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의 긴장관계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태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도움은커녕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이다. 우리는 지구에 갖은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고, 생존과는 상관없이 멋을 위한 옷을 입는다. 에너지가 될 만한 것은 기를 쓰고 찾아 태워버린다. 인간의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생태계가 죽어가는 속도는 빨라진다. 기껏해야 수만 년 지구에 발붙인 인간에 의해 수백만 년 동안 이어져 온 생태계가, 다시 말해 인간을 둘러싼 자연이 사라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결국 남는 것은 콘크리트와 플라스틱, 핵폐기물과 미세먼지 따위가 전부일지도 모른다.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상상은 그다지 새롭거나 놀라운 것은 아니다. 문학을 포함하여 ‘사이버 펑크’라 불리는 잿빛 도시의 이미지는 미래에 대한 상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인간의 상상은 늘 현실이 되어 왔다. 공기가 좋지 않아 야외활동을 줄이고, 출퇴근 시에는 마스크를 써야 하는 세상이 온 것처럼. 그 무엇도 인간 앞에 불가능이란 없다.
이토록 뻔뻔한 범죄자에 불과한 인류가 자연에 대한 경외와 존중, 사랑과 천착을 주제로 한 문학을 쓰고 읽는 것은 일견 이율배반적으로 보인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애썼고, 이에 맞서 자연은 인간에게 쉽게 지배되지 않는 강건함을 오래도록 보여주었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문학의 주요한 화두가 되어 왔다. 자연을 향한 도전 정신 혹은 생태계보다는 인간의 편의를 우위에 두는 이기심을 인간에게서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모든 인간이 채식주의를 선언하고, 모든 토목 건설을 중단하며, 유전자 변형 연구를 중지할 수 있을까? 아니, 인간은 그냥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조금이나마 속도를 늦출 수는 있을지언정, 완전히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지구가 멸망하면 그때서야 멈출 것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자연은 그런 존재를 아직은 감당해 내고 있다. 어쩌다 생태계의 가장 윗자리를 차지해 버린 영악하고 포악하고 잔인한 생명체를, 자연은 끝내 어떻게 처리하려는 것일까.
『여덟 개의 산』 파울로 코녜티 지음, 현대문학
산에 기대는 삶
『여덟 개의 산』은 인간보다는 산이 주인공인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은 산 아래에서 각자의 인생을 산다. 그들의 운명은 산 밑에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삶은 자연, 생태계와 친밀하고도 적대적인 관계를 맺는다. 1인칭 화자이자 주인공 중 한 명인 ‘나’, 산을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무뚝뚝한 나의 ‘아버지’, 그리고 산이 맺어준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아버지에게 아들 노릇을 대신했던 ‘브루노’. 그들은 산을 사랑하며 산과 대결한다. 그들의 분투는 자연에 도전하는 동시에 자연에게 위로받는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권위적인 아버지를 따라 알프스의 산들을 함께 오른다. 정해지지 않은 곳에서 쉬거나 불규칙적으로 걷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아버지는 산을 오름으로써 일상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아버지의 완강함은 나에게 있어 일종의 반항심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아버지와 멀어지고, 그 관계를 대체하는 것은 그들 가족이 여름마다 머물렀던 산 아랫마을의 유일한 이웃집의 꼬마, 브루노다.
이 소설의 주인공을 딱 하나 꼽으라면 단연 브루노의 이름을 대야만 할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둘을 꼽으라면 브루노와 알프스다. 화자인 나는 브루노와 알프스를 말하기 위한 장치로 느껴진다. 화자와 아버지와의 갈등은 브루노라는 인물에게 입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플롯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이는 물론 소설 속 한 인물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생긴 과도한 해석이겠지만, 자신을 ‘산 사람’이라 칭하며 산에서의 일상을 영위하는 브루노는 그만큼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이가 죽자, 그의 아들을 위한 집을 짓는데 전력을 다한다. 알프스 아래에 대피소처럼 집을 짓고, 그 아래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농장을 일군다. 옛날 방식으로 소젖을 짜고, 그것으로 치즈를 만든다. 알프스에서의 그러한 삶은 무척이나 낭만적일 것만 같지만, 현실에서 브루노는 농장을 인수하느라 생긴 은행 빚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늘어나지 않는 소득에 그로기 상태가 된다. 산과 함께 살겠다는 그의 꿈은 산사태나 눈사태, 홍수나 지진이 아닌 다른 현실에 의해 무릎 꿇게 되는 것이다. 브루노의 좌절은 자연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태계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
인간은 명백히 자연을 해치고 있으며 생태계에 큰 위협이 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그저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려 애쓴다. 자연에 있어 산사태와 눈사태, 지진과 화산폭발은 자연의 순리일 따름이다. 오히려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방해하는 것은 인간의 파괴적 행위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갖가지 기상이변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브루노는 인간의 생태계에 고난받고, 자연의 생태계에 다시 몸을 맡긴다. 그것은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오르거나 산의 정상에 올라 국기를 꽂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의 최후가 어찌 되었건, 결국 가장 행복했던 것은 역시 브루노가 아니었을까. 호락호락하지 않은 자연 앞에서 한 명의 인간은 작은 존재다. 알프스의 벽돌공 브루노는 그렇게 생태계의 일부가, 그가 미친 듯이 사랑하고 의지했던 산이 되었다. 진짜 ‘산 사람’이 된 것이다. 인간은 결국 죽음으로써 생태계 일부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그전에 우리가 자연에 할 수 있는 일은 큰 죄를 짓거나, 작은 죄를 짓거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일일 것이다. 되도록이면 산 사람에 가까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생태계]산 사람 되기
파울로 코녜티 『여덟 개의 산』
서효인
2018-01-16
자연과 인간의 긴장관계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태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도움은커녕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이다. 우리는 지구에 갖은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고, 생존과는 상관없이 멋을 위한 옷을 입는다. 에너지가 될 만한 것은 기를 쓰고 찾아 태워버린다. 인간의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생태계가 죽어가는 속도는 빨라진다. 기껏해야 수만 년 지구에 발붙인 인간에 의해 수백만 년 동안 이어져 온 생태계가, 다시 말해 인간을 둘러싼 자연이 사라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결국 남는 것은 콘크리트와 플라스틱, 핵폐기물과 미세먼지 따위가 전부일지도 모른다.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상상은 그다지 새롭거나 놀라운 것은 아니다. 문학을 포함하여 ‘사이버 펑크’라 불리는 잿빛 도시의 이미지는 미래에 대한 상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인간의 상상은 늘 현실이 되어 왔다. 공기가 좋지 않아 야외활동을 줄이고, 출퇴근 시에는 마스크를 써야 하는 세상이 온 것처럼. 그 무엇도 인간 앞에 불가능이란 없다.
