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에서 경험으로
“집은 살기 위한 기계이다”라는 르 코르뷔지에의 말처럼 모던 디자인은 인간에게 완전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모던 디자인은 가장 순수하다고 생각되는 조형적 요소들(점, 선, 면, 원, 삼각형, 사각형, 빨강, 파랑, 노랑 등)을 기반으로 가장 완전한 형태를 창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모던 디자인은 조형적 이상주의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 이상주의로 확대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던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조형적 이념은 단지 조형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된 ‘구체적 유토피아’(원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개념이지만, 여기에서는 그냥 ‘가시적 형태를 띤다’는 의미로 사용한다)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조형적 합리성을 통해 사회적 합리성을, 그리고 마침내 인간적 완전함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종교적 신념이었다.
하지만 모던 디자인의 사회공학은 그리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조형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 인간적 완전함이란 서로 다른 층위의 개념들이며, 그것들은 매개 없이는 쉽게 연결될 수 없었다. 결국 모더니스트들의 순수한(?) 믿음은 실현될 수 없었다. 미국의 미술평론가인 로버트 휴즈는 이렇게 평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도덕적으로 개선될 수 있고 사방의 벽과 하나의 천장에 의해 개선책이 실행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현대건축의 움직임을 주도했던 유럽의 건축가들(그로피우스, 반 데어 로에, 타우트, 산텔리아, 아돌프 로스, 르 코르뷔지에 등)은 건축의 역사에서 좀체 발견하기 힘든 이상주의를 형성하였다.” (로버트 휴즈, 『새로움의 충격』 중에서)
모던 디자인의 이상주의가 붕괴된 곳에서 이른바 포스트 모던 디자인의 상대주의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포스트 모던 디자인은 더 이상 조형적 합리성과 완전한 세계에 대한 신념을 갖지 않는다. 형태로는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조직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디자인의 중심은 형태에서 경험으로 이행한다. 디자인 이론가인 토마스 미첼은 모던 디자인으로부터 포스트 모던 디자인으로의 이행을 ‘형태로부터 경험으로’의 변화로 설명한다. 모던 디자인의 이상적 형태로부터 포스트 모던 디자인의 다양한 경험으로의 이행은 결국 그 경험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만든다. 여기에서 흥미롭게 대두되는 것이 바로 경험에 기반을 둔 주체의 세계 만들기(World Making)이다. 모더니즘의 합리주의가 이상적 형태의 제공을 통해 이상적 주체를 주조해내고자 한 기획이었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의 경험주의는 차이를 가진 주체의 경험을 통해 저마다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모더니즘의 객관주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관주의로 이동한다. 영국의 경험주의와 대륙의 합리주의를 종합하여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정식화했던 칸트의 주-객 통합의 비판철학은 다시 조정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제 선험적 객관의 세계는 붕괴되었고 다시 주관적 경험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위험사회인가 모험사회인가
합리주의가 붕괴된 자리에는 세계를 질서 있게 조직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회의가 깔렸다. 그래서 그것은 다시 모험을 불러들인다. 사실 모더니즘은 모험이 없는 사회, 그리하여 삶과 세계가 완전하게 통합된 상태를 꿈꿨다. 이러한 합리성 속에서 모험이란 위험이자 곧 일탈인 것이다. 하지만 모험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너무나 완전해서 위험이 제거된 사회,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위험이 초래되는 ‘위험사회’가 바로 현대사회인 것이다. 울리히 벡이 말하는 이 ‘위험사회’란 현대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초래하는 필연적인 결과이지만, 어떻게 보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현대사회 자체가 매우 위험한 사회일 수도 있다. 그 완전한 매트릭스 자체가 말이다.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가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위험성을 최대한 제거하고 더 높은 합리성을 추구할 것을 주장하지만, 그 역시 자기모순과 한계를 가졌음은 분명하다.
