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죽음 뒤편
조선의 21대 임금 영조에게는 두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다. 첫 번째는 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다. 그녀는 무수리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궁녀는 반드시 처녀여야 했으나 무수리는 처녀가 아니어도 궁궐에 출입할 수 있기에 영조는 왕의 씨가 아니라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또 하나의 콤플렉스는 경종 독살설이다. 영조의 배다른 형인 경종은 선천적으로 몸이 안좋았는데, 병이 든 상황에서 게장과 감을 먹은 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일이 있었다. 이를 고치기 위해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처방했으나 경종은 결국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숨지게 된다. 이 때문에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 중심으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는데, 이 소문으로 인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는 등 정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즉 영조는 정통성 면에서 지극히 취약한 임금이었고 왕권을 다지기 전까지는 처신을 조심히 할 필요가 있었다. 타고난 학구열과 정치적 카리스마로 정국을 안정시킨 뒤에도 영조의 태도는 변함이 없어 한결같이 빈틈없는 모습을 보이며 완벽을 기했다.
이러한 태도는 아들인 사도세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다. 그렇다면 사도세자는 왜 그리 참혹하게 죽어야 했을까? 과거 매체에서는 사도세자가 당쟁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었다는 시각이 주로 다루어졌으나 여러 기록을 비교해본다면 그의 죽음이 억울하다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영조가 사도세자의 묘지문에 직접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한둘이오만, 세자 시절에 이와 같다는 자의 이야기는 내 아직 듣지 못했느니라”라고 밝힌 것처럼 사도세자의 광증과 폭력성은 기록 곳곳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비극의 1차적 원인이 세자에게 있던 게 아니란 점이다. 진짜 원인은 아버지 영조였다. 세자의 자존감을 억누르는 그의 교육열이 세자의 광증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사도의 재능, 무너지는 자존감
사도세자의 광증은 결코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 시절의 사도세자는 다른 어떤 세자보다 영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태어난 지 6달 만에 영조의 부름에 대답하고 동서남북을 분간했으며, 2살 때에는 본격적으로 한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3살 때 있던 일화는 그가 단순히 머리만 좋은 것에 그치지 않음을 말해준다. 천자문을 배우던 중 '사치'라는 단어를 접하는데, 이를 본 세자는 자신이 입은 옷을 가리키며 “이것이 사치라”고 말했다 전해진다. 나인들이 신기해 하여 비단과 무명을 놓고 어떤 게 사치냐 물어보니 세자는 비단은 사치고 무명은 사치가 아니라 말하며 무명으로 옷을 지어 입는 게 좋다고 답한다. 3살 아이의 입에서 이런 답변이 나왔다는 건 분명 놀라운 일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을 그린 영화 <사도>와 드라마 <비밀의 문>
장남인 효장세자가 어린 나이에 요절한 후 늦은 나이에 본 둘째 아들이 이처럼 총명하니 영조 또한 그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다. 직접 밤을 새워가며 세자가 볼 책을 필사하고 어전에서는 틈틈이 세자 자랑을 했으며, 가끔은 직접 세자를 자리에 앉혀놓고 글을 쓰게 해 그 글을 신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아마도 이 시기가 사도세자의 삶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부자 간의 훈훈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학구열이 남달랐던 영조에게는 이 정도의 총명함도 부족했는지 세자가 4살이 되는 해부터 점점 혼을 내는 일이 늘어간다. 문제는 질타의 근거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였다는 점이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문제와 무제(武帝)는 누가 더 훌륭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가 훌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나를 속이는 것이다. 너의 마음은 반드시 무제를 통쾌하게 여길 것인데, 어찌하여 문제를 훌륭하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경제(景帝)의 정치가 무제보다 훌륭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앞으로 문제•경제의 반 정도만으로 나를 섬겨도 족하다. 내가 매양 한나라 무제로 너를 경계했는데, 너의 시 가운데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는 글귀가 있어 기(氣)가 크게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조실록』 영조 24년(1748) 5월 19일
세자는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말했을 뿐이지만 영조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세자가 거짓말을 한다고 여기며 질책하고 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아들은 아버지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게 되고, 아버지는 이런 모습에 불만을 가져 더 큰 압박을 주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급기야 사도세자는 아버지가 나타나면 구석에서 벌벌 떠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영조의 압박은 공적인 자리에서도 이어졌다. 영조는 정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세자가 임금 대신 정무를 보는 대리청정을 지시하곤 했는데, 말만 대리청정이었을 뿐 사도세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다던 영조가 사도세자의 결정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자신이 원하는 결정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책임은 세자의 몫이었다.