이토록 뻔뻔한 범죄자에 불과한 인류가 자연에 대한 경외와 존중, 사랑과 천착을 주제로 한 문학을 쓰고 읽는 것은 일견 이율배반적으로 보인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애썼고, 이에 맞서 자연은 인간에게 쉽게 지배되지 않는 강건함을 오래도록 보여주었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문학의 주요한 화두가 되어 왔다. 자연을 향한 도전 정신 혹은 생태계보다는 인간의 편의를 우위에 두는 이기심을 인간에게서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모든 인간이 채식주의를 선언하고, 모든 토목 건설을 중단하며, 유전자 변형 연구를 중지할 수 있을까? 아니, 인간은 그냥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조금이나마 속도를 늦출 수는 있을지언정, 완전히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지구가 멸망하면 그때서야 멈출 것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자연은 그런 존재를 아직은 감당해 내고 있다. 어쩌다 생태계의 가장 윗자리를 차지해 버린 영악하고 포악하고 잔인한 생명체를, 자연은 끝내 어떻게 처리하려는 것일까.
산에 기대는 삶
『여덟 개의 산』은 인간보다는 산이 주인공인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은 산 아래에서 각자의 인생을 산다. 그들의 운명은 산 밑에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삶은 자연, 생태계와 친밀하고도 적대적인 관계를 맺는다. 1인칭 화자이자 주인공 중 한 명인 ‘나’, 산을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무뚝뚝한 나의 ‘아버지’, 그리고 산이 맺어준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아버지에게 아들 노릇을 대신했던 ‘브루노’. 그들은 산을 사랑하며 산과 대결한다. 그들의 분투는 자연에 도전하는 동시에 자연에게 위로받는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권위적인 아버지를 따라 알프스의 산들을 함께 오른다. 정해지지 않은 곳에서 쉬거나 불규칙적으로 걷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아버지는 산을 오름으로써 일상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아버지의 완강함은 나에게 있어 일종의 반항심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아버지와 멀어지고, 그 관계를 대체하는 것은 그들 가족이 여름마다 머물렀던 산 아랫마을의 유일한 이웃집의 꼬마, 브루노다.
이 소설의 주인공을 딱 하나 꼽으라면 단연 브루노의 이름을 대야만 할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둘을 꼽으라면 브루노와 알프스다. 화자인 나는 브루노와 알프스를 말하기 위한 장치로 느껴진다. 화자와 아버지와의 갈등은 브루노라는 인물에게 입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플롯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이는 물론 소설 속 한 인물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생긴 과도한 해석이겠지만, 자신을 ‘산 사람’이라 칭하며 산에서의 일상을 영위하는 브루노는 그만큼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이가 죽자, 그의 아들을 위한 집을 짓는데 전력을 다한다. 알프스 아래에 대피소처럼 집을 짓고, 그 아래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농장을 일군다. 옛날 방식으로 소젖을 짜고, 그것으로 치즈를 만든다. 알프스에서의 그러한 삶은 무척이나 낭만적일 것만 같지만, 현실에서 브루노는 농장을 인수하느라 생긴 은행 빚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늘어나지 않는 소득에 그로기 상태가 된다. 산과 함께 살겠다는 그의 꿈은 산사태나 눈사태, 홍수나 지진이 아닌 다른 현실에 의해 무릎 꿇게 되는 것이다. 브루노의 좌절은 자연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태계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
인간은 명백히 자연을 해치고 있으며 생태계에 큰 위협이 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그저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려 애쓴다. 자연에 있어 산사태와 눈사태, 지진과 화산폭발은 자연의 순리일 따름이다. 오히려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방해하는 것은 인간의 파괴적 행위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갖가지 기상이변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브루노는 인간의 생태계에 고난받고, 자연의 생태계에 다시 몸을 맡긴다. 그것은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오르거나 산의 정상에 올라 국기를 꽂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의 최후가 어찌 되었건, 결국 가장 행복했던 것은 역시 브루노가 아니었을까. 호락호락하지 않은 자연 앞에서 한 명의 인간은 작은 존재다. 알프스의 벽돌공 브루노는 그렇게 생태계의 일부가, 그가 미친 듯이 사랑하고 의지했던 산이 되었다. 진짜 ‘산 사람’이 된 것이다. 인간은 결국 죽음으로써 생태계 일부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그전에 우리가 자연에 할 수 있는 일은 큰 죄를 짓거나, 작은 죄를 짓거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일일 것이다. 되도록이면 산 사람에 가까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시인, 에세이스트, 출판편집자.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했으며 2011년에는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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