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자린고비, 스크루지 영감을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주인공으로 만든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1843년에 이 작품이 나온 뒤 영국사회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자선이나 기부에는 관심이 없던 영국의 냉정한 부자들이 우후죽순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힘든 사람을 봐도 눈도 꿈쩍 하지 않았던 스크루지 영감이 자신의 처참한 종말을 예언하는 유령과의 만남을 경험한 뒤, ‘타인과 함께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삶’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처럼 영국의 부자들도 돈을 열심히 벌기만 하고 누구와도 나누지 않는 자신의 메마른 삶을 성찰하게 된 것이다. 스크루지는 유령과의 조우를 통해 ‘내가 죽은 뒤에 아무도 내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오히려 자기가 죽고 나면 그 죽음을 통해 돈을 버는 자들이 뛸 듯이 기뻐할 것임을 알게 된다. “이게 그 영감탱이의 최후군. 생전에 누구 한 명 곁에 오지 못하게 쫓아버리더니 죽어선 우리에게 돈을 벌게 해주네! 흐흐흐!” 스크루지는 그 누구와도 삶의 기쁨과 슬픔을 ‘나눌 줄’을 몰랐기에 그의 마지막은 이토록 참혹한 결말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 『크리스마스 캐롤』 속 삽화 - 유령을 만나는 스크루지
스크루지는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모을까’를 고민하느라 ‘어떻게 하면 그 돈을 의미 있게 쓸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는 큰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이 번 돈을 듬뿍듬뿍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자신이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가혹하게 부려먹기만 했던 직원의 월급을 올려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크리스마스라는 날짜도, 기념일도, 감사와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라는 의미도 싫어했다. 오죽하면 이렇게 말했겠는가. “내 마음 같아서는 그냥,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떠들고 다니는 놈들은 푸딩과 함께 푹푹 끓인 다음 호랑가시나무 가지로 가슴을 푹 찔러 파묻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래도 싸지!” 굳이 기독교 신자가 아닐지라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삶의 의미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소중한 일임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 아닐까. 즉 내 삶의 의미를 홀로 되새기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일임을,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통해 배우지 않는가.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가장 행복해지는 사람은 바로 스크루지 자신이다. 크리스마스에 한 번도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는 그가, 비로소 기쁨을 느끼는 법을 깨닫게 되니. 누구와도 삶의 즐거움을 나누어 본적이 없는 그가, 나눔의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나눔’ 하면 우리는 ‘물질적인 재화’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굳이 자선이나 기부를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나눔을 실천할 기회가 있다. 그것이 바로 교육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뿐 아니라 어떤 곳에서든 누군가에게 ‘배운다’는 느낌을 가지는 모든 순간, 우리는 엄청난 삶의 지혜와 인생의 기술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이다. 특히 100세 시대, 평생교육의 시대로 접어든 요즘 ‘무언가를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일상 속의 나눔이 될 수 있다. 교육에서는 ‘누군가에게 내 지식을 전달해준다’라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많다. 뭔가 특별한 감정을 강하게 나누어야 한다. ‘저 사람이 나에게 온 힘을 다해 뭔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주려 한다’는 강렬한 공감이 있어야만 교육은 비로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배우 에단 호크가 감독으로 활약한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Seymour: An Introduction>를 보며 나는 배움이야말로 최고의 나눔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이지만 실제 인물이 주인공으로 그대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은 한때 최고의 유망주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무대 위의 엄청난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끊임없이 비평가들의 리뷰에 신경을 쓰고 관객들의 미세한 반응에도 상처받는 그 삶을 견디기 힘들었지만,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오직 ‘음악’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그는 피아니스트이자 스타로서의 화려한 생활을 접고 작은 음악 교실을 열었다. 그저 누군가와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만 있으면 되었으니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깨닫는 순간, 그를 괴롭히던 온갖 스트레스와 잡념이 사라졌다. 세이모어의 피아노 레슨을 받은 학생들은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그들은 콩쿠르를 위해서가 아니라, 경쟁이나 뽐내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음악 그 자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세이모어의 열정에 커다란 감명을 받는다.