심하게는 나라에 가뭄이 든 것도 세자의 덕이 부족해서라고 욕할 정도였다. 보다 못한 신하들이 관용을 베풀어달라 청하기도 했으나 영조는 막무가내였고, 오히려 사도세자의 생일 때마다 대신들 앞에서 흉을 보는 등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끊임없이 공부를 강요당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비난이 쏟아지는 상황. 사도세자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이런 상황을 극복할 방안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밤낮으로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나날이 이어지며 사도세자의 자존감은 극도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파탄 난 부자관계는 결코 봉합될 수 없었고 자살소동을 벌이길 수차례, 결국 그는 미쳐버린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옷 입기를 두려워하는 의대증에 걸렸다고 한다. 의관을 갖추면 아버지를 뵈러 가야 한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때문에 옷 한 벌을 입으려면 10~30벌을 지어 올려야 했다. 맘에 들지 않는 옷을 모두 찢거나 불살라버렸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병이 발작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살인이었다. 사도세자는 칼을 차고 다니며 궁궐의 궁녀를 강간하거나 내시를 살해하곤 했다. 1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도세자의 손에 죽었다고 하는데 많게는 하루에 6명이 그의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다. 가끔은 자신이 죽인 자의 목을 베어 들고 다니면서 다른 궁인에게 자랑처럼 보여주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정신이 들고 난 뒤에는 후회를 반복했다. 전형적인 양극성장애의 모습이다.
사도세자의 일탈 행동은 영조에 의해 억눌린 자존감이 비정상적으로 발현된 결과로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 외에는 허락된 것이 없었고 대리청정기에는 끊임없이 비난 받는 등 그의 삶은 아버지 영조의 존재 안에서만 규정되어 왔다. 세자의 신분으로서 궁궐을 떠나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아버지의 의도와는 무관한 가장 극단적 행위로 자신의 부족한 자존감을 채우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의 살인 행각은 오랜 기간 지속되다 자신의 후궁인 경빈 박씨까지 때려 죽이고 나서야 영조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살인 외의 비행까지 낱낱이 고발되니 더 이상 세자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결국 영조는 세자를 폐하고 뒤주에 넣는다. 세자의 나이 27세였다.
사도세자와 부인 헌경왕후 홍씨를 합장한 융릉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스승에게 다음과 같이 물은 적이 있다. “군자가 자기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맹자는 답했다. “가르치는 사람은 반드시 바르게 하라고 가르친다. 바르게 하라고 가르쳐도 그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노여움이 따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부자 간의 이치가 상하게 된다.”
『맹자』에 수록된 이 대화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왜 파국으로 치달았는지를 알려준다. 영조라고 사도세자가 미웠을 리는 없다. 그저 아들이 잘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선천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탕평을 통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자신처럼 세자가 성장하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존감을 짓밟는 영조의 교육은 결코 정답이 아니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기질적으로도, 성장 배경도 달랐다. 그러나 영조는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고 사도세자의 무너진 자존감은 일탈로써 채워져 결국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아버지 영조, 세자 사도'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영조, 세자 사도
사도세자의 무너진 자존감과 죽음
박문국
2017-12-12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스승에게 다음과 같이 물은 적이 있다.
“군자가 자기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맹자는 답했다.
