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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쿠스 : 좋은 취미, 나쁜 취미

박문국

2017-03-30

좋은 취미, 나쁜 취미


백제의 21대 군주 개로왕은 바둑을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백제와의 전면전을 앞두고 있던 고구려의 장수왕은 이 사실을 알고 도림이라는 승려를 스파이로 파견한다. 그의 바둑 실력이 국수급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개로왕은 금세 도림의 바둑 실력에 매료되었고, 왕의 신임을 얻은 도림은 감언이설로 개로왕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전쟁 준비 대신 궁궐 공사 같은 것에 집중케 해 백제의 국고를 탕진시킨 것이다.
무리한 공사로 재정 상황이 악화된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막는 것은 무리였다. 전쟁 시작 일주일 만에 방어선이 붕괴되고 도성은 함락되었으며, 개로왕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온조왕으로부터 시작된 한성백제의 역사가 끝장나는 순간이었다.

 

바둑판과 바둑알

▲ ©grimborg


위 내용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으로 취미를 경계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물론 이 내용이 진실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최소한 김부식을 필두로 하는 당대의 유학자들이 취미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것 정도는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유교는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통해 군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정의는 군주에게 더욱 엄격히 적용되는데,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한 가지 예로 태종은 사냥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가 사냥을 나가려고만 하면 대간들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무수한 숙청을 통해 조선 역사상 손에 꼽을 만한 왕권을 자랑했던 태종이 이러니 다른 왕들을 어떠했겠는가? 한편 태조는 격구라는 놀이를 매우 좋아했다. 격구는 말을 타고 격구채를 이용해 공을 치는 놀이인데, 태조가 불세출의 명장 출신인 만큼 그 실력이 엄청났다. 기록을 살펴보자면,

   “태조가 공을 운행할 때에, 말을 달림이 너무 빨라서 공이 문득 돌에 부딪쳐 놀라 거꾸로 달아나 말의 네 발 뒤로 나왔다. 태조는 즉시 위를 쳐다보고 누워 몸을 돌려서 말 꼬리에 부딪쳐 공을 치니, 공이 도로 말 앞 두 발 사이로 나오므로,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몹시 놀라면서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일이라 하였다.”-『태조실록』 총서
 
이런 신기에 가까운 실력을 가졌으니 뽐내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다만 이때만 하더라도 태조의 카리스마가 대단했기에 신하들은 별다른 제지를 하지 못했다. 문제는 다음 임금인 정종 때부터다. 그 또한 아버지를 따라 무수한 전장을 경험한 무인 출신으로 격구를 즐겨했는데, 권력이라고는 전무한 수준이었기에 그가 격구만 하려고 하면 신하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다.심하게는 경서를 강연하는 경연 중에도 뜬금없이 격구를 언급하며 놀이를 경계할 것을 진언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신하들은 조선 사회에서 격구를 뿌리 뽑으려고 노력했다. 격구는 무과의 시험 과목이기도 했는데 세종 때는 아예 시험 과목에서 퇴출시키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격구를 나라를 멸망케 하는 만악의 근원처럼 여긴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다음과 같이 답하며 신하들의 요구를 일축한다.

  “이 법은 황제 때에 처음 시작하여 한나라와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원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 있었던 것이니, 저들이 어찌 폐단을 알지 못하고 하였겠는가. 다만 무예를 익히고자 하였을 뿐이다. 전조의 말기에도 또한 이 일을 시행하였으나, 그들이 나라를 멸망하게 한 것이 어찌 격구의 탓이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7년 11월 20일


정조 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격구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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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격구 장면 ©문화콘텐츠진흥원

격구도 나름의 장점이 있으며 나라의 모든 문제를 격구 하나에 돌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세종은 할아버지나 큰아버지와는 달리 격구를 즐겨한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격구를 옹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세종의 성장배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조선의 임금은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추구해야만 했다. 당연히 세자 시절부터 강도 높은 경서 공부에 몰두해야 한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종은 처음부터 세자로 책봉된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세종은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고 유교 경전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과학, 음악, 군사, 훈민정음 등 조선 전체의 기반을 다시 세우는 광범위한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 세종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스스로의 경험으로 증명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중요한 가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가치에서 벗어나는 작업에 몰두할 때 흔히 시간을 낭비한다고 말한다. 물론 인간은 사회로부터 유리된 존재가 아니기에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가치의 상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스스로 시야를 좁힐 필요도 없다. 그 작업이 어떤 양태를 보이는가, 어떤 면에서 좋고 어떤 면에서 나쁜가를 가늠하는 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실록에 기록된 세종의 말을 빌리자면 다만 그 용심(用心) 여하에 있을 것이다.


한국 전통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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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문국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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