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집에 주문 전화를 걸기 전에 사람들이 하는 고민이 있다. “짜장면으로 할까, 짬뽕으로 할까?”도 있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식사로 할까, 요리로 할까?” 사실 중국집 메뉴가 그렇게 분류되어 있다. 가령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우리 동네 중국집 메뉴표는 왼쪽은 ‘식사류’, 오른쪽은 ‘요리류’라고 되어 있다. 이렇듯 중국집 메뉴는 식사와 요리를 구분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구분에 익숙하다. 매일 때가 되면 끼니를 하는 것은 식사다. 그럴 때 우리는 보통 ‘밥’을 먹는다고 말하며 요리와 구분한다. 요리는 ‘밥’보다 더 특별한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중국집 메뉴의 구분 자체가 이러한 일상적 구분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밥과 요리가 이렇듯 구분되어 있다고 할 때, 일상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요리가 아니라 밥이었고, 중요한 물음은 이런 것이었다. “오늘의 반찬은 무엇일까?” “오늘의 국이나 찌개는 무엇일까?” 이것은 물론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의 질문이 아니다.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의 질문은 이렇다. “오늘은 무슨 반찬을 할까?” “오늘은 무슨 국이나 찌개를 할까?” 알다시피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여자였다. 이 고민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고민이었는데, 왜냐하면 밥은 매일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아내는 내게 ‘밥 공장’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밥하고 요리하는 것도 일이지만, 오늘은 무슨 반찬, 무슨 찌개를 할지 매일 정하는 것도 정말 골치 아픈 일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2
매일 같은 사람이 차리는 밥을 먹고 자라나는 아이에게는 어떤 입맛이 생기게 된다. 같은 찌개나 반찬이라도 ‘요리사’가 다르므로 집집마다 그 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한국 사람의 공통 입맛이라는 게 있기는 하겠지만(고추장이나 김치 같은), 각 가정의 입맛이라는 것도 있다. 그렇기에 “김치는 역시 우리집 김치가 최고야!”라든가 “역시 찌개는 우리 엄마 게 최고야!”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이 입맛의 원천은 무엇일까? 예로부터 집안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어머니였으므로, 아이의 입맛은 어머니의 손맛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외식이 드물었던 옛 시절 사람들의 입맛은 어머니의 손맛에 달려 있었고, 집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의 각 가정들은 입맛의 울타리이자 안식처였다. 오랜 세월 한국인들은 그렇게 가정 안에서 어머니의 손맛을 통해 한국인의 보수적인 입맛을 굳혀왔다.
3
80년대에 대학을 다닐 때였다. 서울에 사는 한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새로 문을 연 ‘롯데리아’에 갔다 온 이야기를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역시 서울에 살았지만 롯데리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나에게 그 말은 큰 수수께끼이자 신비로움으로 다가왔다. 알다시피 오늘날 롯데리아는 전혀 신기한 것이 아니지만, 나는 햄버거에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가끔 밥을 먹는 대신 아내와 같이 햄버거를 시켜 먹기도 하지만, 이는 나의 반백 년 인생에서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신문물’에 금방 적응했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이 입맛이 없을 때 어머니의 손맛이 해결책이 되지 않는 일이 빈번해졌다. 번거로운 외식도 해결책이 아니다. 전화 한 통이면 신속하게 배달되는 햄버거나 피자, 치킨이 바로 그 해결책이다. 아이들은 이러한 해결책에 금방 적응했는데, 이런 것들은 채소나 버섯처럼 적응을 하는 데 큰 노력이 필요한 음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맛은 어머니의 손맛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밥보다 햄버거, 피자나 치킨 같은 것들을 찾기 시작하면서 입맛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입맛의 원천은 어머니의 손을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입맛의 세계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동요하는 이 세계를 좀 더 들여다보자.
4
오늘날 요리를 포함한 집안일을 꼭 여자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새로운 관념이 옛 관념과 다투며 공존하고 있다. 이제 요리는 더이상 아내만의 몫이 아니다. 남편이 집안 살림을 맡거나 요리에 취미가 있다면 남편이 요리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자가 요리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겠지만, 집에서 남자가 요리를 한다는 것이 더이상 이상한 일로 취급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머니의 손맛’이라는 관념은 약해질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미 그것에 대한 향수도 찾아왔다. 오늘날 “어머니가 차려준 집밥” 같은 표현이 새롭게 유행하고 있다. 요리는 평등의 새로운 시험대이기도 하지만 향수의 새로운 원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알다시피 저 “어머니가 차려준 집밥”은 실제로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혼자서도 “집밥”을 간편하게 요리해 먹는 수 있는 요리법의 일반화를 가리킨다.
