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간이 인간인 이유에 대해 성찰과 설명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노력은 곧 철학과 윤리, 지식과 과학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생물학에서는 현생 인류를 ‘호모사피엔스’라고 부르는데, 이는 인류를 인류 아닌 종과 구별하기 위해 지어낸 용어 중 가장 대중적인 단어일 것이다. 생각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동물은 본능에 따라 살고, 인간은 본능에 따라 행동하기 전에 이른바 생각이라는 것을 하니까. 깊은 생각, 즉 사유는 우리 인류를 지구에서 가장 유력한 종으로 만들었다. 조상들로부터 이어져 지금까지 쌓인 생각들은 언어와 기술, 윤리와 예술이 되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 인간을 정의하기엔 빈틈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인류 진화의 단계에서 호모사피엔스 바로 전 단계의 인류를 ‘호모에렉투스’라 하는데, 직역하자면 직립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생물학을 포함한 과학적 영역이 아닌 인문학적 사고에서도 인류의 직립은 큰 의미가 있다. 허리를 완전히 편 인류는 네 개의 발 중, 앞에 달린 두 발에 자유를 얻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손이다. 인류는 손을 통해 생존 확률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 기예를 익히게 되었다. 비약하자면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두 손도 결국 인류가 이뤄낸 직립이라는 진화의 산물 아니겠는가.
인간에 대한 정의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생물학적 사실 관계에만 의지하진 않는다. 유발 하라리는 최근작 『호모 데우스』에서 미래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인간을 정의한다. 7만년 동안 끊임없이 지속된 ‘직립’과 ‘사유’를 통한 투쟁으로 지구를 완전히 정복해버린 인간. 인간은 기술의 발전이 어디까지 가 닿을 것인지 정확하게 짐작하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인간이 환경과 생명을 어디까지 파괴할 것인지도 잘 모른다. 혹은 관심 없다. 인간은 어느덧 무심하고 두려운 존재, 신(神)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의 운명은 신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법. 유발 하라리는 신적 존재가 되어 버린 인류가,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하길 넌지시 권한다.
▲ 손보미작가 사진. 신형덕 / 『디어 랄프 로렌』 문학동네
소설에서 그리는 놀이 인간
과거, 현재, 미래…… 이런 거대한 담론에서 비껴나 조금은 가벼운 이야기를 해도 될 것 같다. 사실 가벼움은 인류 고유한 능력 중에 하나다. 명사로는 ‘놀이’라고 해도 좋겠다. 엄밀히 따지자면 놀이야말로 인간만의 영역이다. 많은 동물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자세야 어떻든 두 발로 선 동물도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신적인 인간이라니…… 아직도 종교 때문에 숱한 사람이 희생당하고 있는데, 아직은 먼 이야기일 것이다. 『호모 루덴스』는 요한 하위징아의 대표 저서이다. 인간의 문화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주장인데, 생각보다 꽤 근사하게 들어맞는 편이다. 비약하자면, 키보드에 손을 올리기 직전까지 끝내 보고 있던 야구 중계도 결국 인간으로서의 자기 증명이었던 셈이다.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은 소설에서 극적으로 드러나기 쉽다. 소설은 짧은 문장으로 요약되기 쉬운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필연과 우연의 바느질을 통해 삶은 재구성되고, 플롯과 스토리의 스파크를 통해 인물은 빛이 난다. 소설 속 매력적인 인물은 놀이의 신봉자거나 희생자이기 쉽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는 평생 놀이를 찾아 떠도는 사람이고, 놀이는 인물의 모든 행동에 대한 알리바이가 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서 루드비크는 놀이로써 보낸 편지(농담으로 가득 찬)로 인생이 완전히 바뀐다. 손보미의 첫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또한 놀이의 신봉자와 희생자가 여럿 등장한다. 매력적인 소설이란 이야기다.
