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가 열렸다. 프리미어로 선보이는 전 세계 19편의 경쟁작 중 눈길을 끄는 영화 한 편이 있었다. 헝가리 감독 코르넬 문드럭초가 연출한 <주피터스 문>은 국경을 넘다 총에 맞은 시리아 소년 아리안이 공중부양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다소 말이 안 되는 설정의 영화였다. 총을 맞고 ‘부활’한 소년은 테러가 일어나고 난민들이 쫓기는 ‘유혈’의 도심을 굽어 내려다본다. 물론 그 특별한 능력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영웅들처럼 위험에 빠진 지구를 구하는 통쾌함은 없다. 여전히 쫓기는 슬픈 그의 곁에는 헝가리에 살고 있는 의사가 있는데, 처음 소년을 이용해 돈을 벌려던 그는 점차 위험을 감수하고 소년을 돕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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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주피터스 문> 포스터
2. 헝가리 영화 감독 코르넬 문드럭초
난민, 종교, 부활, 테러 등 다양한 소재들을 한꺼번에 담은 이 영화는 담고자 하는 이야기도 제기하는 문제도 방대하다. 영화가 끝난 후 만난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에게 영화를 통해 답변을 찾았냐고 질문 했을 때, 그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한 가지 답을 찾을 수 없더라. 단, 아리안이 헝가리에 왔을 때 그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의사 스턴이 변해가는 과정이 내겐 중요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돈을 만들기 위해 아리안의 공중부양 능력을 이용하려고 한다. 신을 믿지 않았고, 술에 절어 살았고, 시니컬하고 사랑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리안을 만나고 그는 달라진다. 누군가가 정말 난민을 위해 희생도 감수할 수 있게 된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을까.”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는 유럽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난민들을 배척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하늘을 나는 ‘천사 난민’에 대한 설정이 너무 과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주피터스 문>에는 최근 유럽사회가 끊임없이 고민하는 문제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이 급기야 소년을 공중부양까지 하게 한 건 아닐까. 이 지점과 관련해서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동화같은 영화 <르 아브르>(2011)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르 아브르는 프랑스 서북부의 항구도시인데, 영화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한 가난한 남자와 밀입국한 흑인소년의 유대를 그린다. 중년의 구두닦이 마르셀(앙드레 윌름스)은 외상값에 시달리며 가난한 삶을 꾸려가고 있지만, 그에게는 아내 아를레티(카티 오우티넨)와 함께 정을 나누는 이웃들이 있다. 그런데 아내가 심각한 병에 걸리면서 그의 일상에 불운의 기운이 찾아온다. 그때 마침 런던으로 간 엄마를 찾기 위해 밀입국한 가봉 출신의 소년 이드리사(블론딘 미구엘)를 알게 되는데, 그를 발 벗고 도와주기로 작정한다. 밀입국자를 숨겨주었다고 의심하는 경찰의 눈을 피해야 하는데다, 건강이 악화된 아내 때문에 자신마저도 진퇴양난인 상황에서 말이다.
마르셀과 그의 착한 이웃들은 이드리사를 탈출시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힘을 합치게 되는데, 그 과정을 돌아보면 사실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잘 안 된다. 말 그대로 이건 ‘너무 착해서’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싶어진다. 마르셀이 하필 이드리사를 돕는 것도 그냥 자연스럽다. 항구에서 점심을 때우려던 그는 물 속에 있는 이드리사를 발견한다. “여기가 런던인가요?”라고 묻는 이드리사에게 이곳이 르 아브르임을 알려준 그는 소년에게 먼저 “배고프니?”라며 호의를 베푼다. 구구절절한 대사가 있거나, 표정이 과하지도 않다. 그저 그렇게 눈빛 교환 몇 번으로도 서로를 알아봐주는 관계가 된다. 마르셀의 이웃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딱히 소년을 돕는 과정에서 논쟁을 하거나, 대단한 합의를 하는 대신 그들은 그냥 그렇게, 소년이 밀고자와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도록 한마음으로 협조한다. 배경자체도 연극 세트처럼 단조롭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데, 그 안에서 사람들은 소년을 돕기 위한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은 무표정으로 행사해낸다. 배우들의 얼굴은 대부분 정면의 클로즈업으로 잡히는데, 그 소리 없는 화면 속 미동없는 배우들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페이소스로 다가온다. 성격은 다르지만 마치 <주피터스 문>의 소년이 공중부양을 하고 헝가리 의사가 그를 돕기까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듯, 마르셀이 거주하는 항구도시 르 아브르에도 마찬가지로 동화같은 기적이 작용한다.
