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남서쪽 하단, 산방산이 가까이 있는 대정읍에는 모슬포라는 항구가 있다. 11월의 방어잡이와 여름의 자리돔이 유명한 곳이다. 어쩌면 이것은 ‘산업’이고 이들의 생활이다. 그리 즐거울 것이 없다(물론 어획량이 크다면 다르지만). 마을주민들이 각별한 즐거움을 나누던 행사는 따로 있다. 바로 ‘돗추렴(‘돼지추렴’의 제주 방언)’이다.
날씨가 선선해지고 일거리가 줄면 남자들이 모여 작당(?)을 한다. 이는 남자들만의 놀이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관심사가 된다. 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는 돗추렴을 어떻게 편을 지어 하느냐, 누가 누가 편이 되느냐, 더 원점으로 가면 올해 돗추렴을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돗추렴을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지도 관심을 갖는다. 제주에서 돼지는 매우 중요한 가축이다. 단백질과 지방을 공급하는 생물을 넘어, 돼지로 수렴하는 하나의 공동체 의식이 크기 때문이다. 관혼상제 모두 돼지를 얼마나 잘 잡아서 잘 먹었는지가 고갱이가 되고, 관심의 초점이 된다. 제주는 ‘돗도감(돼지도감)’이라는 역할이 있다. 마을에서 배출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다른 마을에서 초빙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마을이 노령화되고 인원이 줄면서 전문 도감이 제주도 전역을 순회한다. 전통적으로 남자에 한한 직종이었으나 최근에는 여자 도감도 있다. 도감의 가장 큰 역할은 돼지를 삶아 인원수에 맞게 잘 잘라 나누는 것이다. 도감은 돈을 받기도 하고, 과거에는 돼지의 특정한 맛있는 부위를 삯으로 받기도 했다. 도감은 일을 대행하는 노동자이지만, 동시에 원시사회의 제사장의 개념도 일부 가지고 있다. 도감은 한마디로 ‘능력 있고 존경 받는 업’을 의미한다.
어쨌든 모슬포의 돗추렴은 뜻이 맞고 가입을 원하는 이들이 모여 돈을 모으는 데서 출발한다. 날짜를 정하고, 돼지를 조달한다. 그것을 나누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함께 요리해서 나눠 먹을 수도 있고, 아니면 지불한 액수나 기호에 따라 부위를 나눠 가진다. 돗추렴을 한다는 건 단순히 돼지고기를 나눠 먹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참여한 사람들의 유대와 친밀감을 공고히 하는 의식이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는 더운 섬이다. 한여름에는 45도 이상 기온이 올라가고 겨울에도 비교적 온화한 날씨를 보인다.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도시국가와 작은 공국,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통일된 지 150여 년의 비교적 짧은 역사 때문인지 ‘이탈리아’라는 통합된 국민 의식이 약한 편이다. 유럽의 거대 국가가 대부분 그렇기는 하지만, 지방 분권이 잘 되어 있고 개별 지방의 독자성이 강하게 지켜지고 있다. 한국은 통일의 역사가 길다. 게다가 1960년대 박정희 정권시대에 농촌의 독자성이 붕괴되고 수도권 과밀화가 진행되면서 지방의 고유성이 많이 탈색된 것과 대조를 이룬다. 한국의 지방 붕괴는 사실 가까운 역사에서 크게 두 번 일어났다. 하나는 조선 말기에 있었던 삼정의 문란이다. 지방 토호와 중앙 파견 관료들의 부패, 거기에 흉년이 여러 번 겹치면서 민란이 일어났고 지역사회의 붕괴가 벌어졌다. 또 하나는 앞서 언급한 박정희 정권의 저곡가 정책으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지방 붕괴다. 이는 곧 농촌 인구의 대규모 이탈을 유발했고, 대도시의 값싼 노동력으로 이어졌다. 산업한국의 신화(!)를 이룬 구로공단은 이런 농촌 젊은 인구의 대거 이탈 —심지어 13, 14세 소녀들도 유인했는데 이른바 ‘산업체 부설 학교’라는 유인책이 있었다— 을 상징한다.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토스카나 주를 도시별로 구분한 지도.
이탈리아 사람은 예를 들면 크게 ‘이탈리아-토스카나-시에나-00마을’로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00마을 출신이라는 정체성이 가장 강하고, 시에나라는 시(市) 권역이 대외적인 자기 정체성이다. 만약 시에나 사람끼리 만나면 그 안에서 또 어느 구역에서 사는가 하는 점이 패를 가르는 기준이다. 영국 런던이 하나의 도시이지만, 여러 개의 권역으로(이는 연고 축구팀으로 또 명확해진다) 나뉘는 것과 유사하다. 토스카나와 이탈리아는 광역의 정체성은 생각보다 약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피렌체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다가 시에나에 대해 ‘아주 멋진 도시’라는 평을 했다. 그러자 상대방이 노골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시에나는 피렌체와 같은 주인 토스카나 소속이다. 그러나 두 도시의 라이벌 의식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반대의 경우, 즉 시에나 사람에게 피렌체가 좋다고 하는 것이 더 문제가 된다. 피렌체가 더 큰 도시이고 토스카나 주의 주도(州都)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탈리아는 지역성이 아주 강하고, 자신의 사는 구체적이고 작은 마을단위에까지 정체성을 입력시킨다.