“가르치는 사람은 반드시 바르게 하라고 가르친다.
바르게 하라고 가르쳐도 그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노여움이 따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부자 간의 이치가 상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죽음 뒤편
조선의 21대 임금 영조에게는 두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다. 첫 번째는 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다. 그녀는 무수리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궁녀는 반드시 처녀여야 했으나 무수리는 처녀가 아니어도 궁궐에 출입할 수 있기에 영조는 왕의 씨가 아니라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또 하나의 콤플렉스는 경종 독살설이다. 영조의 배다른 형인 경종은 선천적으로 몸이 안좋았는데, 병이 든 상황에서 게장과 감을 먹은 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일이 있었다. 이를 고치기 위해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처방했으나 경종은 결국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숨지게 된다. 이 때문에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 중심으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는데, 이 소문으로 인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는 등 정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즉 영조는 정통성 면에서 지극히 취약한 임금이었고 왕권을 다지기 전까지는 처신을 조심히 할 필요가 있었다. 타고난 학구열과 정치적 카리스마로 정국을 안정시킨 뒤에도 영조의 태도는 변함이 없어 한결같이 빈틈없는 모습을 보이며 완벽을 기했다.
이러한 태도는 아들인 사도세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다. 그렇다면 사도세자는 왜 그리 참혹하게 죽어야 했을까? 과거 매체에서는 사도세자가 당쟁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었다는 시각이 주로 다루어졌으나 여러 기록을 비교해본다면 그의 죽음이 억울하다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영조가 사도세자의 묘지문에 직접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한둘이오만, 세자 시절에 이와 같다는 자의 이야기는 내 아직 듣지 못했느니라”라고 밝힌 것처럼 사도세자의 광증과 폭력성은 기록 곳곳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비극의 1차적 원인이 세자에게 있던 게 아니란 점이다. 진짜 원인은 아버지 영조였다. 세자의 자존감을 억누르는 그의 교육열이 세자의 광증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사도의 재능, 무너지는 자존감
사도세자의 광증은 결코 선천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 시절의 사도세자는 다른 어떤 세자보다 영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태어난 지 6달 만에 영조의 부름에 대답하고 동서남북을 분간했으며, 2살 때에는 본격적으로 한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3살 때 있던 일화는 그가 단순히 머리만 좋은 것에 그치지 않음을 말해준다. 천자문을 배우던 중 '사치'라는 단어를 접하는데, 이를 본 세자는 자신이 입은 옷을 가리키며 “이것이 사치라”고 말했다 전해진다. 나인들이 신기해 하여 비단과 무명을 놓고 어떤 게 사치냐 물어보니 세자는 비단은 사치고 무명은 사치가 아니라 말하며 무명으로 옷을 지어 입는 게 좋다고 답한다. 3살 아이의 입에서 이런 답변이 나왔다는 건 분명 놀라운 일이다.
장남인 효장세자가 어린 나이에 요절한 후 늦은 나이에 본 둘째 아들이 이처럼 총명하니 영조 또한 그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다. 직접 밤을 새워가며 세자가 볼 책을 필사하고 어전에서는 틈틈이 세자 자랑을 했으며, 가끔은 직접 세자를 자리에 앉혀놓고 글을 쓰게 해 그 글을 신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아마도 이 시기가 사도세자의 삶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부자 간의 훈훈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학구열이 남달랐던 영조에게는 이 정도의 총명함도 부족했는지 세자가 4살이 되는 해부터 점점 혼을 내는 일이 늘어간다. 문제는 질타의 근거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였다는 점이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문제와 무제(武帝)는 누가 더 훌륭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가 훌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나를 속이는 것이다. 너의 마음은 반드시 무제를 통쾌하게 여길 것인데, 어찌하여 문제를 훌륭하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경제(景帝)의 정치가 무제보다 훌륭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앞으로 문제•경제의 반 정도만으로 나를 섬겨도 족하다. 내가 매양 한나라 무제로 너를 경계했는데, 너의 시 가운데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는 글귀가 있어 기(氣)가 크게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조실록』 영조 24년(1748) 5월 19일
세자는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말했을 뿐이지만 영조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세자가 거짓말을 한다고 여기며 질책하고 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아들은 아버지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게 되고, 아버지는 이런 모습에 불만을 가져 더 큰 압박을 주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급기야 사도세자는 아버지가 나타나면 구석에서 벌벌 떠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영조의 압박은 공적인 자리에서도 이어졌다. 영조는 정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세자가 임금 대신 정무를 보는 대리청정을 지시하곤 했는데, 말만 대리청정이었을 뿐 사도세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다던 영조가 사도세자의 결정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자신이 원하는 결정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책임은 세자의 몫이었다.
