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에 관한 전시가 열렸다. 전시 제목은 <문화적 기억-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과 조선 예술을 사랑한 일본의 종교철학자이자 미학자였으며, 민예를 수집하고 민예론을 정립한 민예 운동가이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야나기를 식민지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제국의 지식인이라는 점 때문에 고마워하기도 하고, 또 그의 진심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이러한 심리는 당시 일민미술관 전시를 보도한 국내 일간지 기사의 제목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조선을 사랑했나.” (『한겨레』, 2013. 5. 30.)
“그가 조선을 사랑하기만 했나요?” (『조선일보』, 2013. 5. 28.)
─『공예를 생각한다』 최범, 「야나기 무네요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참조
이렇게 그에 대한 관점은 엇갈리지만 그가 한국 문화의 탁월한 해석자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그가 한국 문화에 끼친 공헌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중요한 인물을 조명하는 전시가 해방 이후 거의 60년 만에야 열렸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 2006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문화적 기억-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 전시 포스터
동아일보사가 설립한 일민미술관이 이런 전시를 열게 된 것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1922년 『동아일보』에 「아! 광화문이여」라는 글을 기고한 인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 일본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광화문을 헐어버리려고 했는데, 야나기의 반대운동으로 인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 전시의 제목에 사용된 ‘문화적 기억’이라는 개념이다. ‘문화적 기억’이라는 말은 원래 독일의 종교학자 얀 아스만(Jan Assmann)이 사용한 용어인데, 야나기 무네요시 전시도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적 기억’이라는 개념
기억은 현대 역사학에서 중심적인 개념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ks)는 ‘집단 기억’이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기억은 사회적으로 매개된다고 하였다. 아스만은 알박스의 이론을 발전시켜 ‘문화적 기억’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스만은 기억이 문화적 맥락에서 의미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기억은 문자, 회화, 영상, 건축물, 제의, 기념비, 박물관 등을 통해 유지된다고 했다. 기억은 철저하게 이러한 매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가 문화재라고 부르는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문화적 기억의 상당 부분은 일본 식민 지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 문화재에 대해 체계적인 조사 연구 사업을 펼쳤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같은 관학자에 의한 연구는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報)』라는 방대한 결실을 낳았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오늘날 우리의 문화적 기억이 만들어졌다. 일민미술관의 야나기 무네요시 전시 역시 그러한 테두리 안에 있음은 물론이다.
▲ 20세기 초 일본인에 의해 발견된 석굴암
조선시대에는 문화재라는 개념이 없었다. 문화재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며, 조선보다 먼저 근대화한 일본 역시 서구로부터 받아들였으며, 이것이 나중에 한국의 것이 되었다. 물론 문화적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복잡하며, 빛이 매질을 통과하면서 굴절되는 것처럼 울퉁불퉁 변형되곤 한다. 예컨대 일제가 석굴암을 파괴했다는 이야기 역시 알려진 바와는 다른 부분이 많다. 말했다시피 조선 시대에는 문화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유교를 숭상한 조선에서 불교 시설인 석굴암은 그 존재 자체가 잊혀진 상태였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일본인 우체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석굴암은 일본인들에 의해 불교 문화재로 높이 평가되면서 보수, 관리됐다. 물론 그것이 결과적으로 완전한 보수는 아니었다고 해도 오늘날까지 석굴암이 보존되는 데 어느 정도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다.
‘문화적 기억’의 매체로서의 기념품
정작 현대 한국인의 ‘문화적 기억’이 주로 식민 지배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반대편에서 그것을 비추어낸 거울상으로 기념품(Souvenir)을 들 수 있다. 사실 기념품이란 타자(他者)에 의한 현지 풍물의 이미지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개항 이후 도래한 서양인과 일본인들에 의해 투영된 이미지가 응결된 것이 기념품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념품 역시 문화적 기억을 매개하는 중요한 매체라고 할 수 있겠다.