입맛이 동요하는 가운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인상적인 일은 바로 취미로서의 요리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우선 다양한 맛을 향유하려는 욕망의 부상과 관련이 있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외식이 한식이나 중식에 한정되지 않는다. 세계의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식당이 늘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은 가족이나 연인이나 친구와 함께 이를 즐기기 위한 맛집 순례를 한다. 더 나아가 남들이 한 요리를 즐길 뿐 아니라 직접 요리하여 지인들과 함께 나누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더구나 요즘은 요리가 취미인 남자도 많아졌다.
영어에서 취미를 뜻하는 말은 ‘Taste’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맛’을 뜻하는 말이다. 이외에도 ‘미각’이나 ‘입맛’을 뜻하기도 하고, 맛의 영역을 넘어 미적인 감식력을 뜻하기도 한다. 철학에서는 바로 이 감식력을 ‘취미’라고 부른다. 사전은 미각과 입맛을 구분하지 않지만, 나는 이 둘을 구분하고 싶다. 왜냐하면 ‘미각’이 다양한 맛을 판별하는 진취적인 능력이라고 한다면 ‘입맛’은 집밥에 길들여진 보수화된 취미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요리의 나라 프랑스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체계적인 미각 교육을 받는다. 이 교육은 다양한 맛을 감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이 교육은 맛의 영역에서 취미 교육인 것이다. 취미로서의 요리가 프랑스의 미각교육과 마찬가지로 개방적인 반면, 패스트푸드와 전통적 밥상은 미각에 있어 폐쇄적이다. 전통적 밥상은 취미를 길들여 입맛을 낳는다.
얼마 전 『반찬이 필요 없는 밥요리』라는 요리책이 출간되었다. 알다시피 한국인은 ‘밥과 반찬’이라는 오랫동안 정형화된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이러한 식습관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 요리 모험의 시대에서, 이 용감한 모험이 새로운 ‘식사’ 문화를 발굴하기를, 현대인의 생활에 적합한 새로운 한 끼 식사들을 발명하기 바란다.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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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대한 생각 : 요리의 모험과 식사
이성민
2017-07-06
요리의 모험과 식사
1
▲ Photo credit iGELig via Foter.com (왼)
중국집에 주문 전화를 걸기 전에 사람들이 하는 고민이 있다. “짜장면으로 할까, 짬뽕으로 할까?”도 있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식사로 할까, 요리로 할까?” 사실 중국집 메뉴가 그렇게 분류되어 있다. 가령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우리 동네 중국집 메뉴표는 왼쪽은 ‘식사류’, 오른쪽은 ‘요리류’라고 되어 있다. 이렇듯 중국집 메뉴는 식사와 요리를 구분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구분에 익숙하다. 매일 때가 되면 끼니를 하는 것은 식사다. 그럴 때 우리는 보통 ‘밥’을 먹는다고 말하며 요리와 구분한다. 요리는 ‘밥’보다 더 특별한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중국집 메뉴의 구분 자체가 이러한 일상적 구분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밥과 요리가 이렇듯 구분되어 있다고 할 때, 일상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요리가 아니라 밥이었고, 중요한 물음은 이런 것이었다. “오늘의 반찬은 무엇일까?” “오늘의 국이나 찌개는 무엇일까?” 이것은 물론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의 질문이 아니다.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의 질문은 이렇다. “오늘은 무슨 반찬을 할까?” “오늘은 무슨 국이나 찌개를 할까?” 알다시피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여자였다. 이 고민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고민이었는데, 왜냐하면 밥은 매일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아내는 내게 ‘밥 공장’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밥하고 요리하는 것도 일이지만, 오늘은 무슨 반찬, 무슨 찌개를 할지 매일 정하는 것도 정말 골치 아픈 일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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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은 사람이 차리는 밥을 먹고 자라나는 아이에게는 어떤 입맛이 생기게 된다. 같은 찌개나 반찬이라도 ‘요리사’가 다르므로 집집마다 그 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한국 사람의 공통 입맛이라는 게 있기는 하겠지만(고추장이나 김치 같은), 각 가정의 입맛이라는 것도 있다. 그렇기에 “김치는 역시 우리집 김치가 최고야!”라든가 “역시 찌개는 우리 엄마 게 최고야!”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이 입맛의 원천은 무엇일까? 예로부터 집안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어머니였으므로, 아이의 입맛은 어머니의 손맛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외식이 드물었던 옛 시절 사람들의 입맛은 어머니의 손맛에 달려 있었고, 집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의 각 가정들은 입맛의 울타리이자 안식처였다. 