▲ 『호모루덴스』 요한 하위징아 / 『그리스인 조바』 카잔차키스 / 『농담』 밀란 쿤데라
첫 장면에서부터 주인공 종수를 어려움에 몰아넣는 일본계 미국인 교수 기쿠 박사는 그의 직업이나 성격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놀이인 피겨스케이트를 겨울 내내 즐긴다. 소설 속 랄프 로렌 생애의 비밀을 쥔 인물 조셉 프랭클 또한 전쟁을 통과하고 이국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일생과 하등의 상관도 없이 복싱을 진심으로 즐긴다. 종수의 첫사랑이자 소설의 시작을 알린 한국의 여고생 수영 역시 본인의 처지에 분명 무리인 ‘랄프 로렌 컬렉션’을 위해 아르바이트에 열심이다. 인물들의 이러한 놀이는 그들에게 부여된 외적 논리를 상회하여 소설에 관여한다. 소설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인물에 논리를 부여한다. 어쩌면 호모루덴스 각자의 놀이들은 메릴린 먼로의 서울 방문이나 최초의 원자력발전소 완공, 헤밍웨이의 노벨문학상 수상 같은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놀이가 곧 인간이요, 인물이고 소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에 관해 다시 논해 보자. 놀이하는 인간을 이 투박하고 부박한 논의의 승자로 꼽고 싶지만, 딱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다. 자유로운 두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행위, 문장과 장면, 플롯과 스토리를 통해 사유를 거듭하는 행위, 더 나은 인간이 되게끔 하는 행위, 무엇보다 재미있는 놀이로써의 행위. 눈치 챘을지 모르겠다. 인간은 소설을 쓰고 읽고 평함으로써 인간다워진다. 문학은 대체로 무용(無用)하고, 그것은 놀이의 필수조건에 부합한다.
손보미의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은 인간다운 놀이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가령 이런 문장, “디어, 는 다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져. 아주 친밀하고 따뜻해”를 읽으며 하는 놀이라니. 인간으로 태어나 다행이다. 이런 소설을 읽으며 놀 수 있으니까 말이다.
놀이하는 인간이라 다행이야
인간은 인간이 인간인 이유에 대해 성찰과 설명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노력은 곧 철학과 윤리, 지식과 과학
서효인
2017-09-14
놀이하는 인간이라 다행이야
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
인간에 대한 정의를 찾아서
인간은 인간이 인간인 이유에 대해 성찰과 설명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노력은 곧 철학과 윤리, 지식과 과학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생물학에서는 현생 인류를 ‘호모사피엔스’라고 부르는데, 이는 인류를 인류 아닌 종과 구별하기 위해 지어낸 용어 중 가장 대중적인 단어일 것이다. 생각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동물은 본능에 따라 살고, 인간은 본능에 따라 행동하기 전에 이른바 생각이라는 것을 하니까. 깊은 생각, 즉 사유는 우리 인류를 지구에서 가장 유력한 종으로 만들었다. 조상들로부터 이어져 지금까지 쌓인 생각들은 언어와 기술, 윤리와 예술이 되었다.
▲ www.fabricadejogos.net / Photo © Sebastian Schutyser
그러나 생각만으로 인간을 정의하기엔 빈틈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인류 진화의 단계에서 호모사피엔스 바로 전 단계의 인류를 ‘호모에렉투스’라 하는데, 직역하자면 직립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생물학을 포함한 과학적 영역이 아닌 인문학적 사고에서도 인류의 직립은 큰 의미가 있다. 허리를 완전히 편 인류는 네 개의 발 중, 앞에 달린 두 발에 자유를 얻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손이다. 인류는 손을 통해 생존 확률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 기예를 익히게 되었다. 비약하자면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두 손도 결국 인류가 이뤄낸 직립이라는 진화의 산물 아니겠는가. 인간에 대한 정의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생물학적 사실 관계에만 의지하진 않는다. 유발 하라리는 최근작 『호모 데우스』에서 미래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인간을 정의한다. 7만년 동안 끊임없이 지속된 ‘직립’과 ‘사유’를 통한 투쟁으로 지구를 완전히 정복해버린 인간. 인간은 기술의 발전이 어디까지 가 닿을 것인지 정확하게 짐작하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인간이 환경과 생명을 어디까지 파괴할 것인지도 잘 모른다. 혹은 관심 없다. 인간은 어느덧 무심하고 두려운 존재, 신(神)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의 운명은 신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법. 유발 하라리는 신적 존재가 되어 버린 인류가,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하길 넌지시 권한다.
