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이라는 키워드로 소개할 알맞은 문학작품을 고르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출판편집자로 일하고, 시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면서 문학은 더 이상 내게 휴식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무슨 책을 읽든 책의 내용을 살피고, 서평 거리를 찾고 좋은 저자를 물색하는 것이다. 의미를 길어오고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휴식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문학이라니, 한때 문학을 사랑해 현재까지 문학을 업으로 삼아온 내게 안타깝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내게 문학은 휴식이 아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아니더라도 문학을 휴식의 벗으로 삼는 사람은 그렇게 많진 않은 것 같다. 아무래도 책보다는 텔레비전이나 영화가 보기 쉽고, 게임을 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게 더 재미있다. 그도 아니면 가까운 사람과 술을 마시거나 혼자서 한숨 깊게 자는 게 나을 것이다. 그사이에 책과 문학이 끼일 자리가 있을까. 종이에 인쇄된 활자를 애써 읽고 머릿속에 정리하고 그것으로 새로운 사고와 상상, 논리를 갖추는 일은 역시나 휴식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난다 / 배경.@prasannasnap
시집으로서는 귀하게도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책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의 시인 박준의 첫 번째 산문집을 읽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는 긴 제목의 책이다. 박준의 시집은 순한 정서와 청량한 시어로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의 산문은 어떤 색깔일까. 나는 진작부터 휴식을 취할 수 없는 태도와 입장으로 책장을 여는 것이다.
책은 단정한 올리브그린 표지로 얼굴을 대신한다. 더도 덜도 아닌 그림 한 폭이 중앙에 위치해 있는데, 어느 호수의 보트 위에서 여자는 노를 잡고 남자는 하모니카를 분다. 특이한 건 그림 속 인물에 표정이 없다는 것이다. 화가의 의도된 붓질로 사라진 표정이 궁금하다. 글과 그림은 각각의 작가(박준, Gideon Rubin) 개별적 작품이지만, 어쩐지 그림의 숨은 표정을 책 속의 문장들이 담당하고 있을 것만 같아, 빠르게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시인 박준의 문장 속에서 충분히 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주로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시거나, 국내 어느 도시로 홀로 여행을 떠나거나, 미열에 시달리며 푹푹 잠이 든다. 세 가지 행동 모두 나에게는 적절한 휴식처럼 느껴졌다. “문득 삶이 막막해지거나 아득해질 때 비슷한 상황에 놓친 친구들과 함께 마시는 술은 큰 위안이 된다”라는 문장은 뭐 하나 까다로운 수식 없이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라는 문장은 여행의 착한 알리바이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그 의원을 다니면서 아무리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낫지 않는 병이 있었다. 아픈 곳도, 아픈 일도 점점 많아지는 병, 나는 그 병을 ‘엄마 병’이라고 불렀다” 이 문장은 어디 아픈 데도 없는데도 몸 속 한구석을 알싸하게 한다.
책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늦은 밤 떠올리는 생각들의 대부분은 / 나를 곧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박준의 산문집을 읽은 것은 출근길 버스에서였지만, 그곳에서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음으로써 옆 사람에게 고개를 기대며 깊게 잠든 것만큼이나 충만한 휴식을 취한 것 같다. 좋은 문장은 사람을 쉴 수 있게 한다. 좋은 문장으로 얻은 휴식은 나를 보다 좋은 사람이 되게 할 것만 같다. 좋은 사람일 것이 분명한 시인의 문장들은 몇몇 구절을 통해 읽는 이의 눈시울을 건드리기도 한다. 제목대로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무엇도 달라지지 않을 내일을 위해 우리는 조금 울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속으로 울고 웃으며 나는 충분히 쉬었다.
휴식을 주는 문장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서효인
2017-08-10
‘휴식’이라는 키워드로 소개할 알맞은 문학작품을 고르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출판편집자로 일하고, 시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면서 문학은 더 이상 내게 휴식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무슨 책을 읽든 책의 내용을 살피고, 서평 거리를 찾고 좋은 저자를 물색하는 것이다. 의미를 길어오고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휴식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문학이라니, 한때 문학을 사랑해 현재까지 문학을 업으로 삼아온 내게 안타깝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내게 문학은 휴식이 아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아니더라도 문학을 휴식의 벗으로 삼는 사람은 그렇게 많진 않은 것 같다. 아무래도 책보다는 텔레비전이나 영화가 보기 쉽고, 게임을 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게 더 재미있다. 그도 아니면 가까운 사람과 술을 마시거나 혼자서 한숨 깊게 자는 게 나을 것이다. 그사이에 책과 문학이 끼일 자리가 있을까. 종이에 인쇄된 활자를 애써 읽고 머릿속에 정리하고 그것으로 새로운 사고와 상상, 논리를 갖추는 일은 역시나 휴식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지음, 난다 / 배경.@prasannasnap
시집으로서는 귀하게도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책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의 시인 박준의 첫 번째 산문집을 읽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는 긴 제목의 책이다. 박준의 시집은 순한 정서와 청량한 시어로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의 산문은 어떤 색깔일까. 나는 진작부터 휴식을 취할 수 없는 태도와 입장으로 책장을 여는 것이다.
책은 단정한 올리브그린 표지로 얼굴을 대신한다. 더도 덜도 아닌 그림 한 폭이 중앙에 위치해 있는데, 어느 호수의 보트 위에서 여자는 노를 잡고 남자는 하모니카를 분다. 특이한 건 그림 속 인물에 표정이 없다는 것이다. 화가의 의도된 붓질로 사라진 표정이 궁금하다. 글과 그림은 각각의 작가(박준, Gideon Rubin) 개별적 작품이지만, 어쩐지 그림의 숨은 표정을 책 속의 문장들이 담당하고 있을 것만 같아, 빠르게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시인 박준의 문장 속에서 충분히 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주로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시거나, 국내 어느 도시로 홀로 여행을 떠나거나, 미열에 시달리며 푹푹 잠이 든다. 세 가지 행동 모두 나에게는 적절한 휴식처럼 느껴졌다. “문득 삶이 막막해지거나 아득해질 때 비슷한 상황에 놓친 친구들과 함께 마시는 술은 큰 위안이 된다”라는 문장은 뭐 하나 까다로운 수식 없이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라는 문장은 여행의 착한 알리바이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그 의원을 다니면서 아무리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낫지 않는 병이 있었다. 아픈 곳도, 아픈 일도 점점 많아지는 병, 나는 그 병을 ‘엄마 병’이라고 불렀다” 이 문장은 어디 아픈 데도 없는데도 몸 속 한구석을 알싸하게 한다.
책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늦은 밤 떠올리는 생각들의 대부분은 / 나를 곧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박준의 산문집을 읽은 것은 출근길 버스에서였지만, 그곳에서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음으로써 옆 사람에게 고개를 기대며 깊게 잠든 것만큼이나 충만한 휴식을 취한 것 같다. 좋은 문장은 사람을 쉴 수 있게 한다. 좋은 문장으로 얻은 휴식은 나를 보다 좋은 사람이 되게 할 것만 같다. 좋은 사람일 것이 분명한 시인의 문장들은 몇몇 구절을 통해 읽는 이의 눈시울을 건드리기도 한다. 제목대로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무엇도 달라지지 않을 내일을 위해 우리는 조금 울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속으로 울고 웃으며 나는 충분히 쉬었다.
시인, 에세이스트, 출판편집자.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했으며 2011년에는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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