▲ <르 아브르>의 마르셀과 이드리사
물론 그건 기적이 아니라, 이미 그들 안에 존재하는 따뜻함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도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사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이웃들은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큰 욕심 없이 허름한 선술집에서 하루의 노동이 끝나고 마시는 한잔의 술에도, 아코디언 연주 하나에도 충분할 정도의 흥이 묻어나는 사람들이다. 없는 탓에 가난하고 늘 빠듯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돕는 과정에서 내가 손해 볼 것을 따져 묻지 않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을, 불행한 사람이 더 불행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를 통해서 항구도시 르 아브르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신들의 공기를 형성해나가고 있다. 대립보다는 화합, 갈등보다는 소통과 연대를 선택함으로써 엄마를 찾아가는 한 난민 소년에게 긍정과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이렇게 영화 속에 나타난 조건없는 연대에 대해 “사람을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이 잘못되어가고 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최선을 다하는지를 보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를 비롯하여 <과거가 없는 남자> <황혼의 빛> 등을 연출해왔다. 이들 작품 속 인물들은 정육공장 직원, 야간 경비원, 청소부, 자살을 시도하는 남자 등 하나같이 가난하거나 외로운 하층민이 주를 이룬다. 분명 사회적인 약자들을 그리고 있지만, 그들은 열악한 세계 속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하고 심지어 코믹하다. 그건 감독이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형성한 긍지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고된 노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불행의 다른 말로 대체되지 않으며, 그들이 다른 사람을 향해 보이는 선의 또한 어떤 대가를 위한 행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르 아브르>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추구해 온 일관된 스타일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작품에 속한다. 영화의 마지막 기적에 가까운 해피엔딩이 마치 행복 바이러스처럼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동화같지만, 우리 모두 이렇게 조건없는 원리가 작동하는 공동체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험한 세상에서도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이런 꿈같은 세상 속에 평범한 소시민적 영웅이 존재하고 있다고, 그래서 세상이 아직 살 만하다고 꾸밈없이 조용히 말해준다.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팀장. 영화 속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 즐겨 한다. 저서로 여행 에세이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과 인터뷰집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가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Cinephilo : 엄마 잃은 소년을 구하는 한 편의 동화-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르 아브르>'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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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philo : 엄마 잃은 소년을 구하는 한 편의 동화-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르 아브르>
이화정
2017-06-29
엄마 잃은 소년을 구하는 한 편의 동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르 아브르>
지난 5월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가 열렸다. 프리미어로 선보이는 전 세계 19편의 경쟁작 중 눈길을 끄는 영화 한 편이 있었다. 헝가리 감독 코르넬 문드럭초가 연출한 <주피터스 문>은 국경을 넘다 총에 맞은 시리아 소년 아리안이 공중부양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다소 말이 안 되는 설정의 영화였다. 총을 맞고 ‘부활’한 소년은 테러가 일어나고 난민들이 쫓기는 ‘유혈’의 도심을 굽어 내려다본다. 물론 그 특별한 능력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영웅들처럼 위험에 빠진 지구를 구하는 통쾌함은 없다. 여전히 쫓기는 슬픈 그의 곁에는 헝가리에 살고 있는 의사가 있는데, 처음 소년을 이용해 돈을 벌려던 그는 점차 위험을 감수하고 소년을 돕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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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주피터스 문> 포스터
2. 헝가리 영화 감독 코르넬 문드럭초
난민, 종교, 부활, 테러 등 다양한 소재들을 한꺼번에 담은 이 영화는 담고자 하는 이야기도 제기하는 문제도 방대하다. 영화가 끝난 후 만난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에게 영화를 통해 답변을 찾았냐고 질문 했을 때, 그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한 가지 답을 찾을 수 없더라. 단, 아리안이 헝가리에 왔을 때 그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의사 스턴이 변해가는 과정이 내겐 중요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돈을 만들기 위해 아리안의 공중부양 능력을 이용하려고 한다. 신을 믿지 않았고, 술에 절어 살았고, 시니컬하고 사랑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리안을 만나고 그는 달라진다. 누군가가 정말 난민을 위해 희생도 감수할 수 있게 된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을까.”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는 유럽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난민들을 배척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하늘을 나는 ‘천사 난민’에 대한 설정이 너무 과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주피터스 문>에는 최근 유럽사회가 끊임없이 고민하는 문제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이 급기야 소년을 공중부양까지 하게 한 건 아닐까. 이 지점과 관련해서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동화같은 영화 <르 아브르>(2011)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르 아브르는 프랑스 서북부의 항구도시인데, 영화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한 가난한 남자와 밀입국한 흑인소년의 유대를 그린다. 중년의 구두닦이 마르셀(앙드레 윌름스)은 외상값에 시달리며 가난한 삶을 꾸려가고 있지만, 그에게는 아내 아를레티(카티 오우티넨)와 함께 정을 나누는 이웃들이 있다. 그런데 아내가 심각한 병에 걸리면서 그의 일상에 불운의 기운이 찾아온다. 그때 마침 런던으로 간 엄마를 찾기 위해 밀입국한 가봉 출신의 소년 이드리사(블론딘 미구엘)를 알게 되는데, 그를 발 벗고 도와주기로 작정한다. 밀입국자를 숨겨주었다고 의심하는 경찰의 눈을 피해야 하는데다, 건강이 악화된 아내 때문에 자신마저도 진퇴양난인 상황에서 말이다.
