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만 년 초기 인류가 좀 더 살기 좋은 환경과 풍부한 식량을 찾아 떠난 이래 인류는 수많은 모험을 반복해왔다. 『역사』를 집필하기 위한 헤로도토스의 여정, 중국에서 아프리카까지 항해한 정화의 대원정, 걸어서 전 세계를 여행한 이븐 바투타, 그리고 세계화의 시작을 알린 대항해시대의 수많은 모험가들까지. 역사 속의 모험은 다양한 동인으로 진행되었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부분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모험은 국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냉전 당시 진행된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이 대표적인 예이다. 서로가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 전면전이 불가능한 만큼 양국은 과학 기술의 과시를 통해 체제의 우수성을 증명하려 했다.
20세기 초에도 비슷한 이유로 여러 탐험이 국가적 지원 아래 진행되었다. 그 대상은 당시까지 미지의 세계였던 극지방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사례는 남극점을 향한 영국과 노르웨이의 경쟁이었다. 1909년부터 1912년까지 로버트 스콧과 로알 아문센이라는 두 탐험대장이 남극점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두고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 레이스를 펼친 것이다.
아문센과 스콧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당대 영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고 남극 탐험에 있어서도 한발 앞서 있었다. 1904년에는 스콧이 지휘하는 디스커버리호가 2년간의 남극 탐사를 마치고 돌아왔고, 1908년에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이끄는 탐험대가 남극점 앞 160km까지 접근한 바 있다. 남극의 가혹한 환경에서 무사히 귀환한 섀클턴이 영웅 대접 받는 것을 시기한 스콧은 남극점 정복의 영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탐험 준비를 서두르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스콧은 이미 『디스커버리호의 여행』이란 책을 써 본인의 탐험을 대대적으로 광고한 바 있었다. 그 때문에 모금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고 설상차, 다량의 통조림, 고가의 저장고 등을 준비할 수 있었다.
아문센 또한 북극의 북서항로를 개척하는 등 상당한 경험을 가진 탐험가였으나 스콧만큼의 꼼꼼한 준비는 어려웠다. 남극점 탐험에 대한 결정부터 갑작스러웠는데, 그가 원래 목표로 한 것은 북극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가 먼저 북극점을 정복해버려 진로를 남극점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사실 피어리는 계산 착오로 인해 북극점 앞 40km 지점까지만 도달했을 뿐 북극점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의 조국인 노르웨이는 막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신생국에 불과했기에 영국만큼의 자금 지원을 받는 것도 불가능했다. 즉, 자금 및 장비 면에서 스콧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극점에 도달한 아문센 / 아문센의 남극 탐험에 사용된 프람(Fram)호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1911년 10월 20일에 베이스캠프를 떠난 아문센의 탐험대는 심심하리만치 순조롭게 전진했으며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12월 14일에 남극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문센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스콧에게 뒤처지지 않았을까 두려워했으나 남극점에 사람이 있었던 흔적은 없었다.
반면 스콧의 탐험대는 베이스캠프를 떠난 첫날부터 설상차가 고장 나는 등 악재가 겹쳤다. 워낙 고가의 기계였기에 나중에는 사람이 직접 설상차를 끌어야 했으며 속도는 당연히 더딜 수밖에 없었다. 갖은 고생 끝에 해가 넘어간 1월 17일, 스콧은 뒤늦게 남극점에 도착했으나 이미 그곳에는 노르웨이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절망한 스콧은 귀환을 서둘렀으나 이미 식량과 연료는 바닥나 생존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스콧의 탐험대원들은 하나둘씩 동사하고 스콧 또한 3월 29일 일기를 마지막으로 사망한다. 명망 있던 탐험가의 비참한 최후였다.