▲ 조선미술품제작소에서 나전칠기를 제작하고 있는 모습 / 조선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든 백동제 신선로
근대화로 인해 조선의 전통공예는 몰락했다. 대한제국 황실은 이러한 전통공예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으로 ‘조선미술품제작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조선의 전통 공예품은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춰 미니어처로 제작되기도 했다. 나는 이것을 오늘날 관광기념품의 시조로 본다. 조선의 전통공예는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찾지 못한 채 관광기념품화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공예 정책은 오랫동안 관광 정책의 하위 영역이었다. 지금도 공예품을 관광기념품과 동일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기억과 기념- ‘문화적 기억’의 두 방향
한국에서 문화재는 사실상 관광기념품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한 일본은 그것을 가져다가 자신들의 문화적 자양분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야나기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조선 예술 연구는 현대 일본 문화를 풍성하게 하는 창조적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들인 야나기 소리(柳宗理)의 디자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야나기 소리의 주전자는 조선 백자의 넉넉한 품을 영락없이 닮았다. 현대 일본 디자인을 대표하는 깃코만 간장병은 경주 첨성대의 허리선을 그대로 가져갔다. 물론 세상에 비슷한 형태는 많다. 나는 야나기 소리의 주전자와 깃코만 간장병이 조선 백자와 첨성대를 모방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 사이에서 어떤 문화적 유전자의 흐름을 느끼는 것 또한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적 유전자가 혈통적 유전자와 반드시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궁중음악인 아악(雅樂)이 한국의 종묘제례악으로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일본 현대디자인이 한국 전통공예를 계승하고 있다는 내 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적 기억’의 문제는 민족 공동체를 넘어서는 ‘트랜스 내셔널’한 것이 되었다. 제국이 기억의 주체라면 식민지는 기억의 객체이면서 기념의 주체가 되었다고나 할까. 기억과 기념 사이에는 이러한 역사의 강이 흐르는 것이다. 그것은 기억의 강이자 동시에 망각의 강이기도 한 것이지만 말이다.
디자인 평론가.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등 여러 권의 평론집을 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문화적 기억’의 두 방향: 창조적 자산인가 기념품인가 '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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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기억’의 두 방향: 창조적 자산인가 기념품인가
2006년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에 관한 전시가 열렸다. 전시 제목은 <문화적 기억-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이었다.
최범
2017-10-17
‘문화적 기억’의 두 방향:
창조적 자산인가 기념품인가
야나기 무네요시 전시
2006년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에 관한 전시가 열렸다. 전시 제목은 <문화적 기억-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과 조선 예술을 사랑한 일본의 종교철학자이자 미학자였으며, 민예를 수집하고 민예론을 정립한 민예 운동가이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야나기를 식민지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제국의 지식인이라는 점 때문에 고마워하기도 하고, 또 그의 진심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이러한 심리는 당시 일민미술관 전시를 보도한 국내 일간지 기사의 제목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조선을 사랑했나.” (『한겨레』, 2013. 5. 30.)
“그가 조선을 사랑하기만 했나요?” (『조선일보』, 2013. 5. 28.)
─『공예를 생각한다』 최범, 「야나기 무네요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참조
이렇게 그에 대한 관점은 엇갈리지만 그가 한국 문화의 탁월한 해석자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그가 한국 문화에 끼친 공헌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중요한 인물을 조명하는 전시가 해방 이후 거의 60년 만에야 열렸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 2006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문화적 기억-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 전시 포스터
동아일보사가 설립한 일민미술관이 이런 전시를 열게 된 것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1922년 『동아일보』에 「아! 광화문이여」라는 글을 기고한 인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 일본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광화문을 헐어버리려고 했는데, 야나기의 반대운동으로 인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 전시의 제목에 사용된 ‘문화적 기억’이라는 개념이다. ‘문화적 기억’이라는 말은 원래 독일의 종교학자 얀 아스만(Jan Assmann)이 사용한 용어인데, 야나기 무네요시 전시도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적 기억’이라는 개념
기억은 현대 역사학에서 중심적인 개념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ks)는 ‘집단 기억’이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기억은 사회적으로 매개된다고 하였다. 아스만은 알박스의 이론을 발전시켜 ‘문화적 기억’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스만은 기억이 문화적 맥락에서 의미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기억은 문자, 회화, 영상, 건축물, 제의, 기념비, 박물관 등을 통해 유지된다고 했다. 기억은 철저하게 이러한 매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가 문화재라고 부르는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문화적 기억의 상당 부분은 일본 식민 지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조선 문화재에 대해 체계적인 조사 연구 사업을 펼쳤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같은 관학자에 의한 연구는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報)』라는 방대한 결실을 낳았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오늘날 우리의 문화적 기억이 만들어졌다. 일민미술관의 야나기 무네요시 전시 역시 그러한 테두리 안에 있음은 물론이다.
