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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아보는 잠깐의 쉼표가 필요한 때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의 <파리로 가는 길>

이화정

2017-08-22

미국식 실용주의자인 앤과 프랑스식 낭만주의자 자크가 함께 하는 여행은 각자 다른 시간과의 충돌을 헤쳐나가는 경험이다. 

앤은 “마이클이랑 남부에서 파리 갈 때 항상 (빠른) 비행기로 갔다”고 하지만 

자크는 “육로로 가야 제대로 보죠”라며 서두르고자 하는 앤의 속력을 자꾸 저지한다. 

그렇게 멈춰선 길에는 폴 세잔의 그림에 등장하는 엑상프로방스의 생 빅투아르 산과 보랏빛 라벤더 밭이 펼쳐진다.

 

 

 

“휴가 때 어디 가?”라는 말은 일반화되었지만, 들여다보면 참 모순이지 싶다. 쉴 휴(休)와 한가할 가(暇)를 모아놓은, 이렇게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인 ‘휴가’에 사람들은 또 그렇게 뭔가 볼 것과 할 것을 찾아 바쁘게 길을 나선다. 생각해보면, 휴가 때 떠나는 여행이 언제부턴가 급 피곤해졌던 것도 같다. 나와 비슷한 이유로 떠나온 많은 사람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일상에 ‘쉼표’를 찍으려는 애초의 의도가 증발돼 버렸던 피곤한 경험들이 대략 백 한 가지쯤은 떠오른다. 휴가와 여행이 동의어처럼 쓰이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휴가 같은 여행’을 떠나려면 이제 세부 방법론이 필요한 게 아닐까. 『여행의 기술』을 통해 여행의 방법론을 집필한 알랭 드 보통이 지적한 건 ‘속도’의 문제였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총알에게는 빨리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그가 진정한 사람이라면—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파리로 가는 여행

프랑스 남부 도시 칸에서 출발해 파리로 가는 여정. <파리로 가는 길>의 아주 특별한 여정. 차로 7시간 걸릴 거리를 40시간 동안 달리는 느린 로드트립에서 체감한 것도 바로 여행의 속도, 그리고 진정한 휴가의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다. 중년의 미국 여성 앤(다이안 레인)은 유명한 영화 제작자인 남편 마이클(알렉 볼드윈)의 칸 국제영화제 출장길에 함께 동행했는데, 이참에 잠깐 일상에서 벗어나 프랑스 남부지방을 여행하려던 마음이었지 싶다. 하지만 해외로케이션 유치 문제로 아침부터 비즈니스에 바쁜 남편은 아내와 대화할 시간조차 없다. 칸에서조차 남편 수발하느라 바쁜 데다, 컨디션 난조로 귀까지 아파 말썽이다. 비행기를 타야 하는 다음 출장지인 부다페스트 일정을 건너뛰고, 앤은 남편과 따로 곧장 파리로 가기로 한다. 마침 마이클의 사업 파트너인 프랑스 남자 자크(아르노 비야르)가 파리까지 자동차로 모셔다 주겠다고 자청해서다.

 

 

2017년 8월 초에 개봉한 엘리노어 코폴라 감독의 파리로 가는 길 포스터 02

▲ 2017년 8월 초에 개봉한 엘리노어 코폴라 감독의 <파리로 가는 길>

 

 

한시라도 빨리 파리로 가려는 앤과 달리, 낡은 클래식 자동차 푸조를 끌고 온 자크의 목적은 한참 다른 듯하다. 출발부터 “점심 먹고 가야죠”라며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앤을 데려 간 그는 송로버섯 철이라 송로버섯을 먹어야 하고, 달팽이 요리를 잘하는 쉐프가 있는 레스토랑에서는 그 음식을 먹고 가야 하는 느긋한 성격이다. 앤은 예정에도 없이 갑자기 피크닉을 하고, 앙트레-메인-디저트 코스에 와인까지, 한번 들어갔다 하면 족히 두 시간은 훌쩍 걸리는 프랑스식 평균 식사 시간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어쨌든 그렇게, 자크를 따라 앤은 파리로 가는 내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와인을 마시고, 근사한 유적지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가게 된다. 아예 “한 시간마다 쉬려 해요. 담배도 피우고 다리도 펴고”라며 선언을 한 자크는 “파리엔 언제 가려고?”라는 앤에게 이렇게 응수한다. “걱정 말아요, 파리 어디 안 가요.”