과학과 전통
앞서 스콧이 아문센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으나 아문센은 스콧이 가지지 못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누이트의 경험을 십분 활용했다는 점이다. 아문센은 북서항로를 탐험하며 이누이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그들의 생존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이 먹는 보존식인 페미컨, 털가죽으로 만든 의류, 이글루 만드는 법 등은 이누이트가 오랜 시간 극지방에서 생존할 수 있는 비결로써 높은 신뢰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문센이 이동수단으로 선택한 개 썰매 또한 이누이트에게 전수 받은 것으로써, 극지방에서 개 썰매는 어떤 이동수단보다 탁월했다. 개는 스스로 눈을 파고 들어가 보온을 하는 재주가 있어 관리하기 편했고 인간과 음식을 공유할 수 있어 식량 운송의 부담 또한 덜했다. 그리고 식량이 부족해졌을 때는 죽여서 귀중한 식량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이글루를 짓고 있는 이누이트 / 사망한 스콧은 6개월 뒤에야 발견되었고 그 시신은 남극에 묻혔다.
이러한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콧은 개를 사용하지 않았다. 극지방에서 썰매를 끄는 건 개에게 너무 잔혹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개를 먹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대신 스콧은 이동수단으로 만주산 조랑말을 선택했다. 분명 만주산 조랑말은 상대적으로 추위에 잘 견디고 더 많은 짐을 옮길 수 있으나 남극의 맹추위를 견디는 건 무리였다. 개에 비해 무거워 크레바스에 빠졌을 때의 대처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단점은 인간의 식량을 먹을 수 없기에 건초를 따로 준비해야 했고 이에 따라 운반해야 할 짐이 늘어난다는 점이었다. 조랑말이 모두 얼어 죽었을 때 스콧 탐험대는 남아있는 막대한 양의 건초를 보고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그 외의 물품 또한 효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입은 영국산 면직 방한복은 털가죽으로 된 옷보다 보온성이 떨어졌고 주석으로 만든 단추는 맹추위에 바스러져 제구실을 못 했다. 많은 돈을 들여 마련한 저장고는 등유가 새어나가 식량을 오염시켰다. 주요 식량이었던 통조림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가열할 연료는 턱없이 부족해 체온을 유지하는 데 악영향을 미쳤다.
종합하자면 극지방에서 유용한 건 근대의 과학이 아닌 이누이트의 전통이었다. 군인 출신으로 자국의 과학 문명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스콧은 이 사실을 몰랐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남극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1874-1922) / 섀클턴이 이끌던 탐험대의 모습
경험에서 배운 자
사실 아문센이라고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베이스캠프에서 사전준비를 할 때부터 그는 스콧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극의 겨울이 아직 끝나지 않은 9월에 미리 탐험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극의 겨울은 매서웠고 불과 나흘 만에 전 대원이 동상에 걸리는 피해를 입었다. 불안감에서 비롯된 충동이 낳은 실패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아문센은 냉정함을 되찾았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가 남극을 경험한 선배 탐험가들의 자료를 다시 검토하며 위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콧은 경험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그는 이미 남극점 탐험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섀클턴의 사례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는 섀클턴과 똑같은 루트로 진행했고, 조랑말 등 섀클턴이 사용한 수단을 그대로 이용했다. 스콧은 섀클턴이 실패한 이유가 단지 노력과 열정이 부족해서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섀클턴은 열정이 부족한 게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었을 뿐이다. 남극점을 160km가량 남겨놓았을 때 섀클턴은 더 이상의 전진은 생명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았고 “죽은 사자보다는 산 당나귀가 낫다”는 오래된 격언을 언급하며 발길을 돌렸다. 훗날 남극 횡단을 시도했을 때에도 인듀어런스 호가 유빙에 갇혀 표류했으나 2년 간의 노력 끝에 전 대원을 생환시키며 현재까지 위대한 실패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에 비해 스콧은 무모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자신과 대원 전원의 죽음이었다.