▲ 20세기 초 일본인에 의해 발견된 석굴암
조선시대에는 문화재라는 개념이 없었다. 문화재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며, 조선보다 먼저 근대화한 일본 역시 서구로부터 받아들였으며, 이것이 나중에 한국의 것이 되었다. 물론 문화적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복잡하며, 빛이 매질을 통과하면서 굴절되는 것처럼 울퉁불퉁 변형되곤 한다. 예컨대 일제가 석굴암을 파괴했다는 이야기 역시 알려진 바와는 다른 부분이 많다. 말했다시피 조선 시대에는 문화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유교를 숭상한 조선에서 불교 시설인 석굴암은 그 존재 자체가 잊혀진 상태였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일본인 우체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석굴암은 일본인들에 의해 불교 문화재로 높이 평가되면서 보수, 관리됐다. 물론 그것이 결과적으로 완전한 보수는 아니었다고 해도 오늘날까지 석굴암이 보존되는 데 어느 정도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다.
‘문화적 기억’의 매체로서의 기념품
정작 현대 한국인의 ‘문화적 기억’이 주로 식민 지배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반대편에서 그것을 비추어낸 거울상으로 기념품(Souvenir)을 들 수 있다. 사실 기념품이란 타자(他者)에 의한 현지 풍물의 이미지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개항 이후 도래한 서양인과 일본인들에 의해 투영된 이미지가 응결된 것이 기념품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념품 역시 문화적 기억을 매개하는 중요한 매체라고 할 수 있겠다.
▲ 조선미술품제작소에서 나전칠기를 제작하고 있는 모습 / 조선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든 백동제 신선로
근대화로 인해 조선의 전통공예는 몰락했다. 대한제국 황실은 이러한 전통공예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으로 ‘조선미술품제작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조선의 전통 공예품은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춰 미니어처로 제작되기도 했다. 나는 이것을 오늘날 관광기념품의 시조로 본다. 조선의 전통공예는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찾지 못한 채 관광기념품화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공예 정책은 오랫동안 관광 정책의 하위 영역이었다. 지금도 공예품을 관광기념품과 동일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기억과 기념- ‘문화적 기억’의 두 방향 한국에서 문화재는 사실상 관광기념품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한 일본은 그것을 가져다가 자신들의 문화적 자양분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야나기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조선 예술 연구는 현대 일본 문화를 풍성하게 하는 창조적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 5.조선백자 달항아리 - 6.야나기 소리가 디자인한 주전자 / 7.경주 첨성대 - 8.일본의 원로 디자이너 에쿠안 겐지가 디자인한 테이블용 깃코만 간장병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들인 야나기 소리(柳宗理)의 디자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야나기 소리의 주전자는 조선 백자의 넉넉한 품을 영락없이 닮았다. 현대 일본 디자인을 대표하는 깃코만 간장병은 경주 첨성대의 허리선을 그대로 가져갔다. 물론 세상에 비슷한 형태는 많다. 나는 야나기 소리의 주전자와 깃코만 간장병이 조선 백자와 첨성대를 모방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 사이에서 어떤 문화적 유전자의 흐름을 느끼는 것 또한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적 유전자가 혈통적 유전자와 반드시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궁중음악인 아악(雅樂)이 한국의 종묘제례악으로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일본 현대디자인이 한국 전통공예를 계승하고 있다는 내 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적 기억’의 문제는 민족 공동체를 넘어서는 ‘트랜스 내셔널’한 것이 되었다. 제국이 기억의 주체라면 식민지는 기억의 객체이면서 기념의 주체가 되었다고나 할까. 기억과 기념 사이에는 이러한 역사의 강이 흐르는 것이다. 그것은 기억의 강이자 동시에 망각의 강이기도 한 것이지만 말이다.
디자인 평론가.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등 여러 권의 평론집을 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문화적 기억’의 두 방향: 창조적 자산인가 기념품인가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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