시칠리아도 마찬가지다. 아프리카와 경계를 이루는 지중해의 섬인 시칠리아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탈을 받았다. 온갖 인종과 종교,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각기 다른 제국들, 심지어는 노르만 혈통을 가진 제국, 신성로마제국도 시칠리아를 무대로 활약했다. 지정학적 요인으로 늘 여타 민족과 국가의 침입을 받아왔고 지배를 당했다. 이런 정서는 시칠리아인이 ‘뭍’에 대해 깊은 불신과 경계심을 갖는 역사적 이유가 되었다. 4.3 이후 더 깊어진 제주도민들의 육지에 대한 불신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시칠리아 민중은 마을단위의 자경단을 늘 요구받았다. 이것은 나중에 지주에 대한 저항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우리도 잘 아는 ‘마피아’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시칠리아인들은 혈통의 연대, 작은 마을 단위의 연대를 공고히 한다.
한번은 시칠리아-라구사 프로빈치아(Provincia)-모디카-00마을에 간 적이 있었다. (앞이 큰 단위이고 뒤로 갈수록 작은 단위다.) 그 00마을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하나의 중요한 행사가 있다. 매주 일정한 날, 일정한 시간대에 그 마을 가운데 설치된 야외 오븐에 여성들이 모이는 것이다. 모두 큰 반죽을 함지에 넣어서 말이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고, 대개 친척이다. 그들은 이스트를 넣어 미리 발효한 밀가루 반죽을 준비한다. 그리고는 야외 오븐에 장작을 지피고 그 안에 자신의 반죽을 넣는다. 말하자면, 개인주의화된 서양에서 드물게 마을주민(친척)들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모여 빵을 구우며 유대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행사가 없다면, 어떤 서양인이라도 현대에는 서로 얼굴을 보고 연대를 유지할 방법이 없다. 텔레비전이 집마다 설치되어 24시간 송출되며, 인터넷 쇼핑몰이 있고,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생활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말 중에 콤파냐(Compagna)라는 말이 있다. 이는 동업자, 친구라는 뜻이다. 영어의 Company는 이 말에서 온 것이다. Compagna는 Com(With) + Pan으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즉 빵(Pan)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이 마을에서도 반죽하고 함께 빵을 빚은 후 일정량을 나누어서 집에 가져갔다. 지금은 행사는 유지하되, 개인주의화된 현상을 반영하여 반죽은 각자 해오고 굽기만 같이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물론 이 행사가 유지되는 중요한 이유도 있다. 시칠리아는 더워서 집에서 오븐을 가동하기 어렵다. 따라서 야외 오븐이 과거에서 현재까지 존재할 수 있었다.
돼지를 잡아 나누든 빵을 함께 구워 먹든 이제 이런 마을의 공동체 의식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아니, 어쩌면 짧은 세월 안에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외적을 맞아 마을 단위로 뭉쳐 싸울 일도, 마을 단위의 정보 공유도, 농사나 협동 노동도 사라져 버린 까닭이다. 201호와 202호는 서로 이름도 모르며, 누가 사는지조차 모른다. 빵을 함께 굽기는커녕 마트에서 함께 빵을 사면서도 옆집 사람인지 모른다.
마을이 사라지고 ‘00로’라는 서양식 지번이 도입된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제 우리는 길만 따라서 이동하고 돌아오는 삶을 살게 되었으며, 더 이상 마을 단위로 입체적인 삶을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 아닌가.
글 쓰는 요리사. 어린 시절 어머니 치맛자락 앞에서 콩나물과 마늘을 다듬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몇몇 인기 있는 식당을 열었다. 한국 식재료를 이용한 이탈리아 요리를 최초로 시도했으며, 세세한 원산지를 표기하는 메뉴 역시 그의 고안이다. 요리하고 쓰는 일이 일과다. 결국 죽기 위해 먹어야 하는 생명의 허망함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먹고 마시며, 그 기록을 남기기 위해 다시 쓴다. 저서로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이 있다. 현재 서교동에서 <로칸다 몽로>라는 술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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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토리아 : 마을에서 돼지 잡기, 그리고 빵 굽기의 신화
박찬일
2017-06-14
마을에서 돼지 잡기, 그리고 빵 굽기의 신화
제주도 남서쪽 하단, 산방산이 가까이 있는 대정읍에는 모슬포라는 항구가 있다. 11월의 방어잡이와 여름의 자리돔이 유명한 곳이다. 어쩌면 이것은 ‘산업’이고 이들의 생활이다. 그리 즐거울 것이 없다(물론 어획량이 크다면 다르지만). 마을주민들이 각별한 즐거움을 나누던 행사는 따로 있다. 바로 ‘돗추렴(‘돼지추렴’의 제주 방언)’이다.
