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에 대하여
노르웨이의 시인 울라브 하우게는 '고독의 산 뒤편에서'라는 아름다운 시에서 고독의 정체를 이렇게 관찰한다. “고독은 달콤하다─ / 다른 사람들에게 / 돌아가는 길이 / 열린 동안은, / 너 자신만을 위해 / 네가 빛나는 건 아니다.” 황정아는 이 시의 ‘고독’을 ‘외로움’으로 번역한다. “외로움은 달콤하다.” 그럴까? 외로움은 정말 달콤할까? 혹은 외로움과 고독은 같은 것일까? 노르웨이의 철학자 라르스 스벤젠은 고독을 외로움과 구별하면서, 혹은 고독을 여하간 특별한 종류의 외로움으로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외로움은 필연적으로 고통이나 불편의 느낌을 포함한다.” 그가 보기에 외로움은 부정적 감정이다. 반면에 고독은 오늘날 소멸하고 있는 능력이다.
좀처럼 고독이 보장되지 않는 시대, 전화 대화, 문자 메시지, 트위터, 페이스북, 스카이프의 시대,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카카오톡으로 친구를 추가할 수 있는 시대, 즉 고독이 존재했을 수도 있는 공간을 사회성으로 채우는 쪽을 선택하는 시대에 스벤젠은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과도한 외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적은 고독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독은 무엇이며, 외로움은 또 무엇일까? 그리고 고독은 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길이 열린 동안’ 달콤한 것일까? 질문들이 탐험의 길을 열어놓았으므로, 좀 더 깊이 탐험하기로 하자. 가보지 않은 곳까지.
자기 자신과의 대화
한나 아렌트는 소크라테스에게서 고독을 보았다. 소크라테스의 잘 알려진 기벽 중 하나는 길을 가다 갑자기 멈추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고독의 시간이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때 그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 대화를 시작한다. 고독의 시간에 찾아오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 나 스스로와 친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시험대에 오르는 이 대화를 아렌트는 ‘생각하기’라고 부른다.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 속에 둘이 형성되고, 하나인 내가 그 속에서 둘로 분열되고, 나 자신을 대면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나는 나 자신과 관계를 맺는다.
홀로 있는 시간이 고독에 유리할 수는 있다. 하지만 홀로 있다고 해도 고독이 저절로 찾아오는 건 아니다. “외로움은 내가 하나 속 둘로 분열될 줄 모르면서, 나 자신 곁에 있을 줄 모르면서, 홀로 있을 때 생긴다”라는 아렌트의 말처럼, 외로운 사람은 단지 홀로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인생의 동반자로 삼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외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을 동반자로 삼는다는 것, 즉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하기’에는 엄격한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일치, 즉 일관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나는 자신의 친구일 수 있다. 역으로 자기 자신과 모순되는 것은 자신의 적이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과 적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느니 차라리 세상과 불일치하는 게 낫다고 말했던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은 피해갈 수 있는 타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와 같은 집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바로 그 한 지붕 밑 동료와 같이 지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 아렌트는 그 능력을 바로 '생각하기'라고 불렀다.
관계 속에서의 달콤한 고독
외로운 사람은 ‘생각하기’와 고독의 시간을 회피하는 사람이다. 즉, 외로움은 고독의 회피다. 그것을 피하고자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려고 하며, 홀로 있을 때는 오락에 몰입한다. 알다시피 오늘날 그 소통과 오락의 도구는 하나로 통일되었으며,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그 도구를 스마트하다고 부른다. 고독은 어쩌면 현대 사회가 선사한 새로운 관계적 자원일지도 모른다. 영국의 사회학자 기든스는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온갖 외적인 전통이 해체된 오늘날 부상하고 있는 관계를 '순수한 관계'라고 불렀다. “순수한 관계란 외적 기준들이 해소된 관계다.” 어쩌면 고독을 장착한 인간이야말로 이 순수한 관계를 향유할 역량이 있는 인간 아닐까?
하지만 고독은 손쉽게 장착되지 않았다. 고독과 사회 사이에서 언제까지나 갈등하고 동요했던 루소의 인생이 이를 잘 보여준다. 루소의 책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이 세상에 나는 혼자다. 더 이상 형제도, 가까운 사람도, 친구도, 사람들과의 교제도 없고, 오직 나 자신뿐이다.” 그는 언제나 사회와 교제를 원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생각하는 인간이었고, 고독했다.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생각하는 인간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광장에 나가 친구들과 교제하는 것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을까? 그는 당대에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대화법을 끌어들였다. 화려한 수사학의 시대, 말의 전쟁의 시대에 그는 문답법을 도입했다. 그로 인해 목숨을 잃어야 했지만 말이다.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말의 전쟁의 시대에, 새로운 대화법을 찾는 고독한 자들은 목숨을 걸어야 할까? 하지만 하우게의 시가 말하듯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길이 열린 동안” 고독이 달콤한 것이라면, 적어도 우리는 루소처럼 너무 자주 문을 걸어 잠그지는 말아야 한다. 외로운 사람은 창문 앞에 서 있다. 고독한 사람은 친구에게 “잠깐”이라고 말하고, 잠시 문을 닫는다. 그때 고독은 달콤하다.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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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달콤함
철학자들을 통해 바라본 고독의 정체
이성민
2018-02-01
한나 아렌트는 소크라테스에게서 고독을 보았다.