오랜 세월 한국인들은 그렇게 가정 안에서 어머니의 손맛을 통해 한국인의 보수적인 입맛을 굳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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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대학을 다닐 때였다. 서울에 사는 한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새로 문을 연 ‘롯데리아’에 갔다 온 이야기를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역시 서울에 살았지만 롯데리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나에게 그 말은 큰 수수께끼이자 신비로움으로 다가왔다. 알다시피 오늘날 롯데리아는 전혀 신기한 것이 아니지만, 나는 햄버거에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가끔 밥을 먹는 대신 아내와 같이 햄버거를 시켜 먹기도 하지만, 이는 나의 반백 년 인생에서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신문물’에 금방 적응했다. 언젠가부터 아이들이 입맛이 없을 때 어머니의 손맛이 해결책이 되지 않는 일이 빈번해졌다. 번거로운 외식도 해결책이 아니다. 전화 한 통이면 신속하게 배달되는 햄버거나 피자, 치킨이 바로 그 해결책이다. 아이들은 이러한 해결책에 금방 적응했는데, 이런 것들은 채소나 버섯처럼 적응을 하는 데 큰 노력이 필요한 음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맛은 어머니의 손맛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밥보다 햄버거, 피자나 치킨 같은 것들을 찾기 시작하면서 입맛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입맛의 원천은 어머니의 손을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입맛의 세계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동요하는 이 세계를 좀 더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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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요리를 포함한 집안일을 꼭 여자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새로운 관념이 옛 관념과 다투며 공존하고 있다. 이제 요리는 더이상 아내만의 몫이 아니다. 남편이 집안 살림을 맡거나 요리에 취미가 있다면 남편이 요리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자가 요리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겠지만, 집에서 남자가 요리를 한다는 것이 더이상 이상한 일로 취급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머니의 손맛’이라는 관념은 약해질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미 그것에 대한 향수도 찾아왔다. 오늘날 “어머니가 차려준 집밥” 같은 표현이 새롭게 유행하고 있다. 요리는 평등의 새로운 시험대이기도 하지만 향수의 새로운 원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알다시피 저 “어머니가 차려준 집밥”은 실제로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혼자서도 “집밥”을 간편하게 요리해 먹는 수 있는 요리법의 일반화를 가리킨다. 입맛이 동요하는 가운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인상적인 일은 바로 취미로서의 요리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우선 다양한 맛을 향유하려는 욕망의 부상과 관련이 있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외식이 한식이나 중식에 한정되지 않는다. 세계의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식당이 늘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은 가족이나 연인이나 친구와 함께 이를 즐기기 위한 맛집 순례를 한다. 더 나아가 남들이 한 요리를 즐길 뿐 아니라 직접 요리하여 지인들과 함께 나누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더구나 요즘은 요리가 취미인 남자도 많아졌다.
영어에서 취미를 뜻하는 말은 ‘Taste’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맛’을 뜻하는 말이다. 이외에도 ‘미각’이나 ‘입맛’을 뜻하기도 하고, 맛의 영역을 넘어 미적인 감식력을 뜻하기도 한다. 철학에서는 바로 이 감식력을 ‘취미’라고 부른다. 사전은 미각과 입맛을 구분하지 않지만, 나는 이 둘을 구분하고 싶다. 왜냐하면 ‘미각’이 다양한 맛을 판별하는 진취적인 능력이라고 한다면 ‘입맛’은 집밥에 길들여진 보수화된 취미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요리의 나라 프랑스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체계적인 미각 교육을 받는다. 이 교육은 다양한 맛을 감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이 교육은 맛의 영역에서 취미 교육인 것이다. 취미로서의 요리가 프랑스의 미각교육과 마찬가지로 개방적인 반면, 패스트푸드와 전통적 밥상은 미각에 있어 폐쇄적이다. 전통적 밥상은 취미를 길들여 입맛을 낳는다.
얼마 전 『반찬이 필요 없는 밥요리』라는 요리책이 출간되었다. 알다시피 한국인은 ‘밥과 반찬’이라는 오랫동안 정형화된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이러한 식습관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 요리 모험의 시대에서, 이 용감한 모험이 새로운 ‘식사’ 문화를 발굴하기를, 현대인의 생활에 적합한 새로운 한 끼 식사들을 발명하기 바란다.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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