위험사회의 현실에서 주체에게 실제로 요구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능력이다. 이때 갖춰야 할 주체의 능력으로 주목되는 것이 바로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원시사회에서 발견한 ‘야생적 사고(La Pensée Sauvage)’와 이를 바탕으로 한 ‘브리콜라주(Bricolage, 손에 닿는 대로 아무거나 이용하는 기술과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을 구유한 사람을 ‘브리콜뢰르(Bricoleur)’라고 하는데, 아마 여기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은 TV 드라마 <맥가이버>의 주인공일 것이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디자이너 크지슈토프 보디츠코가 디자인한 노숙자용 수레(Homeless Vehicle) / ‘노머니 라이프’를 추구하는 삶 디자이너 박활민이 디자인한 최소 주택 프로젝트 ‘잔액 부족 하우스’.
디자인의 야생성을 찾아서
디자인에서 경험의 강조는 결국 주체의 행위 능력을 최대한 높이 평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디자인의 모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이것은 또한 모던 디자인에 대한 반발이자 현대 디자인의 소비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건축가 찰스 젠크스가 말하는 ‘애드호키즘(Ad-hocism, 되는 대로의 임시변통과 즉흥 제작의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의 디자인 교육자인 빅터 파파넥은 현대의 소비주의 디자인을 가리켜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이를 대신하여 ‘필요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Need)’과 ‘생존을 위한 디자인(Survival Design)’을 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 함께 현대문명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원초적 능력, 즉 어떤 야생성을 디자인을 통해 회복하고자 하는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비 스트로스가 말한 바로 그런 것 말이다.
해외에서도 한국인들은 금방 눈에 띈다고 한다. 알록달록한 아웃도어 웨어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아웃도어 웨어는 한국인의 보호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눈에 띔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감춘다. 생존의 정글 속에서 식별됨으로써 얻는 역설적인 안전함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것은 상품화되고 규격화된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모험이 사라진 사회, 위험사회에서의 모험이란 그렇게나 안전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험]유토피아로부터의 탈출
‘야생적 사고’와 디자인의 모험
최범
2017-11-14
모험
형태에서 경험으로
“집은 살기 위한 기계이다”라는 르 코르뷔지에의 말처럼 모던 디자인은 인간에게 완전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모던 디자인은 가장 순수하다고 생각되는 조형적 요소들(점, 선, 면, 원, 삼각형, 사각형, 빨강, 파랑, 노랑 등)을 기반으로 가장 완전한 형태를 창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모던 디자인은 조형적 이상주의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 이상주의로 확대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던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조형적 이념은 단지 조형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된 ‘구체적 유토피아’(원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개념이지만, 여기에서는 그냥 ‘가시적 형태를 띤다’는 의미로 사용한다)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조형적 합리성을 통해 사회적 합리성을, 그리고 마침내 인간적 완전함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종교적 신념이었다.
하지만 모던 디자인의 사회공학은 그리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조형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 인간적 완전함이란 서로 다른 층위의 개념들이며, 그것들은 매개 없이는 쉽게 연결될 수 없었다. 결국 모더니스트들의 순수한(?) 믿음은 실현될 수 없었다. 미국의 미술평론가인 로버트 휴즈는 이렇게 평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도덕적으로 개선될 수 있고 사방의 벽과 하나의 천장에 의해 개선책이 실행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현대건축의 움직임을 주도했던 유럽의 건축가들(그로피우스, 반 데어 로에, 타우트, 산텔리아, 아돌프 로스, 르 코르뷔지에 등)은 건축의 역사에서 좀체 발견하기 힘든 이상주의를 형성하였다.” (로버트 휴즈, 『새로움의 충격』 중에서)
포스트 모던 디자인은 합리주의의 모더니즘과 달리 주체의 경험을 통해 생기는 다양한 세계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Zanone
