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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을 디자인할 것인가,놀이를 디자인할 것인가

디자인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말이 있다. 물론 사전적으로 보면 디자인은 명사이면서 동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범

2017-09-12

장난감을 디자인할 것인가, 놀이를 디자인할 것인가


창조적인 디자인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디자인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말이 있다. 물론 사전적으로 보면 디자인은 명사이면서 동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디자인이 굳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는 말은 고정관념에 갇히지 말고 창조적으로 디자인하라는 주문이다. 옷을 디자인하지 말고 멋을 디자인하며, 펜이 아니라 쓰기를, 자동차가 아니라 이동을 디자인해야 한다는 식이다. 디자인이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진짜 새로운 것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다. 무엇이든지 어떤 전형(典型)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어서 혁신이 그리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이슨의 날개 없는 선풍기는 선풍기 역사에서 분명 혁신이다. 하지만 세상 선풍기의 99퍼센트는 여전히 날개가 있다. 그러니까 다이슨 정도 되어야 명사가 아니라 동사의 디자인, 즉 날개가 아니라 바람을 디자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선풍기 앞의 아기


다이슨의 날개 없는 선풍기 앞의 아이

▲ 사진출처. www.huffingtonpost.kr / 다이슨의 날개 없는 선풍기 ©компания Dyson


놀이와 디자인의 관계도 그렇다. 놀이의 디자인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장난감이 떠오른다. 장난감은 놀이를 위한 물건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장난감 디자인은 곧 놀이의 디자인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장난감을 디자인하는 것과 놀이를 디자인하는 것은 층위가 다르다. 전자가 명사의 디자인이라면 후자는 동사의 디자인인 것이다. 장난감은 재미있어야 하지만 놀이는 더 재미있어야 한다. 장난감 디자인은 창조적이어야 하지만 놀이의 디자인은 더 창조적이어야 한다.
장난감은 역사도 오래되었고 그 종류도 매우 많다. 고대인의 무덤에서 출토된 토용(土俑)은 인형이지만 장난감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대신하여 묻은 종교적인 성물(聖物)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형은 사람을 대신하는 장난감이다. 조그마한 캐릭터 인형에서부터 고가의 피규어까지 지천에 넘쳐난다. 이렇게 풍부한 장난감들을 보노라면 과연 놀이를 위해서 장난감이 있는 것인가, 아니 혹시 장난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놀이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바우하우스의 장난감 디자인

▲ 바우하우스의 장난감 디자인 (알마 부셔, 1924)


장난감 디자인의 새로운 시도


장난감 디자인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디자인 역사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례로 기억되는 것은 바우하우스의 장난감이다. 왜냐하면 얼핏 생각하기에 바우하우스와 장난감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엄격한 기능과 합리적 질서에 따라서 사물과 환경을 디자인하고자 한 운동이었다. 그래서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은 차갑고 유머가 없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비아냥거림처럼 바우하우스의 식탁은 수술대 같았으며, 주방 용기의 형태는 모두 똑같이 생겼고 그 속에 담기는 내용물만 문자로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바우하우스가 장난감을 디자인했다는 사실은 약간 의외로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바우하우스가 장난감을 만들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왠지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보면 엄숙한 신의 나라에서 웃음이 허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수도원장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희극의 존재를 제거하려고 계략을 꾸미는 장면이 나온다. 바우하우스의 장난감은 합리적으로 조형된 세계에서 놀이를 위한 도구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법한 바우하우스가 실은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하나의 반증으로 제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이 역설적인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바우하우스에도 장난감은 있었다(물론!). 하지만 그 장난감은 바우하우스의 이념에 맞게 매우 엄격하고 합리적으로 디자인된 것이었다.


슈퍼 마리오 장난감


닌텐도 슈퍼마리오

▲  사진출처. www.pxhere.com / 닌텐도 슈퍼마리오 사진출처. www.nintendo.co.uk


장난감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새로운 장난감, 아니 놀이의 디자인이 가능해진다. 대표적인 사례로 일본의 ‘닌텐도’를 들 수 있다. 닌텐도는 ‘슈퍼 마리오’ 같은 초대박 게임을 만든 세계적인 게임 콘텐츠 및 기기 개발 회사이다. 일본 교토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닌텐도는 원래 화투패를 만들던 회사였다. 하지만 닌텐도는 게임 회사로 거듭 났고 대성공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상품을 화투가 아니라 놀이라고 정의하면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화투라는 놀이의 형식에 매이지 않고 놀이의 본질에 천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닌텐도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닌텐도를 취재한 기자가 정장 차림을 하고 있는 대표에게 왜 자유로운 복장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닌텐도 대표는 복장과 일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대답했다. 직원들은 일본 회사에서 흔한 작업복을 입고 자신은 비즈니스 룩을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조차도 우리의 고정관념을 벗어난 것일지 모른다. 게임 개발 회사의 대표와 직원은 자유로운 복장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하지만 그들은 ‘게임은 게임이고 일은 일이다’라는 또 하나의 상식으로 그러한 고정관념을 피해간다.


피젯 큐브

▲ 피젯 큐브 ©Paul Kim


놀이, 새로운 개념으로 나아가다


요한 하위징아는 전쟁도 놀이의 일종이라고 주장했다. 놀이야말로 시대와 사회에 따라 언제나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장난감 같지 않은 장난감, 놀이 같지 않은 놀이가 있게 마련이고 그런 것은 기존의 장난감과 놀이의 개념을 바꾼다. 최근에는 피젯 큐브(Fidget Cube)라는 것도 등장했다. 이것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산만한 현대인을 위한 장난감이라고 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멍 때리기 대회가 열리는데, 또 다른 한쪽에서는 멍 때리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장난감이 등장하는 세상이다. 피젯 큐브는 장난감인가 아닌가. 멍 때리기는 놀이인가 아닌가.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장난감을 디자인할 것인가, 놀이를 디자인할 것인가.
미술사가인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Story of Art)』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다소 알쏭달쏭한 말이지만, 이 말은 결국 역사에는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동일한 대상으로서의 미술이란 없으며, 오로지 이런저런 시대에 미술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만이 존재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놀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놀이란 없다. 오로지 놀이하는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장난감 디자인도 놀이의 디자인도 없다. 그때그때 놀이하는 인간이 선택하는 사물과 규칙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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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범
최범

디자인 평론가.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등 여러 권의 평론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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