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내는 내게 책 한 권을 소개해 주었다. 김형석의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이었다. 2016년에 출간된 이 책은 철학자 김형석이 97세에 쓴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인간의 나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또한 나 자신의 나이를 생각한다.
이제 내 나이는 오십이다. 만약 내가 이 책의 저자처럼 백 년을 살게 된다면, 지금 나는 인생의 정중앙에 서 있는 셈이다. 김형석은 60세에서 75세를 인생의 황금기로 본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인생의 황금기에 들어서지 못한 것이며, 오히려 인생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나이 오십을 인생의 중간으로 보는 것은 합당한 일일까?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고는 해도 백 년을 사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며, 또한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렇듯 각자가 자신만의 생을 갖는다고 할 때, 오십을 인생의 중간으로 볼 수 있을까? 가령 팔십을 살게 될 사람에게 오십이 어떻게 중간일 수 있을까?
하지만 김형석이 80세 이후를 인생의 마지막 노년기로 따로 취급하듯, 우리는 성인이 되기 이전의 시기를 인생에서 감산하거나 따로 취급할 필요가 있다. 태어나서 아직 독립된 존재가 아닌 시기를 이처럼 따로 취급할 경우, 우리는 오십을 인생의 중간으로 볼 수도 있다. 짧게 살고 가는 자들의 불행을 인간으로서 온전히 직시하는 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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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일에 휴식이 필요하듯 인생의 중간인 나이 오십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blitzer / @joannakosinska
죽음이 영원한 안식이라고 했을 때, 죽음을 한쪽 끝으로 하는 인생의 중간이란 또한 무엇일까? 이 중간에도 휴식이 필요할까? 모든 일에 중간 휴식이 있어야 하듯이, 혹은 '중간에 쉰다'는 일상적인 말도 있듯이, 인생이라는 장기 사업에도 중간 휴식이 필요할까? 만약 필요하다면 그 시점은 바로 나이 오십일 것이다. 금방 이 나이를 인생의 중간이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인간이 인생을 단 한 번 중간에 쉬어가야 한다면, 오십이 바로 그 나이다.
물론 쉬어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평생 일만 하다가는 사람이 있듯이. 알다시피 '일'은 인생을 대강 육십 전후로 나눈다. 오늘날 인간에게 행복의 원천이라기보다는 생계 수단이 되어버린 이 일이 인생을 이처럼 가차 없이 나누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자연스럽지도 바람직스럽지도 않다.
그렇다고 일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생을 나눌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제안하려는 것이다. 이제 인생을 오십 전후로 나누어보자. 그리고 이제까지의 삶과 앞으로의 삶을 위해 충분한 휴식에 들어가 보자. 일을 쉬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일이 끝나고, 온갖 오락들에 매몰되지 않고서, 나를 위해 그리고 내 삶의 동반자들을 위해 생각하고 귀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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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은 마침표와도 같다. 마침표의 기능은 부유하는 의미를 완결짓는 것이다. 한국어는 끝날 때까지 잘 들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이는 꼭 한국어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 말이든 끝나지 않은 말은 여러 가지 의미의 갈림길을 갖는다. 인생에도 여러 가지 갈림길이 있듯이.
▲ 인생의 중간에서 휴식을 가질 때 비로소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다.
인생의 중간에 놓인 휴식은 지금까지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자리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지금까지의 인생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인생에서 어떤 모험을 한 것일까? 그리고 그 모험 속에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향유하고 이룬 것일까? 그 ‘누구’가 지금 내 옆에 인생의 동반자로 남아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인생의 휴식 시간에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나의 인생의 의미를 이제 이해하게 되었듯 옆 사람의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면, 이제 나의 관점이 일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내 인생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빛나는 역량을 얻게 된다면 말이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비록 보잘 것 없더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휴식의 자리는 아주 정확하고 공평한 자리여서 인생의 ‘정중앙’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장수의 시대인 현대가 인간에게 주는 선물은 단지 오래 살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오래 살아온 오십을 중간으로 내준다는 것이다. 과거의 그 어떤 인류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선물. 이 선물이 진정 선물이기 위해서 우리는 “중간에 쉬어가야 한다”라는 말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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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대한 생각 : 인생의 휴식
얼마 전 아내는 내게 책 한 권을 소개해 주었다. 김형석의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이었다. 2016년에 출간된 이 책은 철학자 김형석이 97세에 쓴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인간의 나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민
2017-08-03
인생의 휴식
▲ 『백년을 살아보니』 김형석 지음, 덴스토리
얼마 전 아내는 내게 책 한 권을 소개해 주었다. 김형석의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이었다. 2016년에 출간된 이 책은 철학자 김형석이 97세에 쓴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인간의 나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또한 나 자신의 나이를 생각한다.