어떤 학생은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를 세이모어와 함께 연주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이모어 선생님의 레슨을 듣고 있으면, 저는 마치 음악을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느낌, 제가 음악을 작곡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단지 악보를 보고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작곡가가 되어 그 음악을 한 소절 한 소절 만들어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나도 그 학생만큼이나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세이모어의 레슨은 단지 피아노 전공자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경쟁, 콘테스트, 숫자, 순위, 댓글, 비평, 리뷰 등 모든 ‘타인의 시선’에 지쳐버린 우리들에게 세이모어의 오직 음악 그 자체를 위해 자신의 온몸을 바치는 레슨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음악은 경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한 것이니까. 삶 또한 그렇지 않은가. 타인의 시선이나 남과의 비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 깨달음을 학생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바로 그에게는 최고의 예술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꼭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거나 엄청나게 멋진 연주회를 열어서 연주를 뽐내지 않아도 충분한 것이다. 그는 살아있는 매 순간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의 감동을 타인에게 나누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내가 잃어버린 진정한 가르침의 시간’을 되찾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저런 스승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 내가 그런 스승이 될 차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더욱 가슴이 뭉클했다. 나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과연 내가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빠지곤 한다. 나는 있는 힘껏 노력해도 저쪽에서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일 때, 매번 절망하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내 가르침이 부족한 이유는 무언가를 ‘주지 못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아직 제대로 ‘나누지 못해서’임을. 나는 너무 힘을 주어 강조했던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이 내용이 너무 중요하다고, 이건 꼭 알아야 한다고, 힘주어 전달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강의를 들어주시는 분들이 기뻐했던 순간은 ‘내가 무언가를 주려고’ 했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은 꼭 자선이나 기부처럼 사물이나 화폐의 교환이 없어도 가능하다. 오히려 자선과 기부조차도 상업화, 기업화 되어버린 이 시대에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나눔이 되는 일상적 실천이 아닐까. 내가 느끼는 세상의 아름다움, 내가 배운 세상의 지혜들을 내 글, 강의, 대화, 그리고 내 삶을 통해 나누고 싶은 이 마음에서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 ‘준다’는 생각에 매몰된 나머지, 지나치게 긴장하고 이리저리 재어보지 말자. 어차피 우리는 살아있는 한 무언가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감정을 나누고, 대화를 나누고, 의식주를 나누지 않으면 인간은 이 생태계 안에서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다만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함에 따라 우리 삶의 빛깔과 향기가 달라진다. ‘준다’는 생각에 긴장하지 말고, ‘그저 나누자’라는 마음으로 편안해지자. 우리가 나눌 준비만 되어 있다면, 삶은 ‘그에게는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 때문에 결핍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이미 저마다 있는데, 우리가 나누지 못하고 있는 것들’로 인해 더욱 바빠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당신에겐 이미 ‘우리’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수많은 꿈과 재능과 열정이 그득하니까. 우리가 괴로운 것은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눌 마음’이 부족해서이니까.
작가.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월간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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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방랑자 : ‘가진 것’보다는 ‘나눌 마음’이 중요한 시대
정여울
2017-06-21
ㅣ‘가진 것’보다는 ‘나눌 마음’이 중요한 시대
세계적인 자린고비, 스크루지 영감을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주인공으로 만든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1843년에 이 작품이 나온 뒤 영국사회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자선이나 기부에는 관심이 없던 영국의 냉정한 부자들이 우후죽순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힘든 사람을 봐도 눈도 꿈쩍 하지 않았던 스크루지 영감이 자신의 처참한 종말을 예언하는 유령과의 만남을 경험한 뒤, ‘타인과 함께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삶’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처럼 영국의 부자들도 돈을 열심히 벌기만 하고 누구와도 나누지 않는 자신의 메마른 삶을 성찰하게 된 것이다. 스크루지는 유령과의 조우를 통해 ‘내가 죽은 뒤에 아무도 내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오히려 자기가 죽고 나면 그 죽음을 통해 돈을 버는 자들이 뛸 듯이 기뻐할 것임을 알게 된다. “이게 그 영감탱이의 최후군. 생전에 누구 한 명 곁에 오지 못하게 쫓아버리더니 죽어선 우리에게 돈을 벌게 해주네! 흐흐흐!” 스크루지는 그 누구와도 삶의 기쁨과 슬픔을 ‘나눌 줄’을 몰랐기에 그의 마지막은 이토록 참혹한 결말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 『크리스마스 캐롤』 속 삽화 - 유령을 만나는 스크루지
스크루지는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모을까’를 고민하느라 ‘어떻게 하면 그 돈을 의미 있게 쓸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는 큰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이 번 돈을 듬뿍듬뿍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자신이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가혹하게 부려먹기만 했던 직원의 월급을 올려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크리스마스라는 날짜도, 기념일도, 감사와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라는 의미도 싫어했다. 오죽하면 이렇게 말했겠는가. “내 마음 같아서는 그냥,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떠들고 다니는 놈들은 푸딩과 함께 푹푹 끓인 다음 호랑가시나무 가지로 가슴을 푹 찔러 파묻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래도 싸지!” 굳이 기독교 신자가 아닐지라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삶의 의미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소중한 일임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 아닐까. 즉 내 삶의 의미를 홀로 되새기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일임을,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통해 배우지 않는가.