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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石戰)

석전(石戰). 말 그대로 돌싸움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프로파간다를 정면으로

박문국

2017-09-12

석전 – 폭력과 문화의 사이에서


죽음도 불사하는 놀이


석전(石戰). 말 그대로 돌싸움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프로파간다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 폭력적인 놀이는 고구려 때부터 기록이 나타날 만큼 그 역사가 길다. 규칙 또한 이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직관적이어서 기본적으로는 사람들이 두 패로 나뉘어 돌을 던지는 것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육모방망이를 들고 접근전을 펼치는 일도 있었다. 경기는 상대방이 항복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진행되었고 당연히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사망자까지 나오는 일도 있었다.


기산 김준근의 석전놀이 풍속화


백성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석전놀이, 그림. 이무성

기산 김준근의 석전놀이 풍속화 / 백성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석전놀이, 그림. 이무성


석전은 고려 때까지 국가행사처럼 진행되었는데 조선을 세운 유학자들이 이를 곱게 볼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조선 초기까지 석전 열풍은 끊이지 않았는데 왕가 사람들이 석전 관람을 취미로 가졌기 때문이다. 무인 출신인 태조는 물론 태종 또한 석전을 왕왕 열었고, 특히 태종의 석전 사랑이 대단했다. 말년에 병으로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단옷날 벌어지는 석전 경기만큼은 봐야 한다며 종루로 행차했음은 물론, 선수들을 독려하기까지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세종 또한 가문의 분위기가 분위기다 보니 초창기에는 석전을 장려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민가에 피해가 막심하다는 이유로 금지하게 된다. 문제는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이다. 방탕한 삶으로 유명한 인물인 만큼 그 또한 석전을 즐겼는데, 임금의 석전 금지령에 좀이 쑤셨는지 직접 사람을 모아 아들들과 함께 석전 경기를 열게 된다. 그러나 경기 중 사망자가 나오면서 상황이 심각해진다. 석전 중 사망자가 나오는 것 자체는 흔한 일이었으나 왕이 직접 석전을 금지한 상황에서 보란 듯이 석전 경기를 열고 사망자까지 발생한 게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양녕대군은 세종의 보호로 별다른 벌을 받지 않았으나 양녕대군의 아들들과 석전패들은 처벌받게 된다.


광화문 광장에 위치한 세종대왕 동상

▲ 광화문 광장에 위치한 세종대왕 동상


이렇듯 세종 이후 석전 열기는 예전만 못하게 되었으나 이런 분위기는 도성 근처로 한정되었을 뿐, 지방의 평민들은 여전히 단옷날만 되면 석전을 벌였다. 사실 세종의 석전 금지령도 그리 철저하게 지켜진 편은 아닌지라 이후 임금의 성향에 따라 석전은 금지와 해금을 반복해왔다. 중국 사신이 왔을 때는 석전대를 꾸려 관람케 하는 일도 있었다 하니 그 원초적인 재미만큼은 분명했다 할 수 있겠다.


놀이를 바라보는 문화적 시선


석전은 조선 후기는 물론 개항기까지 이어졌는데 이를 목격한 대다수 서양인들의 기록에는 그들이 느낀 혐오감이 나타난다.

    “그들의 가장 이상한 오락의 한 형태는, ―만일 그것을 참으로 오락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석전이다. 매년 봄에 돌을 가지고 싸워도 무방하다고 하여 남자는(소년까지도) 돌이 많이 있는 야외로 나간다. 거기서 그들은 편을 짜 가지고 정식으로 돌 던지기 싸움을 한다. 매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자는 무수하다. 나는 이 기상한 행사의 기원을 발견할 수 없다.” -H.R. Saunderson,
  
분명 석전은 필요 이상으로 폭력적인 면이 존재하고 일제는 이를 조선이 근대화되지 못한 증거로 제시하며 금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석전이란 놀이를 단순히 폭력성의 발현으로 단순화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놀이는 그 표면적인 양상 뒤에 여러 문화적 함의를 응축하고 있다. 고구려 때의 석전은 정초에 두 패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경기를 벌인 뒤 왕이 직접 강물로 들어가는 의식을 치렀는데 이는 새로운 질서와 풍요를 바라는 종교적 제의로 해석되곤 한다. 조선의 경우 석전 찬성론자들은 석전의 군사적 효용성을 주장하곤 했는데 실제로 중종 대에는 안동의 석전대가 왜구를 격퇴한 사례도 존재한다.

 

돌을 던지며 민의를 표출


스페인 토마토 축제
▲ 사진출처.www.ynet.co.il / 스페인 토마토 축제


무엇보다 석전은 억압받는 민중의 분노 배출구로써 작용할 수 있었다. 석전을 빌미로 탐관오리나 그 앞잡이 역할을 하는 아전의 집에 돌을 던지며 민의를 표출하는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스페인 역시 이러한 돌팔매질 문화가 존재했으며 1950년대 토마토 가격 폭락으로 발렌시아 지방에서 변형된 것이 오늘날까지 매년 8월에 열리는 토마토 축제다. 즉 석전이라는 문화가 오래 지속된 것은 민중이 그만큼 오랜 시간 억압받았다는 방증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현대에 석전을 재현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적용되기 힘든 과거의 사실을 단순히 미개한 문화로 치부하는 태도 또한 바람직하다 볼 수는 없다. 애초에 현대의 시선만으로 바라본다면 과거의 것 중 미개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과거의 시선을 배제한다면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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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문국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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