아문센과 스콧의 대결은 모험을 떠나는 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일깨워준다. 꿈과 영광을 향한 열정, 용기는 모험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이 점에 있어서 스콧은 결코 부족함 없는 모험가였고 실제로 남극점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대가가 본인을 포함한 대원 전원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스콧의 모험은 저평가될 수 밖에 없다. 반면 아문센은 실패로부터 교훈을 찾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열정과 냉정 사이의 균형감각은 아문센이 일류 탐험가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 남극점 최초 등반이라는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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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모험에서의 마음가짐
남극점을 향한 아문센과 스콧의 대결
박문국
2017-11-14
모험
기원전 4만 년 초기 인류가 좀 더 살기 좋은 환경과 풍부한 식량을 찾아 떠난 이래 인류는 수많은 모험을 반복해왔다. 『역사』를 집필하기 위한 헤로도토스의 여정, 중국에서 아프리카까지 항해한 정화의 대원정, 걸어서 전 세계를 여행한 이븐 바투타, 그리고 세계화의 시작을 알린 대항해시대의 수많은 모험가들까지. 역사 속의 모험은 다양한 동인으로 진행되었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부분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모험은 국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냉전 당시 진행된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이 대표적인 예이다. 서로가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 전면전이 불가능한 만큼 양국은 과학 기술의 과시를 통해 체제의 우수성을 증명하려 했다.
20세기 초에도 비슷한 이유로 여러 탐험이 국가적 지원 아래 진행되었다. 그 대상은 당시까지 미지의 세계였던 극지방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사례는 남극점을 향한 영국과 노르웨이의 경쟁이었다. 1909년부터 1912년까지 로버트 스콧과 로알 아문센이라는 두 탐험대장이 남극점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두고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 레이스를 펼친 것이다.
아문센과 스콧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당대 영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고 남극 탐험에 있어서도 한발 앞서 있었다. 1904년에는 스콧이 지휘하는 디스커버리호가 2년간의 남극 탐사를 마치고 돌아왔고, 1908년에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이끄는 탐험대가 남극점 앞 160km까지 접근한 바 있다. 남극의 가혹한 환경에서 무사히 귀환한 섀클턴이 영웅 대접 받는 것을 시기한 스콧은 남극점 정복의 영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탐험 준비를 서두르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스콧은 이미 『디스커버리호의 여행』이란 책을 써 본인의 탐험을 대대적으로 광고한 바 있었다. 그 때문에 모금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고 설상차, 다량의 통조림, 고가의 저장고 등을 준비할 수 있었다.
아문센 또한 북극의 북서항로를 개척하는 등 상당한 경험을 가진 탐험가였으나 스콧만큼의 꼼꼼한 준비는 어려웠다. 남극점 탐험에 대한 결정부터 갑작스러웠는데, 그가 원래 목표로 한 것은 북극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가 먼저 북극점을 정복해버려 진로를 남극점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사실 피어리는 계산 착오로 인해 북극점 앞 40km 지점까지만 도달했을 뿐 북극점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의 조국인 노르웨이는 막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신생국에 불과했기에 영국만큼의 자금 지원을 받는 것도 불가능했다. 즉, 자금 및 장비 면에서 스콧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극점에 도달한 아문센 / 아문센의 남극 탐험에 사용된 프람(Fram)호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1911년 10월 20일에 베이스캠프를 떠난 아문센의 탐험대는 심심하리만치 순조롭게 전진했으며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12월 14일에 남극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문센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스콧에게 뒤처지지 않았을까 두려워했으나 남극점에 사람이 있었던 흔적은 없었다.
반면 스콧의 탐험대는 베이스캠프를 떠난 첫날부터 설상차가 고장 나는 등 악재가 겹쳤다. 워낙 고가의 기계였기에 나중에는 사람이 직접 설상차를 끌어야 했으며 속도는 당연히 더딜 수밖에 없었다. 갖은 고생 끝에 해가 넘어간 1월 17일, 스콧은 뒤늦게 남극점에 도착했으나 이미 그곳에는 노르웨이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절망한 스콧은 귀환을 서둘렀으나 이미 식량과 연료는 바닥나 생존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스콧의 탐험대원들은 하나둘씩 동사하고 스콧 또한 3월 29일 일기를 마지막으로 사망한다. 명망 있던 탐험가의 비참한 최후였다.