모던 디자인의 이상주의가 붕괴된 곳에서 이른바 포스트 모던 디자인의 상대주의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포스트 모던 디자인은 더 이상 조형적 합리성과 완전한 세계에 대한 신념을 갖지 않는다. 형태로는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조직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디자인의 중심은 형태에서 경험으로 이행한다. 디자인 이론가인 토마스 미첼은 모던 디자인으로부터 포스트 모던 디자인으로의 이행을 ‘형태로부터 경험으로’의 변화로 설명한다. 모던 디자인의 이상적 형태로부터 포스트 모던 디자인의 다양한 경험으로의 이행은 결국 그 경험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만든다. 여기에서 흥미롭게 대두되는 것이 바로 경험에 기반을 둔 주체의 세계 만들기(World Making)이다. 모더니즘의 합리주의가 이상적 형태의 제공을 통해 이상적 주체를 주조해내고자 한 기획이었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의 경험주의는 차이를 가진 주체의 경험을 통해 저마다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리하여 모더니즘의 객관주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관주의로 이동한다. 영국의 경험주의와 대륙의 합리주의를 종합하여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정식화했던 칸트의 주-객 통합의 비판철학은 다시 조정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제 선험적 객관의 세계는 붕괴되었고 다시 주관적 경험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브리콜라주’의 좋은 예인 네덜란드 디자인 그룹 ‘드로흐 디자인(Droog Design)’의 묶음 서랍장. 서랍장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깨트린다. / 미국 TV 드라마 <맥가이버>의 주인공. 만능해결사로서 현대판 브리콜뢰르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TNS Sofres
위험사회인가 모험사회인가
합리주의가 붕괴된 자리에는 세계를 질서 있게 조직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회의가 깔렸다. 그래서 그것은 다시 모험을 불러들인다. 사실 모더니즘은 모험이 없는 사회, 그리하여 삶과 세계가 완전하게 통합된 상태를 꿈꿨다. 이러한 합리성 속에서 모험이란 위험이자 곧 일탈인 것이다. 하지만 모험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너무나 완전해서 위험이 제거된 사회,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위험이 초래되는 ‘위험사회’가 바로 현대사회인 것이다. 울리히 벡이 말하는 이 ‘위험사회’란 현대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초래하는 필연적인 결과이지만, 어떻게 보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현대사회 자체가 매우 위험한 사회일 수도 있다. 그 완전한 매트릭스 자체가 말이다.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가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위험성을 최대한 제거하고 더 높은 합리성을 추구할 것을 주장하지만, 그 역시 자기모순과 한계를 가졌음은 분명하다.
위험사회의 현실에서 주체에게 실제로 요구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능력이다. 이때 갖춰야 할 주체의 능력으로 주목되는 것이 바로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원시사회에서 발견한 ‘야생적 사고(La Pensée Sauvage)’와 이를 바탕으로 한 ‘브리콜라주(Bricolage, 손에 닿는 대로 아무거나 이용하는 기술과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을 구유한 사람을 ‘브리콜뢰르(Bricoleur)’라고 하는데, 아마 여기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은 TV 드라마 <맥가이버>의 주인공일 것이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디자이너 크지슈토프 보디츠코가 디자인한 노숙자용 수레(Homeless Vehicle) / ‘노머니 라이프’를 추구하는 삶 디자이너 박활민이 디자인한 최소 주택 프로젝트 ‘잔액 부족 하우스’.
디자인의 야생성을 찾아서
디자인에서 경험의 강조는 결국 주체의 행위 능력을 최대한 높이 평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디자인의 모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이것은 또한 모던 디자인에 대한 반발이자 현대 디자인의 소비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건축가 찰스 젠크스가 말하는 ‘애드호키즘(Ad-hocism, 되는 대로의 임시변통과 즉흥 제작의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의 디자인 교육자인 빅터 파파넥은 현대의 소비주의 디자인을 가리켜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이를 대신하여 ‘필요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Need)’과 ‘생존을 위한 디자인(Survival Design)’을 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 함께 현대문명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원초적 능력, 즉 어떤 야생성을 디자인을 통해 회복하고자 하는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비 스트로스가 말한 바로 그런 것 말이다.
해외에서도 한국인들은 금방 눈에 띈다고 한다. 알록달록한 아웃도어 웨어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아웃도어 웨어는 한국인의 보호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눈에 띔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감춘다. 생존의 정글 속에서 식별됨으로써 얻는 역설적인 안전함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것은 상품화되고 규격화된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모험이 사라진 사회, 위험사회에서의 모험이란 그렇게나 안전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디자인 평론가.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등 여러 권의 평론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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