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가장 행복해지는 사람은 바로 스크루지 자신이다. 크리스마스에 한 번도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는 그가, 비로소 기쁨을 느끼는 법을 깨닫게 되니. 누구와도 삶의 즐거움을 나누어 본적이 없는 그가, 나눔의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나눔’ 하면 우리는 ‘물질적인 재화’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굳이 자선이나 기부를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나눔을 실천할 기회가 있다. 그것이 바로 교육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뿐 아니라 어떤 곳에서든 누군가에게 ‘배운다’는 느낌을 가지는 모든 순간, 우리는 엄청난 삶의 지혜와 인생의 기술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이다. 특히 100세 시대, 평생교육의 시대로 접어든 요즘 ‘무언가를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일상 속의 나눔이 될 수 있다. 교육에서는 ‘누군가에게 내 지식을 전달해준다’라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가 많다. 뭔가 특별한 감정을 강하게 나누어야 한다. ‘저 사람이 나에게 온 힘을 다해 뭔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주려 한다’는 강렬한 공감이 있어야만 교육은 비로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배우 에단 호크가 감독으로 활약한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Seymour: An Introduction>를 보며 나는 배움이야말로 최고의 나눔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이지만 실제 인물이 주인공으로 그대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은 한때 최고의 유망주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무대 위의 엄청난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끊임없이 비평가들의 리뷰에 신경을 쓰고 관객들의 미세한 반응에도 상처받는 그 삶을 견디기 힘들었지만,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오직 ‘음악’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그는 피아니스트이자 스타로서의 화려한 생활을 접고 작은 음악 교실을 열었다. 그저 누군가와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만 있으면 되었으니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깨닫는 순간, 그를 괴롭히던 온갖 스트레스와 잡념이 사라졌다. 세이모어의 피아노 레슨을 받은 학생들은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그들은 콩쿠르를 위해서가 아니라, 경쟁이나 뽐내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음악 그 자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세이모어의 열정에 커다란 감명을 받는다.
어떤 학생은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를 세이모어와 함께 연주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이모어 선생님의 레슨을 듣고 있으면, 저는 마치 음악을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느낌, 제가 음악을 작곡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단지 악보를 보고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작곡가가 되어 그 음악을 한 소절 한 소절 만들어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나도 그 학생만큼이나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세이모어의 레슨은 단지 피아노 전공자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경쟁, 콘테스트, 숫자, 순위, 댓글, 비평, 리뷰 등 모든 ‘타인의 시선’에 지쳐버린 우리들에게 세이모어의 오직 음악 그 자체를 위해 자신의 온몸을 바치는 레슨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음악은 경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한 것이니까. 삶 또한 그렇지 않은가. 타인의 시선이나 남과의 비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 깨달음을 학생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바로 그에게는 최고의 예술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꼭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거나 엄청나게 멋진 연주회를 열어서 연주를 뽐내지 않아도 충분한 것이다. 그는 살아있는 매 순간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의 감동을 타인에게 나누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내가 잃어버린 진정한 가르침의 시간’을 되찾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저런 스승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 내가 그런 스승이 될 차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더욱 가슴이 뭉클했다. 나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과연 내가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빠지곤 한다. 나는 있는 힘껏 노력해도 저쪽에서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일 때, 매번 절망하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내 가르침이 부족한 이유는 무언가를 ‘주지 못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아직 제대로 ‘나누지 못해서’임을. 나는 너무 힘을 주어 강조했던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이 내용이 너무 중요하다고, 이건 꼭 알아야 한다고, 힘주어 전달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강의를 들어주시는 분들이 기뻐했던 순간은 ‘내가 무언가를 주려고’ 했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은 꼭 자선이나 기부처럼 사물이나 화폐의 교환이 없어도 가능하다. 오히려 자선과 기부조차도 상업화, 기업화 되어버린 이 시대에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나눔이 되는 일상적 실천이 아닐까. 내가 느끼는 세상의 아름다움, 내가 배운 세상의 지혜들을 내 글, 강의, 대화, 그리고 내 삶을 통해 나누고 싶은 이 마음에서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 ‘준다’는 생각에 매몰된 나머지, 지나치게 긴장하고 이리저리 재어보지 말자. 어차피 우리는 살아있는 한 무언가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감정을 나누고, 대화를 나누고, 의식주를 나누지 않으면 인간은 이 생태계 안에서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다만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함에 따라 우리 삶의 빛깔과 향기가 달라진다. ‘준다’는 생각에 긴장하지 말고, ‘그저 나누자’라는 마음으로 편안해지자. 우리가 나눌 준비만 되어 있다면, 삶은 ‘그에게는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 때문에 결핍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이미 저마다 있는데, 우리가 나누지 못하고 있는 것들’로 인해 더욱 바빠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당신에겐 이미 ‘우리’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수많은 꿈과 재능과 열정이 그득하니까. 우리가 괴로운 것은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눌 마음’이 부족해서이니까.
작가.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월간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이야기 방랑자 : ‘가진 것’보다는 ‘나눌 마음’이 중요한 시대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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