날씨가 선선해지고 일거리가 줄면 남자들이 모여 작당(?)을 한다. 이는 남자들만의 놀이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관심사가 된다. 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는 돗추렴을 어떻게 편을 지어 하느냐, 누가 누가 편이 되느냐, 더 원점으로 가면 올해 돗추렴을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돗추렴을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지도 관심을 갖는다. 제주에서 돼지는 매우 중요한 가축이다. 단백질과 지방을 공급하는 생물을 넘어, 돼지로 수렴하는 하나의 공동체 의식이 크기 때문이다. 관혼상제 모두 돼지를 얼마나 잘 잡아서 잘 먹었는지가 고갱이가 되고, 관심의 초점이 된다. 제주는 ‘돗도감(돼지도감)’이라는 역할이 있다. 마을에서 배출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다른 마을에서 초빙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마을이 노령화되고 인원이 줄면서 전문 도감이 제주도 전역을 순회한다. 전통적으로 남자에 한한 직종이었으나 최근에는 여자 도감도 있다. 도감의 가장 큰 역할은 돼지를 삶아 인원수에 맞게 잘 잘라 나누는 것이다. 도감은 돈을 받기도 하고, 과거에는 돼지의 특정한 맛있는 부위를 삯으로 받기도 했다. 도감은 일을 대행하는 노동자이지만, 동시에 원시사회의 제사장의 개념도 일부 가지고 있다. 도감은 한마디로 ‘능력 있고 존경 받는 업’을 의미한다. 어쨌든 모슬포의 돗추렴은 뜻이 맞고 가입을 원하는 이들이 모여 돈을 모으는 데서 출발한다. 날짜를 정하고, 돼지를 조달한다. 그것을 나누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함께 요리해서 나눠 먹을 수도 있고, 아니면 지불한 액수나 기호에 따라 부위를 나눠 가진다. 돗추렴을 한다는 건 단순히 돼지고기를 나눠 먹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참여한 사람들의 유대와 친밀감을 공고히 하는 의식이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는 더운 섬이다. 한여름에는 45도 이상 기온이 올라가고 겨울에도 비교적 온화한 날씨를 보인다.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도시국가와 작은 공국,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통일된 지 150여 년의 비교적 짧은 역사 때문인지 ‘이탈리아’라는 통합된 국민 의식이 약한 편이다. 유럽의 거대 국가가 대부분 그렇기는 하지만, 지방 분권이 잘 되어 있고 개별 지방의 독자성이 강하게 지켜지고 있다. 한국은 통일의 역사가 길다. 게다가 1960년대 박정희 정권시대에 농촌의 독자성이 붕괴되고 수도권 과밀화가 진행되면서 지방의 고유성이 많이 탈색된 것과 대조를 이룬다. 한국의 지방 붕괴는 사실 가까운 역사에서 크게 두 번 일어났다. 하나는 조선 말기에 있었던 삼정의 문란이다. 지방 토호와 중앙 파견 관료들의 부패, 거기에 흉년이 여러 번 겹치면서 민란이 일어났고 지역사회의 붕괴가 벌어졌다. 또 하나는 앞서 언급한 박정희 정권의 저곡가 정책으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지방 붕괴다. 이는 곧 농촌 인구의 대규모 이탈을 유발했고, 대도시의 값싼 노동력으로 이어졌다. 산업한국의 신화(!)를 이룬 구로공단은 이런 농촌 젊은 인구의 대거 이탈 —심지어 13, 14세 소녀들도 유인했는데 이른바 ‘산업체 부설 학교’라는 유인책이 있었다— 을 상징한다.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토스카나 주를 도시별로 구분한 지도.
