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소설가 권여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소설에서 ‘음식’에 대한 묘사가 자세히 나오지 않으면 너무 답답하다고 말했다. 무엇을 먹는지, 어떻게 만들어진 요리를 먹는지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알 수가 없다고. 그러고 보니 권여선 작가의 작품 속에는 음식에 대한 묘사가 유난히 구체적이고 생생했다. 인물들이 먹는 모습을 상상하고 음식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를 음미하노라면, 소설 속 그들이 마치 우리 주변의 살아있는 실제 인물처럼 느껴지곤 했다. 바로 이것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누구와 함께 먹는지를 안다는 것. 이는 그 사람과 친밀해지는 최고의 길잡이가 된다.
맛있는 음식은 일상의 모든 스트레스를 한번에 날려버린다. 각종 요리 프로그램이 범람하고, ‘맛집’을 검색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이유 또한 맛있는 음식만이 지닌 강력한 치유의 힘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음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다른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얻기 쉽다는 장점도 있다. 예컨대 멋진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도 해야 하고 시간과 돈도 많이 들지만, 맛있는 한 끼를 먹는 것은 그에 비해 훨씬 쉽고 간단하다. 요리를 직접 하기는 어렵고 번거로우니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다른 사람이 요리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리만족을 느낀다.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음식은 강렬한 추억의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요리에 얽힌 파란만장한 사연을 담은 영화도 좋고 요리하는 모습과 그 요리를 즉석에서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먹방’ 예능프로그램도 재미있지만, 그래도 우리 마음속에 가장 강렬한 추억을 남기는 것은 누군가와 실제로 함께 먹은 음식이다.
돌아보면 흥겨운 시간에는 정성 가득한 요리가 있었다. 얼마 전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장어구이를 먹었다. 엄마는 이모들과 오랜만에 남해로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현지에서 직접 장어를 주문해놓으셨다고 했다. 현지 직송이라 가격이 싸고 중간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기에 더욱 싱싱하다는 말씀도 덧붙였다. 나는 “나가서 먹자”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엄마가 모처럼 요리를 한다고 하는데 말리기 어려웠다. 외식을 권유하고 싶었던 이유는 부모님과 여동생들, 제부들, 조카들까지 다 모이면 무려 11명이나 되는데 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려면 엄마가 얼마나 힘드실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두 모여 조금씩 도우며 상을 차리자, 빠른 시간에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밥보다는 빵이나 과자를 좋아하는 어린 조카들도 장어구이 앞에서는 정신을 못 차렸다. 엄마는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말씀했다. “이걸 우리 가족 다 같이 음식점에서 먹었다고 생각해 봐라. 돈이 얼마나 많이 들겠냐.” 물론 맞는 말씀이다. 하지만 집에서 요리하여 절약한 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엄마가 만들어준 최고의 요리 덕분에 우리 모두가 더없이 행복했다는 점이다. 손맛을 담아 정성껏 요리한 음식 하나로 무려 열한 명의 사람이 빛나는 추억을 만들었다. 그날 분명히 “나는 바빠서 못 간다”고 미리 귀띔했던 제부도 “맛있는 장어구이 우리가 다 먹어버린다”라는 장난스런 협박에 냉큼 달려왔다. “현서 아빠, 바쁘다면서 어떻게 왔어요?” “우리끼리만 맛있게 먹고, 재미있게 놀까 봐 질투 나서 달려왔구나?” 우리는 이렇게 제부에게 농담을 던지며 또 한번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맛집 프로그램이나 요리 프로그램을 아무리 열심히 시청해도, ‘우리 엄마의 요리, 내가 먹었던 요리’는 나오지 않는다. 설령 비슷한 음식이라도 우리 마음속에는 저마다 나만의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는 요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요리를 추억하는 이유는 유명한 셰프나 텔레비전에서 나온 맛집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 그 사람과 함께 한 음식이라는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요리라는 행위에는 삶의 모든 구절과 갈피가 다 묻어 있다. 요리를 할 때 우리는 오감을 다 사용한다. 온갖 채소와 곡식의 풍미를 코로 들이마시고, 양념을 넣을 때마다 미각을 사용하고, 손의 촉각을 한껏 활용하여 피부에 닿는 재료의 싱싱함을 느낀다. 보글보글 끓고, 사각사각 썰리는 음식의 소리를 듣는다. 양파와 파를 송송 썰어 넣으며, 마침내 먹음직스럽게 완성되어가는 요리의 변신과정을 지켜보기도 한다. 요리를 하다 보면 ‘삶도, 사랑도, 일도, 우정도 요리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샘솟는다. 요리는 더없이 정직하기 때문이다. 소금을 넣었는데 짜지 않을 수가 없으며, 오래오래 끓였는데 맛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삶과 사랑, 일과 우정은 자꾸 우리를 속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생각처럼 잘 안 풀릴 때가 많다.