이제 내 나이는 오십이다. 만약 내가 이 책의 저자처럼 백 년을 살게 된다면, 지금 나는 인생의 정중앙에 서 있는 셈이다. 김형석은 60세에서 75세를 인생의 황금기로 본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인생의 황금기에 들어서지 못한 것이며, 오히려 인생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나이 오십을 인생의 중간으로 보는 것은 합당한 일일까?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고는 해도 백 년을 사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며, 또한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렇듯 각자가 자신만의 생을 갖는다고 할 때, 오십을 인생의 중간으로 볼 수 있을까? 가령 팔십을 살게 될 사람에게 오십이 어떻게 중간일 수 있을까?
하지만 김형석이 80세 이후를 인생의 마지막 노년기로 따로 취급하듯, 우리는 성인이 되기 이전의 시기를 인생에서 감산하거나 따로 취급할 필요가 있다. 태어나서 아직 독립된 존재가 아닌 시기를 이처럼 따로 취급할 경우, 우리는 오십을 인생의 중간으로 볼 수도 있다. 짧게 살고 가는 자들의 불행을 인간으로서 온전히 직시하는 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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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일에 휴식이 필요하듯 인생의 중간인 나이 오십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blitzer / @joannakosinska
죽음이 영원한 안식이라고 했을 때, 죽음을 한쪽 끝으로 하는 인생의 중간이란 또한 무엇일까? 이 중간에도 휴식이 필요할까? 모든 일에 중간 휴식이 있어야 하듯이, 혹은 '중간에 쉰다'는 일상적인 말도 있듯이, 인생이라는 장기 사업에도 중간 휴식이 필요할까? 만약 필요하다면 그 시점은 바로 나이 오십일 것이다. 금방 이 나이를 인생의 중간이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인간이 인생을 단 한 번 중간에 쉬어가야 한다면, 오십이 바로 그 나이다.
물론 쉬어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평생 일만 하다가는 사람이 있듯이. 알다시피 '일'은 인생을 대강 육십 전후로 나눈다. 오늘날 인간에게 행복의 원천이라기보다는 생계 수단이 되어버린 이 일이 인생을 이처럼 가차 없이 나누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자연스럽지도 바람직스럽지도 않다.
그렇다고 일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생을 나눌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제안하려는 것이다. 이제 인생을 오십 전후로 나누어보자. 그리고 이제까지의 삶과 앞으로의 삶을 위해 충분한 휴식에 들어가 보자. 일을 쉬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일이 끝나고, 온갖 오락들에 매몰되지 않고서, 나를 위해 그리고 내 삶의 동반자들을 위해 생각하고 귀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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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은 마침표와도 같다. 마침표의 기능은 부유하는 의미를 완결짓는 것이다. 한국어는 끝날 때까지 잘 들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이는 꼭 한국어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 말이든 끝나지 않은 말은 여러 가지 의미의 갈림길을 갖는다. 인생에도 여러 가지 갈림길이 있듯이.
▲ 인생의 중간에서 휴식을 가질 때 비로소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다.
인생의 중간에 놓인 휴식은 지금까지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자리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지금까지의 인생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인생에서 어떤 모험을 한 것일까? 그리고 그 모험 속에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향유하고 이룬 것일까? 그 ‘누구’가 지금 내 옆에 인생의 동반자로 남아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인생의 휴식 시간에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나의 인생의 의미를 이제 이해하게 되었듯 옆 사람의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면, 이제 나의 관점이 일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내 인생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빛나는 역량을 얻게 된다면 말이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비록 보잘 것 없더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휴식의 자리는 아주 정확하고 공평한 자리여서 인생의 ‘정중앙’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장수의 시대인 현대가 인간에게 주는 선물은 단지 오래 살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오래 살아온 오십을 중간으로 내준다는 것이다. 과거의 그 어떤 인류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선물. 이 선물이 진정 선물이기 위해서 우리는 “중간에 쉬어가야 한다”라는 말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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