이탈리아 사람은 예를 들면 크게 ‘이탈리아-토스카나-시에나-00마을’로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00마을 출신이라는 정체성이 가장 강하고, 시에나라는 시(市) 권역이 대외적인 자기 정체성이다. 만약 시에나 사람끼리 만나면 그 안에서 또 어느 구역에서 사는가 하는 점이 패를 가르는 기준이다. 영국 런던이 하나의 도시이지만, 여러 개의 권역으로(이는 연고 축구팀으로 또 명확해진다) 나뉘는 것과 유사하다. 토스카나와 이탈리아는 광역의 정체성은 생각보다 약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피렌체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다가 시에나에 대해 ‘아주 멋진 도시’라는 평을 했다. 그러자 상대방이 노골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시에나는 피렌체와 같은 주인 토스카나 소속이다. 그러나 두 도시의 라이벌 의식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반대의 경우, 즉 시에나 사람에게 피렌체가 좋다고 하는 것이 더 문제가 된다. 피렌체가 더 큰 도시이고 토스카나 주의 주도(州都)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탈리아는 지역성이 아주 강하고, 자신의 사는 구체적이고 작은 마을단위에까지 정체성을 입력시킨다.
시칠리아도 마찬가지다. 아프리카와 경계를 이루는 지중해의 섬인 시칠리아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탈을 받았다. 온갖 인종과 종교,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각기 다른 제국들, 심지어는 노르만 혈통을 가진 제국, 신성로마제국도 시칠리아를 무대로 활약했다. 지정학적 요인으로 늘 여타 민족과 국가의 침입을 받아왔고 지배를 당했다. 이런 정서는 시칠리아인이 ‘뭍’에 대해 깊은 불신과 경계심을 갖는 역사적 이유가 되었다. 4.3 이후 더 깊어진 제주도민들의 육지에 대한 불신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시칠리아 민중은 마을단위의 자경단을 늘 요구받았다. 이것은 나중에 지주에 대한 저항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우리도 잘 아는 ‘마피아’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시칠리아인들은 혈통의 연대, 작은 마을 단위의 연대를 공고히 한다.
한번은 시칠리아-라구사 프로빈치아(Provincia)-모디카-00마을에 간 적이 있었다. (앞이 큰 단위이고 뒤로 갈수록 작은 단위다.) 그 00마을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하나의 중요한 행사가 있다. 매주 일정한 날, 일정한 시간대에 그 마을 가운데 설치된 야외 오븐에 여성들이 모이는 것이다. 모두 큰 반죽을 함지에 넣어서 말이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고, 대개 친척이다. 그들은 이스트를 넣어 미리 발효한 밀가루 반죽을 준비한다. 그리고는 야외 오븐에 장작을 지피고 그 안에 자신의 반죽을 넣는다. 말하자면, 개인주의화된 서양에서 드물게 마을주민(친척)들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모여 빵을 구우며 유대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행사가 없다면, 어떤 서양인이라도 현대에는 서로 얼굴을 보고 연대를 유지할 방법이 없다. 텔레비전이 집마다 설치되어 24시간 송출되며, 인터넷 쇼핑몰이 있고,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생활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말 중에 콤파냐(Compagna)라는 말이 있다. 이는 동업자, 친구라는 뜻이다. 영어의 Company는 이 말에서 온 것이다. Compagna는 Com(With) + Pan으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즉 빵(Pan)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이 마을에서도 반죽하고 함께 빵을 빚은 후 일정량을 나누어서 집에 가져갔다. 지금은 행사는 유지하되, 개인주의화된 현상을 반영하여 반죽은 각자 해오고 굽기만 같이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물론 이 행사가 유지되는 중요한 이유도 있다. 시칠리아는 더워서 집에서 오븐을 가동하기 어렵다. 따라서 야외 오븐이 과거에서 현재까지 존재할 수 있었다.
돼지를 잡아 나누든 빵을 함께 구워 먹든 이제 이런 마을의 공동체 의식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아니, 어쩌면 짧은 세월 안에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외적을 맞아 마을 단위로 뭉쳐 싸울 일도, 마을 단위의 정보 공유도, 농사나 협동 노동도 사라져 버린 까닭이다. 201호와 202호는 서로 이름도 모르며, 누가 사는지조차 모른다. 빵을 함께 굽기는커녕 마트에서 함께 빵을 사면서도 옆집 사람인지 모른다. 마을이 사라지고 ‘00로’라는 서양식 지번이 도입된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제 우리는 길만 따라서 이동하고 돌아오는 삶을 살게 되었으며, 더 이상 마을 단위로 입체적인 삶을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 아닌가.
글 쓰는 요리사. 어린 시절 어머니 치맛자락 앞에서 콩나물과 마늘을 다듬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몇몇 인기 있는 식당을 열었다. 한국 식재료를 이용한 이탈리아 요리를 최초로 시도했으며, 세세한 원산지를 표기하는 메뉴 역시 그의 고안이다. 요리하고 쓰는 일이 일과다. 결국 죽기 위해 먹어야 하는 생명의 허망함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먹고 마시며, 그 기록을 남기기 위해 다시 쓴다. 저서로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이 있다. 현재 서교동에서 <로칸다 몽로>라는 술집을 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트라토리아 : 마을에서 돼지 잡기, 그리고 빵 굽기의 신화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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