▲ @carolineattwood
삶이 요리 같다면, 요리처럼 그 과정을 정직하게 올올이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요리는 결과뿐 아니라 과정이 아름다워야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게임이다. 힘겨운 노동으로서의 요리가 아닌, 타인의 시선에 짓눌려 ‘맛없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에 휩싸이는 요리가 아닌,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 세상에 하나뿐인 요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엄청난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대단한 칭찬을 받지 않아도, ‘내가 만든 요리가 최고로 맛있네’라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나만의 맞춤 요리를 해보고 싶다. 나를 위한 요리를 한다는 것은 결국 꾸밈없는 나 자신과 만나는 일이므로. 그런 다음 진심으로 ‘맛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 다음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만든 요리를 함께하고 싶다. 그 만족감이 과연 언제쯤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프라이팬과 냄비를 꺼내 나만의 ‘제멋대로 뚝딱, 엉망진창이지만 그래도 맛있는’ 요리를 해보고 싶어진다. 언젠가는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 그들에게 다정하고 믿음직스런 일일 셰프가 될 수 있도록.
작가.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월간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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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음식을 통해 사람의 몸과 마음과 소통하다
예전에 소설가 권여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소설에서 ‘음식’에 대한
정여울
2017-07-27
요리, 음식을 통해 사람의 몸과 마음과 소통하다
예전에 소설가 권여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소설에서 ‘음식’에 대한 묘사가 자세히 나오지 않으면 너무 답답하다고 말했다. 무엇을 먹는지, 어떻게 만들어진 요리를 먹는지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알 수가 없다고. 그러고 보니 권여선 작가의 작품 속에는 음식에 대한 묘사가 유난히 구체적이고 생생했다. 인물들이 먹는 모습을 상상하고 음식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를 음미하노라면, 소설 속 그들이 마치 우리 주변의 살아있는 실제 인물처럼 느껴지곤 했다. 바로 이것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누구와 함께 먹는지를 안다는 것. 이는 그 사람과 친밀해지는 최고의 길잡이가 된다.
맛있는 음식은 일상의 모든 스트레스를 한번에 날려버린다. 각종 요리 프로그램이 범람하고, ‘맛집’을 검색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이유 또한 맛있는 음식만이 지닌 강력한 치유의 힘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음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다른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얻기 쉽다는 장점도 있다. 예컨대 멋진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도 해야 하고 시간과 돈도 많이 들지만, 맛있는 한 끼를 먹는 것은 그에 비해 훨씬 쉽고 간단하다. 요리를 직접 하기는 어렵고 번거로우니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다른 사람이 요리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리만족을 느낀다.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음식은 강렬한 추억의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요리에 얽힌 파란만장한 사연을 담은 영화도 좋고 요리하는 모습과 그 요리를 즉석에서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먹방’ 예능프로그램도 재미있지만, 그래도 우리 마음속에 가장 강렬한 추억을 남기는 것은 누군가와 실제로 함께 먹은 음식이다.