마르셀과 그의 착한 이웃들은 이드리사를 탈출시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힘을 합치게 되는데, 그 과정을 돌아보면 사실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잘 안 된다. 말 그대로 이건 ‘너무 착해서’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싶어진다. 마르셀이 하필 이드리사를 돕는 것도 그냥 자연스럽다. 항구에서 점심을 때우려던 그는 물 속에 있는 이드리사를 발견한다. “여기가 런던인가요?”라고 묻는 이드리사에게 이곳이 르 아브르임을 알려준 그는 소년에게 먼저 “배고프니?”라며 호의를 베푼다. 구구절절한 대사가 있거나, 표정이 과하지도 않다. 그저 그렇게 눈빛 교환 몇 번으로도 서로를 알아봐주는 관계가 된다. 마르셀의 이웃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딱히 소년을 돕는 과정에서 논쟁을 하거나, 대단한 합의를 하는 대신 그들은 그냥 그렇게, 소년이 밀고자와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도록 한마음으로 협조한다. 배경자체도 연극 세트처럼 단조롭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데, 그 안에서 사람들은 소년을 돕기 위한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은 무표정으로 행사해낸다. 배우들의 얼굴은 대부분 정면의 클로즈업으로 잡히는데, 그 소리 없는 화면 속 미동없는 배우들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페이소스로 다가온다. 성격은 다르지만 마치 <주피터스 문>의 소년이 공중부양을 하고 헝가리 의사가 그를 돕기까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듯, 마르셀이 거주하는 항구도시 르 아브르에도 마찬가지로 동화같은 기적이 작용한다.
▲ <르 아브르>의 마르셀과 이드리사
물론 그건 기적이 아니라, 이미 그들 안에 존재하는 따뜻함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도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사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이웃들은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큰 욕심 없이 허름한 선술집에서 하루의 노동이 끝나고 마시는 한잔의 술에도, 아코디언 연주 하나에도 충분할 정도의 흥이 묻어나는 사람들이다. 없는 탓에 가난하고 늘 빠듯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돕는 과정에서 내가 손해 볼 것을 따져 묻지 않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을, 불행한 사람이 더 불행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를 통해서 항구도시 르 아브르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신들의 공기를 형성해나가고 있다. 대립보다는 화합, 갈등보다는 소통과 연대를 선택함으로써 엄마를 찾아가는 한 난민 소년에게 긍정과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이렇게 영화 속에 나타난 조건없는 연대에 대해 “사람을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이 잘못되어가고 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최선을 다하는지를 보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를 비롯하여 <과거가 없는 남자> <황혼의 빛> 등을 연출해왔다. 이들 작품 속 인물들은 정육공장 직원, 야간 경비원, 청소부, 자살을 시도하는 남자 등 하나같이 가난하거나 외로운 하층민이 주를 이룬다. 분명 사회적인 약자들을 그리고 있지만, 그들은 열악한 세계 속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하고 심지어 코믹하다. 그건 감독이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형성한 긍지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고된 노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불행의 다른 말로 대체되지 않으며, 그들이 다른 사람을 향해 보이는 선의 또한 어떤 대가를 위한 행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르 아브르>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추구해 온 일관된 스타일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작품에 속한다. 영화의 마지막 기적에 가까운 해피엔딩이 마치 행복 바이러스처럼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동화같지만, 우리 모두 이렇게 조건없는 원리가 작동하는 공동체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험한 세상에서도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이런 꿈같은 세상 속에 평범한 소시민적 영웅이 존재하고 있다고, 그래서 세상이 아직 살 만하다고 꾸밈없이 조용히 말해준다.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팀장. 영화 속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 즐겨 한다. 저서로 여행 에세이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과 인터뷰집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가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Cinephilo : 엄마 잃은 소년을 구하는 한 편의 동화-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르 아브르>'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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