소크라테스의 잘 알려진 기벽 중 하나는 길을 가다 갑자기 멈추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고독의 시간이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때 그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 대화를 시작한다.
고독에 대하여
노르웨이의 시인 울라브 하우게는 '고독의 산 뒤편에서'라는 아름다운 시에서 고독의 정체를 이렇게 관찰한다. “고독은 달콤하다─ / 다른 사람들에게 / 돌아가는 길이 / 열린 동안은, / 너 자신만을 위해 / 네가 빛나는 건 아니다.” 황정아는 이 시의 ‘고독’을 ‘외로움’으로 번역한다. “외로움은 달콤하다.” 그럴까? 외로움은 정말 달콤할까? 혹은 외로움과 고독은 같은 것일까? 노르웨이의 철학자 라르스 스벤젠은 고독을 외로움과 구별하면서, 혹은 고독을 여하간 특별한 종류의 외로움으로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외로움은 필연적으로 고통이나 불편의 느낌을 포함한다.” 그가 보기에 외로움은 부정적 감정이다. 반면에 고독은 오늘날 소멸하고 있는 능력이다.
좀처럼 고독이 보장되지 않는 시대, 전화 대화, 문자 메시지, 트위터, 페이스북, 스카이프의 시대,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카카오톡으로 친구를 추가할 수 있는 시대, 즉 고독이 존재했을 수도 있는 공간을 사회성으로 채우는 쪽을 선택하는 시대에 스벤젠은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과도한 외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적은 고독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독은 무엇이며, 외로움은 또 무엇일까? 그리고 고독은 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길이 열린 동안’ 달콤한 것일까? 질문들이 탐험의 길을 열어놓았으므로, 좀 더 깊이 탐험하기로 하자. 가보지 않은 곳까지.
자기 자신과의 대화
한나 아렌트는 소크라테스에게서 고독을 보았다. 소크라테스의 잘 알려진 기벽 중 하나는 길을 가다 갑자기 멈추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고독의 시간이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때 그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 대화를 시작한다. 고독의 시간에 찾아오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 나 스스로와 친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시험대에 오르는 이 대화를 아렌트는 ‘생각하기’라고 부른다.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 속에 둘이 형성되고, 하나인 내가 그 속에서 둘로 분열되고, 나 자신을 대면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나는 나 자신과 관계를 맺는다.
홀로 있는 시간이 고독에 유리할 수는 있다. 하지만 홀로 있다고 해도 고독이 저절로 찾아오는 건 아니다. “외로움은 내가 하나 속 둘로 분열될 줄 모르면서, 나 자신 곁에 있을 줄 모르면서, 홀로 있을 때 생긴다”라는 아렌트의 말처럼, 외로운 사람은 단지 홀로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인생의 동반자로 삼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외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을 동반자로 삼는다는 것, 즉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하기’에는 엄격한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일치, 즉 일관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나는 자신의 친구일 수 있다. 역으로 자기 자신과 모순되는 것은 자신의 적이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과 적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느니 차라리 세상과 불일치하는 게 낫다고 말했던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은 피해갈 수 있는 타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와 같은 집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바로 그 한 지붕 밑 동료와 같이 지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 아렌트는 그 능력을 바로 '생각하기'라고 불렀다.
관계 속에서의 달콤한 고독
외로운 사람은 ‘생각하기’와 고독의 시간을 회피하는 사람이다. 즉, 외로움은 고독의 회피다. 그것을 피하고자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려고 하며, 홀로 있을 때는 오락에 몰입한다. 알다시피 오늘날 그 소통과 오락의 도구는 하나로 통일되었으며,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그 도구를 스마트하다고 부른다. 고독은 어쩌면 현대 사회가 선사한 새로운 관계적 자원일지도 모른다. 영국의 사회학자 기든스는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온갖 외적인 전통이 해체된 오늘날 부상하고 있는 관계를 '순수한 관계'라고 불렀다. “순수한 관계란 외적 기준들이 해소된 관계다.” 어쩌면 고독을 장착한 인간이야말로 이 순수한 관계를 향유할 역량이 있는 인간 아닐까?
하지만 고독은 손쉽게 장착되지 않았다. 고독과 사회 사이에서 언제까지나 갈등하고 동요했던 루소의 인생이 이를 잘 보여준다. 루소의 책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이 세상에 나는 혼자다. 더 이상 형제도, 가까운 사람도, 친구도, 사람들과의 교제도 없고, 오직 나 자신뿐이다.” 그는 언제나 사회와 교제를 원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생각하는 인간이었고, 고독했다.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생각하는 인간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광장에 나가 친구들과 교제하는 것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을까? 그는 당대에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대화법을 끌어들였다. 화려한 수사학의 시대, 말의 전쟁의 시대에 그는 문답법을 도입했다. 그로 인해 목숨을 잃어야 했지만 말이다.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말의 전쟁의 시대에, 새로운 대화법을 찾는 고독한 자들은 목숨을 걸어야 할까? 하지만 하우게의 시가 말하듯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길이 열린 동안” 고독이 달콤한 것이라면, 적어도 우리는 루소처럼 너무 자주 문을 걸어 잠그지는 말아야 한다. 외로운 사람은 창문 앞에 서 있다. 고독한 사람은 친구에게 “잠깐”이라고 말하고, 잠시 문을 닫는다. 그때 고독은 달콤하다.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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