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이런 현실은 구성원들의 여가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60년대 한국 문단의 기린아로 평가받던 김승옥의 작품에서도 이런 세태가 잘 드러난다.
초가을, 토요일 오후. 날씨 더럽게 좋다. 그런데 할 일이 있어야지. 교문 곁엔 산악반이 주말 등산을 위해서 전세 내온 버스가 한 대 서 있다. 등산복을 입고 륙색을 짊어진 학생들이 차에 오르고 있다. 제기랄, 산악반에나 가입해 놓을걸. 그렇지만 산악반의 회원이 되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
-김승옥 「싸게 사들이기」 중에서
소설 속 묘사를 보면 현재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등산이라는 취미조차 과거에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파카와 등산화, 카메라 등 준비할 모든 게 다 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대다수 청년들의 취미 생활은 독서나 음악 감상 등 정적인 면에 치우쳐 있었다. 일상에서 벗어난 그럴 듯한 무언가를 즐긴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웠던 시절이었다.
▲ 1968년 여름 서울시내. 출처: http://www.dogdrip.net/50917834
그러나 시행 초기 지지부진했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정상궤도에 오르고 1964년 수출 1억불을 달성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정부는 선진국의 경제수준에 다가가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세계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고려한 것이 서양 사회에 대한 모방 심리였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등산과 같은 야외스포츠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려는 움직임으로, 이때 한국 사회에 유입된 단어가 바로 바캉스이다.
변화의 움직임에 가장 발 빠르게 대처한 것은 삼성 이병철 회장이 창간한 『중앙일보』였다. 바캉스, 레저 등의 용어를 이전부터 소개하던 중앙일보는 1966년 7월 18일자 신문 1면에 [제1회 하기 바캉스 회원 모집] 광고를 내걸었다. 선착순 1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이 행사는 회비 3,900원의 초고가 행사였다(당시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이 35원). 영어 ‘베케이션(Vacation)’이 아닌 프랑스어 ‘바캉스(Vacance)’라는 이국적이고 특별한 단어에 어울릴 법한 행사였다.
같은 해에 시작된 여름 정기휴가 제도 또한 바캉스란 단어의 유행에 불을 지폈다. 기록적인 폭우가 있었던 해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해변에는 피서를 즐기는 700만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정기휴가 제도가 아직 시기상조라 여겼던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대중의 폭발적 반응에 놀라워했다.
인천 송도 해수욕장이 신문에 사진으로 나온 것을 보고,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인파의 난잡상에 놀랐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돈이 많아서 이다지도 여가를 즐길 수 있을까 하는 부러움이 앞섰다. (중략) 요즘 레저니 바캉스니 하는 사치스러운 외래어가 유행하고 있어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고도로 자본주의가 발달한 소비형 사회를 방불케 하는 사회풍조로 온통 들떠 있는 것을 보니 돈 있는 사람의 수효가 정말 늘어난 것일까.
- 『동아일보』, 1966년 8월 11일, [피서유감]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고영복이 기고한 이 글에는 바캉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드러난다. 경제수준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개발도상국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상황인 만큼 1966년의 변화는 과도한 면이 있었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여겨왔고 개발독재정권 또한 이전까지 여가 생활을 통제하며 대중을 산업화의 역군으로 동원하려 했기에 이와 같은 바캉스 열풍은 기존의 관성과는 그 방향성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정부는 바캉스의 열풍을 끊어버릴 생각이 없었다. 겉으로는 절제를 외쳤으나 실제로는 향락과 소비로 흐르는 바캉스 문화를 방관하고 묵인하였다. 바캉스 경기로 인한 내수 효과가 막대했기 때문이다. 1972년의 경우 바캉스 인구 800만이 한 달 간 쓴 비용이 약 234억원으로 대한민국 보건 예산의 7배나 되는 액수였다.
▲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
바캉스는 평소 억압된 사회를 견뎌야만 했던 대중들의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바캉스 휴가 및 소비로 자기전시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폭압적이던 박정희의 유신도, 3S정책으로 포장한 전두환의 신군부도 1년에 한 번뿐인 바캉스 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대중과 국가권력 각자의 욕망이 합치하는 묘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바캉스였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바캉스, 욕망과 욕망의 경계'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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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캉스, 욕망과 욕망의 경계
억압된 사회를 견뎌야만 했던 대중들의 유일한 탈출구
박문국
2017-08-08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이런 현실은 구성원들의 여가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60년대 한국 문단의 기린아로 평가받던 김승옥의 작품에서도 이런 세태가 잘 드러난다.