과학과 전통
앞서 스콧이 아문센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으나 아문센은 스콧이 가지지 못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누이트의 경험을 십분 활용했다는 점이다. 아문센은 북서항로를 탐험하며 이누이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그들의 생존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이 먹는 보존식인 페미컨, 털가죽으로 만든 의류, 이글루 만드는 법 등은 이누이트가 오랜 시간 극지방에서 생존할 수 있는 비결로써 높은 신뢰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문센이 이동수단으로 선택한 개 썰매 또한 이누이트에게 전수 받은 것으로써, 극지방에서 개 썰매는 어떤 이동수단보다 탁월했다. 개는 스스로 눈을 파고 들어가 보온을 하는 재주가 있어 관리하기 편했고 인간과 음식을 공유할 수 있어 식량 운송의 부담 또한 덜했다. 그리고 식량이 부족해졌을 때는 죽여서 귀중한 식량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이글루를 짓고 있는 이누이트 / 사망한 스콧은 6개월 뒤에야 발견되었고 그 시신은 남극에 묻혔다.
이러한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콧은 개를 사용하지 않았다. 극지방에서 썰매를 끄는 건 개에게 너무 잔혹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개를 먹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대신 스콧은 이동수단으로 만주산 조랑말을 선택했다. 분명 만주산 조랑말은 상대적으로 추위에 잘 견디고 더 많은 짐을 옮길 수 있으나 남극의 맹추위를 견디는 건 무리였다. 개에 비해 무거워 크레바스에 빠졌을 때의 대처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단점은 인간의 식량을 먹을 수 없기에 건초를 따로 준비해야 했고 이에 따라 운반해야 할 짐이 늘어난다는 점이었다. 조랑말이 모두 얼어 죽었을 때 스콧 탐험대는 남아있는 막대한 양의 건초를 보고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그 외의 물품 또한 효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입은 영국산 면직 방한복은 털가죽으로 된 옷보다 보온성이 떨어졌고 주석으로 만든 단추는 맹추위에 바스러져 제구실을 못 했다. 많은 돈을 들여 마련한 저장고는 등유가 새어나가 식량을 오염시켰다. 주요 식량이었던 통조림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가열할 연료는 턱없이 부족해 체온을 유지하는 데 악영향을 미쳤다.
종합하자면 극지방에서 유용한 건 근대의 과학이 아닌 이누이트의 전통이었다. 군인 출신으로 자국의 과학 문명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스콧은 이 사실을 몰랐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경험에서 배운 자
사실 아문센이라고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베이스캠프에서 사전준비를 할 때부터 그는 스콧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극의 겨울이 아직 끝나지 않은 9월에 미리 탐험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극의 겨울은 매서웠고 불과 나흘 만에 전 대원이 동상에 걸리는 피해를 입었다. 불안감에서 비롯된 충동이 낳은 실패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아문센은 냉정함을 되찾았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가 남극을 경험한 선배 탐험가들의 자료를 다시 검토하며 위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콧은 경험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그는 이미 남극점 탐험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섀클턴의 사례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는 섀클턴과 똑같은 루트로 진행했고, 조랑말 등 섀클턴이 사용한 수단을 그대로 이용했다. 스콧은 섀클턴이 실패한 이유가 단지 노력과 열정이 부족해서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섀클턴은 열정이 부족한 게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었을 뿐이다. 남극점을 160km가량 남겨놓았을 때 섀클턴은 더 이상의 전진은 생명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았고 “죽은 사자보다는 산 당나귀가 낫다”는 오래된 격언을 언급하며 발길을 돌렸다. 훗날 남극 횡단을 시도했을 때에도 인듀어런스 호가 유빙에 갇혀 표류했으나 2년 간의 노력 끝에 전 대원을 생환시키며 현재까지 위대한 실패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에 비해 스콧은 무모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자신과 대원 전원의 죽음이었다.
아문센과 스콧의 대결은 모험을 떠나는 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일깨워준다. 꿈과 영광을 향한 열정, 용기는 모험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이 점에 있어서 스콧은 결코 부족함 없는 모험가였고 실제로 남극점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대가가 본인을 포함한 대원 전원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스콧의 모험은 저평가될 수 밖에 없다. 반면 아문센은 실패로부터 교훈을 찾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열정과 냉정 사이의 균형감각은 아문센이 일류 탐험가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며, 그 결과 남극점 최초 등반이라는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모험]모험에서의 마음가짐'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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