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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쿠스 : 변화하는 우주 - 천동설과 지동설의 세계

박문국

2017-02-02

변화하는 우주 - 천동설과 지동설의 세계


대항해시대의 여명기인 15세기 초, 교회의 일관된 교육을 받은 당대 유럽인들은 지구가 평평하며 바다 끝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절벽이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교리에 합치하는 것이었고 또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념에 저항하는 선각자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또한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고 믿었고 유럽 대륙 서쪽 대서양을 통해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미친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항해를 시도했고, 신대륙을 발견하며 세계를 경악게 했다. 일반적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직접 증명한 것이라고 서술되곤 하지만 사실 이 내용은 미국의 전기작가인 워싱턴 어빙이 후대에 창작한 내용이다. 인류 사회가 중세까지 지구가 평평하다 믿었을 거란 통념이 있으나 이것이야말로 선입견에 불과하다. 이미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피타고라스는 지구가 완전한 구형이라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를 제시했으며, 에라토스테네스는 아예 지구의 둘레까지 계산한 바 있다.


토론 중인 학자들 일러스트

▲ ©Biblioteca Rector Machado y Nunez


이 성과는 이후로도 이어져 아우구스티노나 암브로시오와 같은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은 물론 중세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콜럼버스 시대의 교회와 지식인, 항해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콜럼버스의 항해가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이 내세운 것은 지구의 형태 따위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콜럼버스가 비정한 항해 거리였다. 그는 유럽에서 인도까지의 거리를 실제 거리보다 지구 반 바퀴 가량 짧게 계산했고, 대략적인 지구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던 이들은 이것이 말도 안 된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판단을 한 것은 분명 반대론자들이었다. (인도로 가겠다던 콜럼버스가 도달한 곳이 인도가 아닌 아메리카 대륙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사실 당대 인류를 둘러싼 세계관에 대한 진짜 논쟁은 지구가 둥근가 평평한가가 아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가 아닌가였다. 이른바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결로, 주류 학설인 천동설에 대한 지동설의 맹렬한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다만 여기서도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로 대표되는 보수적 종교세력이 천동설을 교리로 삼고 이에 반하는 지동설을 이단으로써 탄압한 일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실제 당대 교황청은 천동설을 지지하기는 했으나 지동설 연구도 동일하게 허용했다. 지동설을 외치다 화형 당한 조르다노 브루노나 재판을 받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예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으나 브루노는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윤회를 주장하는 등 기독교 교리 전반에 대해 부정하는 입장이었고, 갈릴레이는 교황을 얼간이에 비유했다는 의혹이 있었던 게 문제였다. 물론 이런 사례가 당대 종교의 폭력성을 증명할 수는 있겠으나 지동설을 탄압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천동설이 주류의 위치에 있던 것은 어떤 연유일까? 사실 간단한 문제다. 지금으로써는 믿기 힘들지만, 프톨레마이오스가 『알마게스트』를 통해 천동설을 집대성한 이래 천동설이 지동설보다 훨씬 과학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별들이 각기 다른 원(주전원)을 그리며 지구 주변을 공전한다고 판단했는데, 이것은 매우 복잡한 모양새이기는 하나 어쨌든 별의 움직임에 대한 정교한 수학적 증명이 가능하기는 했던지라 아리스타르고스 등이 주장한 지동설을 누르고 오랜 기간 주류 학설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이 코페르니쿠스로, 폴란드의 주교였던 그는 아리스타르고스의 저작을 접한 뒤, "완벽한 신이 만드신 세계가 천동설의 모델처럼 복잡할 리가 없다"는 오컴의 면도날에 입각한 논리를 내세우며 지동설을 주장하게 된다.


천동설 일러스트

▲ ©Internet Archive Book Images


그러나 그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철학적 직관에 따른 것일 뿐 과학적 관찰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중에 천체의 움직임에 대입해보니 천동설의 주전원이 27개인데 반해 지동설의 주전원은 46개나 되었다. 즉 초기 지동설은 천동설보다 지저분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갈릴레이도 별반 다를 것이 없어서 그의 대표작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에서는 궤변까지 써가며 지동설을 옹호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이 때문에 갈릴레이가 재판을 받을 때 유수의 학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서 그를 비판했다)


반면 비슷한 시기 천동설은 티코 브라헤에 의해 진일보하게 된다. 맨눈으로 천체의 세세한 움직임을 관찰할 만큼 무시무시한 시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당초 지동설에 주목하여 이를 증명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바 있다. 대신 본인의 시력을 활용해 방대한 양의 천체관측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천동설과 지동설의 절충안을 내놓게 된다. 바로 태양과 달은 지구 주위를 돌고 그 외의 행성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 이것은 이전까지 등장한 어떤 모델보다 깔끔했고 또 정확했다. 이로써 천동설과 지동설 간의 논쟁에 종지부가 찍히고 브라헤가 그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듯 했으나 그 시간은 길지 못했다. 그의 제자인 요하네스 케플러가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헤 사후 그의 관측자료를 넘겨받은 케플러는 화성의 궤도를 계산하던 도중 화성의 공전속도가 일정치 않음을 발견한다. 단순한 관측 실수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브라헤의 능력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졌던 케플러는 이른바 '화성의 전투'라 불리는 8년 간의 반복 계산 끝에 행성이 타원운동을 한다는 증명을 내놓는다. 이전까지 천체가 완벽한 원운동을 한다는 것은 천동설 이상의 진리처럼 여겨져 왔다. 케플러 이전까지 아무도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았고, 이것은 코페르니쿠스도 갈릴레이도 마찬가지였다. 케플러의 연구는 이런 통념을 깨부수는 것이었으며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해결하지 못한 지동설의 오류를 단번에 보완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지동설이 천동설을 대체하는 주류설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의 우주적 논쟁을 종교와 과학의 대결, 정확히는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에 대한 종교의 탄압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실상은 과학계 내부의 학술적 대결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종교가 개입한 흔적은 미비하다. 그럼에도 잘못된 인식이 만연하게 된 것은 중세를 암흑시대로 규정하고 비이성적이라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교회의 탓으로 돌리려는 움직임이 오랫동안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역사가, 그리고 사회의 양태가 간단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분법적 사고는 쉽고 간단해 많은 지지를 얻기는 하나 이런 인식은 오류로 귀결되는 일이 잦다. 과거의 인물들은 모두 나름의 기준에 맞는 합리성을 전제로 하여 연구를 이어갔을 뿐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고 축적되며 인류가 우주를 바라보는 인식의 지평도 점차 확장되어 간 것이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이어질 것이다.


한국전통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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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문국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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