초가을, 토요일 오후. 날씨 더럽게 좋다. 그런데 할 일이 있어야지. 교문 곁엔 산악반이 주말 등산을 위해서 전세 내온 버스가 한 대 서 있다. 등산복을 입고 륙색을 짊어진 학생들이 차에 오르고 있다. 제기랄, 산악반에나 가입해 놓을걸. 그렇지만 산악반의 회원이 되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
-김승옥 「싸게 사들이기」 중에서
소설 속 묘사를 보면 현재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등산이라는 취미조차 과거에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파카와 등산화, 카메라 등 준비할 모든 게 다 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대다수 청년들의 취미 생활은 독서나 음악 감상 등 정적인 면에 치우쳐 있었다. 일상에서 벗어난 그럴 듯한 무언가를 즐긴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웠던 시절이었다.
▲ 1968년 여름 서울시내. 출처: http://www.dogdrip.net/50917834
그러나 시행 초기 지지부진했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정상궤도에 오르고 1964년 수출 1억불을 달성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정부는 선진국의 경제수준에 다가가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세계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고려한 것이 서양 사회에 대한 모방 심리였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등산과 같은 야외스포츠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려는 움직임으로, 이때 한국 사회에 유입된 단어가 바로 바캉스이다.
변화의 움직임에 가장 발 빠르게 대처한 것은 삼성 이병철 회장이 창간한 『중앙일보』였다. 바캉스, 레저 등의 용어를 이전부터 소개하던 중앙일보는 1966년 7월 18일자 신문 1면에 [제1회 하기 바캉스 회원 모집] 광고를 내걸었다. 선착순 1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이 행사는 회비 3,900원의 초고가 행사였다(당시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이 35원). 영어 ‘베케이션(Vacation)’이 아닌 프랑스어 ‘바캉스(Vacance)’라는 이국적이고 특별한 단어에 어울릴 법한 행사였다.
▲ 1977년의 포항 송도해수욕장 ©송도동 주민센터 _http://song-do.ipohang.org
같은 해에 시작된 여름 정기휴가 제도 또한 바캉스란 단어의 유행에 불을 지폈다. 기록적인 폭우가 있었던 해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해변에는 피서를 즐기는 700만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정기휴가 제도가 아직 시기상조라 여겼던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대중의 폭발적 반응에 놀라워했다.
인천 송도 해수욕장이 신문에 사진으로 나온 것을 보고,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인파의 난잡상에 놀랐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돈이 많아서 이다지도 여가를 즐길 수 있을까 하는 부러움이 앞섰다. (중략) 요즘 레저니 바캉스니 하는 사치스러운 외래어가 유행하고 있어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고도로 자본주의가 발달한 소비형 사회를 방불케 하는 사회풍조로 온통 들떠 있는 것을 보니 돈 있는 사람의 수효가 정말 늘어난 것일까.
- 『동아일보』, 1966년 8월 11일, [피서유감]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고영복이 기고한 이 글에는 바캉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드러난다. 경제수준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개발도상국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상황인 만큼 1966년의 변화는 과도한 면이 있었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여겨왔고 개발독재정권 또한 이전까지 여가 생활을 통제하며 대중을 산업화의 역군으로 동원하려 했기에 이와 같은 바캉스 열풍은 기존의 관성과는 그 방향성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정부는 바캉스의 열풍을 끊어버릴 생각이 없었다. 겉으로는 절제를 외쳤으나 실제로는 향락과 소비로 흐르는 바캉스 문화를 방관하고 묵인하였다. 바캉스 경기로 인한 내수 효과가 막대했기 때문이다. 1972년의 경우 바캉스 인구 800만이 한 달 간 쓴 비용이 약 234억원으로 대한민국 보건 예산의 7배나 되는 액수였다.
▲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
바캉스는 평소 억압된 사회를 견뎌야만 했던 대중들의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바캉스 휴가 및 소비로 자기전시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폭압적이던 박정희의 유신도, 3S정책으로 포장한 전두환의 신군부도 1년에 한 번뿐인 바캉스 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대중과 국가권력 각자의 욕망이 합치하는 묘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바캉스였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바캉스, 욕망과 욕망의 경계'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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