▲ 손보미작가 사진. 신형덕 / 『디어 랄프 로렌』 문학동네
소설에서 그리는 놀이 인간
과거, 현재, 미래…… 이런 거대한 담론에서 비껴나 조금은 가벼운 이야기를 해도 될 것 같다. 사실 가벼움은 인류 고유한 능력 중에 하나다. 명사로는 ‘놀이’라고 해도 좋겠다. 엄밀히 따지자면 놀이야말로 인간만의 영역이다. 많은 동물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자세야 어떻든 두 발로 선 동물도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신적인 인간이라니…… 아직도 종교 때문에 숱한 사람이 희생당하고 있는데, 아직은 먼 이야기일 것이다. 『호모 루덴스』는 요한 하위징아의 대표 저서이다. 인간의 문화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주장인데, 생각보다 꽤 근사하게 들어맞는 편이다. 비약하자면, 키보드에 손을 올리기 직전까지 끝내 보고 있던 야구 중계도 결국 인간으로서의 자기 증명이었던 셈이다.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은 소설에서 극적으로 드러나기 쉽다. 소설은 짧은 문장으로 요약되기 쉬운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필연과 우연의 바느질을 통해 삶은 재구성되고, 플롯과 스토리의 스파크를 통해 인물은 빛이 난다. 소설 속 매력적인 인물은 놀이의 신봉자거나 희생자이기 쉽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는 평생 놀이를 찾아 떠도는 사람이고, 놀이는 인물의 모든 행동에 대한 알리바이가 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서 루드비크는 놀이로써 보낸 편지(농담으로 가득 찬)로 인생이 완전히 바뀐다. 손보미의 첫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또한 놀이의 신봉자와 희생자가 여럿 등장한다. 매력적인 소설이란 이야기다.
▲ 『호모루덴스』 요한 하위징아 / 『그리스인 조바』 카잔차키스 / 『농담』 밀란 쿤데라
첫 장면에서부터 주인공 종수를 어려움에 몰아넣는 일본계 미국인 교수 기쿠 박사는 그의 직업이나 성격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놀이인 피겨스케이트를 겨울 내내 즐긴다. 소설 속 랄프 로렌 생애의 비밀을 쥔 인물 조셉 프랭클 또한 전쟁을 통과하고 이국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일생과 하등의 상관도 없이 복싱을 진심으로 즐긴다. 종수의 첫사랑이자 소설의 시작을 알린 한국의 여고생 수영 역시 본인의 처지에 분명 무리인 ‘랄프 로렌 컬렉션’을 위해 아르바이트에 열심이다. 인물들의 이러한 놀이는 그들에게 부여된 외적 논리를 상회하여 소설에 관여한다. 소설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인물에 논리를 부여한다. 어쩌면 호모루덴스 각자의 놀이들은 메릴린 먼로의 서울 방문이나 최초의 원자력발전소 완공, 헤밍웨이의 노벨문학상 수상 같은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놀이가 곧 인간이요, 인물이고 소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에 관해 다시 논해 보자. 놀이하는 인간을 이 투박하고 부박한 논의의 승자로 꼽고 싶지만, 딱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다. 자유로운 두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행위, 문장과 장면, 플롯과 스토리를 통해 사유를 거듭하는 행위, 더 나은 인간이 되게끔 하는 행위, 무엇보다 재미있는 놀이로써의 행위. 눈치 챘을지 모르겠다. 인간은 소설을 쓰고 읽고 평함으로써 인간다워진다. 문학은 대체로 무용(無用)하고, 그것은 놀이의 필수조건에 부합한다. 손보미의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은 인간다운 놀이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가령 이런 문장, “디어, 는 다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져. 아주 친밀하고 따뜻해”를 읽으며 하는 놀이라니. 인간으로 태어나 다행이다. 이런 소설을 읽으며 놀 수 있으니까 말이다.
시인, 에세이스트, 출판편집자.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했으며 2011년에는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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