 

 

파리로 가는 길의 앤과 자크

▲ <파리로 가는 길>의 앤과 자크

 

 

 

미국식 실용주의자인 앤과 프랑스식 낭만주의자 자크가 함께 하는 여행은 각자 다른 시간과의 충돌을 헤쳐나가는 경험이다. 앤은 “마이클이랑 남부에서 파리 갈 때 항상 (빠른) 비행기로 갔다”고 하지만 자크는 “육로로 가야 제대로 보죠”라며 서두르고자 하는 앤의 속력을 자꾸 저지한다. 그렇게 멈춰선 길에는 폴 세잔의 그림에 등장하는 엑상프로방스의 생 빅투아르 산과 보랏빛 라벤더 밭이 펼쳐진다. 2000년 전 로마인들이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유적지 가르 수도교를 비롯해 영화의 시작을 알린 뤼미에르 형제의 역사가 기록된 뤼미에르 박물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리옹의 구시가지, 리옹에서 가장 큰 시장인 폴 보퀴즈 시장도 등장한다. 성모 마리아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는 베즐레이의 성 막달레나 대성당도 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이 여행의 여정이자, 기억할 만한 공간으로 남게 된다. 처음 레스토랑에서 자크가 “와인 한 잔 하실래요?”라고 했을 때 단번에 거절하려던 앤은 이제 저도 모르게 자크가 찬미하는 한가로운 시간을 적극적으로 체험하기에 이른다.

 

 

(왼) 남편의 파트너인 자크, 앤을 파리로 데려다 주기로 한다.

 

(오)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먹는 앤과 자크

▲(왼) 남편의 파트너인 자크, 앤을 파리로 데려다 주기로 한다. / (오)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먹는 앤과 자크

 

 

나를 찾아가는 인생이라는 여행

<파리로 가는 길>은 <대부> <지옥의 묵시록>등을 연출한 거장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부인인 엘리노어 코폴라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10여 편의 다큐멘터리 연출,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설치 미술가, 작가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지만, 장편 상업영화로는 이번이 첫 상업영화 데뷔작이다. 영화는 2009년 칸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후 코폴라 감독이 동유럽 출장에 떠나, 남편의 사업 동료와 프랑스를 여행했던 실제 일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81살의 나이인 그녀가 6년여 동안의 개발 기간을 통해 중년 여성 앤의 심리를 놓치지 않는 섬세한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 역시 앤과 같은 여성으로서 겪었던 체험들이 그만큼 컸던 이유일 테다. 그녀 역시 같이 영화를 작업하는 아티스트 남편을 두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가족 체제와 관습을 가진 생활에서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갑갑함을 느꼈던 시간들을 토로한다.

 

 

파리로 가는 길의 촬영 모습

 

엘리노어 코폴라 감독

▲<파리로 가는 길>의 감독 엘리노어 코폴라 감독 / (오) photo byⓒDaniel Bergeron

 

“남편이 생각하는 아내의 역할은 아이들을 돌보고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었고 반대로 난 독립적인 성격이라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가면서 결국에는 가족과 가정의 틀 안에서 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내 작품들의 회고전을 열었을 때 내가 여러 가지 다른 매체를 통해 같은 주제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앤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이클은 완벽한 남편이 아니고 자크도 완벽하지 않은 남자다.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은 “이 영화를 나쁜 남편과 근사한 프랑스 남자가 맞서서 후자가 앤을 행복하게 해주는 구도를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파리로 가는 프랑스 남부여행은 결국 인생의 중반을 맞이한 앤이 다 키운 자식과 자신을 완벽하게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의존과 집착을 놓아주는 과정이다. 짧지만 선물같은 삶의 쉼표를 통해 앤은 뜻하지 않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서 앤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장면 01

 

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서 앤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장면 02

▲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서 앤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장면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서 인상적인 도구는 여행 도중 앤이 가지고 있는 하얀색의 작은 라이카 카메라다. 남편과 함께일 때 그녀의 사진 폴더에는 피곤에 지친 남편이 자는 호텔방에서의 사진, 그리고 딸의 졸업 사진이 전부였다.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 그녀는 여행길에서 만난 좋은 음식들, 유적지의 돌, 박물관에서 본 섬유 등 오롯이 ‘자신의’ 관심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자신의 시각이 담긴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한다. 앤이 누군가를 위한 대상으로써가 아닌,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그녀의 작품이 일러주는 셈이다. 앤이 만약 여느 때처럼 비행기로 곧장 파리로 갔다면 느끼지 못했을 풍성한 체험의 시간들을 곱씹어 본다. 흔히 말하는 ‘낭만적인 파리’에 도착하는 것이 이번만큼 아쉬웠던 적도 없었지 싶다. 목적지를 향하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인생이라는 긴 여정이라면 이렇게 아주 잠깐씩의 휴지기가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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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화정
이화정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팀장. 영화 속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 즐겨 한다. 저서로 여행 에세이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과 인터뷰집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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