심하게는 나라에 가뭄이 든 것도 세자의 덕이 부족해서라고 욕할 정도였다. 보다 못한 신하들이 관용을 베풀어달라 청하기도 했으나 영조는 막무가내였고, 오히려 사도세자의 생일 때마다 대신들 앞에서 흉을 보는 등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 끊임없이 공부를 강요당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비난이 쏟아지는 상황. 사도세자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이런 상황을 극복할 방안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밤낮으로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나날이 이어지며 사도세자의 자존감은 극도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파탄 난 부자관계는 결코 봉합될 수 없었고 자살소동을 벌이길 수차례, 결국 그는 미쳐버린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것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옷 입기를 두려워하는 의대증에 걸렸다고 한다. 의관을 갖추면 아버지를 뵈러 가야 한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때문에 옷 한 벌을 입으려면 10~30벌을 지어 올려야 했다. 맘에 들지 않는 옷을 모두 찢거나 불살라버렸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병이 발작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살인이었다. 사도세자는 칼을 차고 다니며 궁궐의 궁녀를 강간하거나 내시를 살해하곤 했다. 1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도세자의 손에 죽었다고 하는데 많게는 하루에 6명이 그의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다. 가끔은 자신이 죽인 자의 목을 베어 들고 다니면서 다른 궁인에게 자랑처럼 보여주기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정신이 들고 난 뒤에는 후회를 반복했다. 전형적인 양극성장애의 모습이다.
사도세자의 일탈 행동은 영조에 의해 억눌린 자존감이 비정상적으로 발현된 결과로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 외에는 허락된 것이 없었고 대리청정기에는 끊임없이 비난 받는 등 그의 삶은 아버지 영조의 존재 안에서만 규정되어 왔다. 세자의 신분으로서 궁궐을 떠나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아버지의 의도와는 무관한 가장 극단적 행위로 자신의 부족한 자존감을 채우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의 살인 행각은 오랜 기간 지속되다 자신의 후궁인 경빈 박씨까지 때려 죽이고 나서야 영조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살인 외의 비행까지 낱낱이 고발되니 더 이상 세자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결국 영조는 세자를 폐하고 뒤주에 넣는다. 세자의 나이 27세였다.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스승에게 다음과 같이 물은 적이 있다. “군자가 자기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맹자는 답했다. “가르치는 사람은 반드시 바르게 하라고 가르친다. 바르게 하라고 가르쳐도 그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노여움이 따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부자 간의 이치가 상하게 된다.”
『맹자』에 수록된 이 대화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왜 파국으로 치달았는지를 알려준다. 영조라고 사도세자가 미웠을 리는 없다. 그저 아들이 잘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선천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탕평을 통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자신처럼 세자가 성장하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존감을 짓밟는 영조의 교육은 결코 정답이 아니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기질적으로도, 성장 배경도 달랐다. 그러나 영조는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고 사도세자의 무너진 자존감은 일탈로써 채워져 결국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아버지 영조, 세자 사도'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댓글(0)
[자존감]디자이너의 자존감, 과대망상과 자괴감 사이에서
최범
[자존감]자존심, 우리 삶의 첫째 조건
임진모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