돌아보면 흥겨운 시간에는 정성 가득한 요리가 있었다. 얼마 전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장어구이를 먹었다. 엄마는 이모들과 오랜만에 남해로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현지에서 직접 장어를 주문해놓으셨다고 했다. 현지 직송이라 가격이 싸고 중간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기에 더욱 싱싱하다는 말씀도 덧붙였다. 나는 “나가서 먹자”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엄마가 모처럼 요리를 한다고 하는데 말리기 어려웠다. 외식을 권유하고 싶었던 이유는 부모님과 여동생들, 제부들, 조카들까지 다 모이면 무려 11명이나 되는데 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려면 엄마가 얼마나 힘드실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두 모여 조금씩 도우며 상을 차리자, 빠른 시간에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밥보다는 빵이나 과자를 좋아하는 어린 조카들도 장어구이 앞에서는 정신을 못 차렸다. 엄마는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말씀했다. “이걸 우리 가족 다 같이 음식점에서 먹었다고 생각해 봐라. 돈이 얼마나 많이 들겠냐.” 물론 맞는 말씀이다. 하지만 집에서 요리하여 절약한 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엄마가 만들어준 최고의 요리 덕분에 우리 모두가 더없이 행복했다는 점이다. 손맛을 담아 정성껏 요리한 음식 하나로 무려 열한 명의 사람이 빛나는 추억을 만들었다. 그날 분명히 “나는 바빠서 못 간다”고 미리 귀띔했던 제부도 “맛있는 장어구이 우리가 다 먹어버린다”라는 장난스런 협박에 냉큼 달려왔다. “현서 아빠, 바쁘다면서 어떻게 왔어요?” “우리끼리만 맛있게 먹고, 재미있게 놀까 봐 질투 나서 달려왔구나?” 우리는 이렇게 제부에게 농담을 던지며 또 한번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맛집 프로그램이나 요리 프로그램을 아무리 열심히 시청해도, ‘우리 엄마의 요리, 내가 먹었던 요리’는 나오지 않는다. 설령 비슷한 음식이라도 우리 마음속에는 저마다 나만의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는 요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요리를 추억하는 이유는 유명한 셰프나 텔레비전에서 나온 맛집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 그 사람과 함께 한 음식이라는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요리라는 행위에는 삶의 모든 구절과 갈피가 다 묻어 있다. 요리를 할 때 우리는 오감을 다 사용한다. 온갖 채소와 곡식의 풍미를 코로 들이마시고, 양념을 넣을 때마다 미각을 사용하고, 손의 촉각을 한껏 활용하여 피부에 닿는 재료의 싱싱함을 느낀다. 보글보글 끓고, 사각사각 썰리는 음식의 소리를 듣는다. 양파와 파를 송송 썰어 넣으며, 마침내 먹음직스럽게 완성되어가는 요리의 변신과정을 지켜보기도 한다. 요리를 하다 보면 ‘삶도, 사랑도, 일도, 우정도 요리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샘솟는다. 요리는 더없이 정직하기 때문이다. 소금을 넣었는데 짜지 않을 수가 없으며, 오래오래 끓였는데 맛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삶과 사랑, 일과 우정은 자꾸 우리를 속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생각처럼 잘 안 풀릴 때가 많다.
▲ @carolineattwood
삶이 요리 같다면, 요리처럼 그 과정을 정직하게 올올이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요리는 결과뿐 아니라 과정이 아름다워야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게임이다. 힘겨운 노동으로서의 요리가 아닌, 타인의 시선에 짓눌려 ‘맛없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에 휩싸이는 요리가 아닌,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 세상에 하나뿐인 요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엄청난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대단한 칭찬을 받지 않아도, ‘내가 만든 요리가 최고로 맛있네’라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나만의 맞춤 요리를 해보고 싶다. 나를 위한 요리를 한다는 것은 결국 꾸밈없는 나 자신과 만나는 일이므로. 그런 다음 진심으로 ‘맛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 다음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만든 요리를 함께하고 싶다. 그 만족감이 과연 언제쯤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프라이팬과 냄비를 꺼내 나만의 ‘제멋대로 뚝딱, 엉망진창이지만 그래도 맛있는’ 요리를 해보고 싶어진다. 언젠가는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 그들에게 다정하고 믿음직스런 일일 셰프가 될 수 있도록.
작가.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월간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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