인간적으로 흘러갔던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에 대한 반성에서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던 디자인이 출현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이런 부분은 분명 직시해야겠지만, 우리로서는 모던 디자인이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와 합리주의의 조형적 결과물임을 깊이 이해하고, 거기에 비추어 우리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물론 디자인은 어떤 식으로든 상징성을 벗어날 수 없다. 다만 그 상징성은 결국 사회라는 그릇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전통은 비판적으로 재해석될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맹목적인 전통 숭배는 이데올로기이며 전통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감옥이 될 수밖에 없다. 전통에 대한 급진적인 재해석이 필요한 이유이다.
디자인 평론가.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등 여러 권의 평론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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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신분과 장식: ‘관계의 감옥’과 ‘예(禮)’ 디자인 비판
전통에 대한 급진적 재해석을 위하여
최범
2018-02-06
‘관계의 감옥’에 갇힌 동양적인 인간관
‘인간(人間)’은 글자 그대로 하면 ‘사람(人) 사이(間)’라는 뜻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인간을 언제나 혼자가 아닌 관계적 존재로 본다. 그러면서 서양의 개인은 외로운 데 반해 동양의 ‘관계 인간’은 따뜻하다고 자족한다. 정말 그럴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답게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인간 사회에서 공통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이’에 근거하지 않는 인간과 사회는 없다. 서양도 ‘관계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동양적인 인간은 관계적’이라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가 아니라, 동양적 인간에게 ‘관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동양적 인간관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관계의 인간’이다. 인간보다 관계가 우선하며, 인간이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인간을 결정한다. 이것이 동양적 인간관의 핵심이다. 이때 ‘관계’란 바로 ‘신분’이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수직적 질서 속 인간이 곧 동양적 의미에서의 인간이며, 그러므로 그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속해 있는 신분 질서상의 ‘관계’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동양적 인간관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델로 생각해야 한다. 동양만이 아니라 서양도 근대 이전에는 그러했기 때문이다. 동양적 인간관은 신분적 관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역사적 모델을 가리킨다.
‘수기치인(修己治人)-나를 닦고 남을 다스린다’. 여기에서 ‘나(己)’는 지배자이며 ‘남(人)’은 피지배자이다. ‘인(人)’은 내(己)가 아니라 ‘남(他)’이며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지배자인 군자가 먼저 능력을 갖춘 뒤에 민중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주체적인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인간의 본질과 행위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주인이 아니라 관계가 주인인 것이다.
이러한 동양적 윤리관에서는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없다. 관계가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관계만 남고 정작 나는 사라진다. 주체적 개인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인간=사람 사이’, 참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이 말의 진짜 의미는 그런 것이다. ‘인간의 관계’가 아닌 ‘관계의 인간’을 지향하는 동양적 인간관은 그래서 억압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관계의 감옥에 갇힌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신분과 장식: ‘예(禮)’와 디자인
동양적 인간관을 눈에 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예(禮)’이다. 그러니까 ‘예’란 신분질서에 기반을 둔 사회적 관계를 분절하고 가시화한 것이다. “천자는 수레 만 대, 제후는 수레 천 대, 대부는 수레 백 대...”(『맹자』 ‘양혜왕’ 편) 이것은 신분에 따른 차이를 양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이를 상징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디자인이 된다. 그래서 동양 전통사회의 디자인은 한마디로 ‘예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는 고대 중국에서 매우 이른 시기(하夏, 상商, 주周)부터 나타나지만, 공자에 의해 재정의되면서 유교의 대표적인 규칙과 약속이 되었다.
중국 진시황의 마차(©Tomasz Sienicki)와 고대 동양에서 황제와 왕을 상징했던 용 문양이 그려진 조선 초기 용보(©Shyoon1). 황제의 의복과 수레 등은 모두 상징적인 의미로 가득 찬 하나의 기호학적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신분 사회에서 ‘예’는 핵심적인 상징의 기능을 한다. 그러한 상징을 시각화한 것이 장식이다. 장식이란 질서를 부여하는 조형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굳이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말(『The Sense of Order』)을 빌리지 않더라도, 신분 사회에서 장식이 신분 질서를 정당화해주는 기능을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장식은 신분의 조형적 대응물이자 ‘예’의 시각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 디자인’은 형식화되고 마침내 과잉된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처음에 부여되었던 상징성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질서감을 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는 그냥 놔두면 형식적인 측면으로 발전해서 끝내는 실재를 소외시켜버리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겉만 화려해질 뿐 본래의 기능은 잃게 된다. 따라서 예가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려면 늘 실재를 포섭할 수 있어야 한다." (김근 『예(禮)란 무엇인가』)
그 실재가 무엇이었든 간에, 실재감을 상실한 형식은 상징성의 위기에 처하게 되고 마침내 새로운 시대와 문화의 도전을 받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가 초래한 가장 극적인 장면을 서구의 모던 디자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구의 개인주의와 모던 디자인
서양의 근대적 인간관은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란 개인을 사회의 기본 단위로 삼는 사고방식이다. (동양에서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문중(門中)’ 또는 ‘가족’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근대는 개인들의 집합체인 사회가 개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사회를 구성한다는 생각 위에 세워진 세계이다. 개인주의는 합리주의이기도 하다. 서구의 모던 디자인은 바로 이러한 합리적 개인주의의 조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장식은 범죄다”라고 비판한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디자인한 슈타이너하우스(1910년)와 빌라 뮐러(1930년)
20세기 초에 등장하는 모던 디자인은 크게 두 가지 모습을 보이는데, 바로 ‘반장식주의(Anti-ornamentalism)’와 ‘기능주의(Functionalism)’다.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장식을 부정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논리적 결과로서 기능 중심의 디자인을 지향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는 『장식과 범죄』라는 에세이에서 ‘장식은 범죄’라고 규탄한다. 그가 보기에 장식은 야만의 상징이며 노동의 낭비였던 것이다. 물론 장식이 인류의 조형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그리 단순하게 이해하고 부정할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전투적 모더니스트들은 장식을 중세적인 귀족문화의 잔존으로 보고 퇴치하려 했다. 기능주의는 그러한 반장식주의에 더하여 현대 세계를 합리적으로 조형하고자 한 운동이었다.
물론 서양의 개인주의가 언제나 그 이념대로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때로는 뭉쳐져서 패권적 민족주의(제국주의)로 발전하기도 하고, 에리히 프롬의 지적처럼 ‘자유로부터 도피’하거나 ‘존재가 아닌 소유로서의 삶’을 추구하면서 자신을 소외시키기도 하였다. 이런 것들은 진정한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적어도 이념상으로 모던 디자인은 그러한 합리적 개인주의에 기반한 조형 운동이고자 했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모던 디자인이 본래의 취지와 달리 원자적 개인주의와 기계적 유물론에 빠져서 반인간적으로 흘러갔던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에 대한 반성에서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던 디자인이 출현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이런 부분은 분명 직시해야겠지만, 우리로서는 모던 디자인이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와 합리주의의 조형적 결과물임을 깊이 이해하고, 거기에 비추어 우리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물론 디자인은 어떤 식으로든 상징성을 벗어날 수 없다. 다만 그 상징성은 결국 사회라는 그릇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전통은 비판적으로 재해석될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맹목적인 전통 숭배는 이데올로기이며 전통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감옥이 될 수밖에 없다. 전통에 대한 급진적인 재해석이 필요한 이유이다.
디자인 평론가.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등 여러 권의 평론집을 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관계]신분과 장식: ‘관계의 감옥’과 ‘예(禮)’ 디자인 비판'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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