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시 세대 간 계층 간 소득에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격차가 생겨버린 사회다.
중산층이 될 수 없다는 낙심은 사회 전체를 달관하게 만들고 자포자기하게 만든다.
이런 현상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1월 20일이면 트럼프 정권이 공식 출범한다. 아직 출범하기도 전이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역대 최저다. 고작 44%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대선전이 이어지는 것마냥 끊이지 않는 온갖 구설과 혹설 탓이다. 일단 트럼프가 대통령 직무를 패밀리 비즈니스로 보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이미 장녀 이방카와 사위 큐슈너가 정권의 실세로 떠올랐다. 사위 쿠슈너는 트럼프 대선 캠프의 초반 실세였던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를 숙청시키며 존재감을 입증했다. 장녀 이방카는 트럼프의 아내인 멜라니아를 대신해서 백악관의 이스트룸을 차지했다. 멜라니아는 일단 뉴욕 트럼프 타워에서 어린 아들을 돌보기로 했다. 트럼프 정권에서 사실상 이방카가 멜라니아를 대신해서 영부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멜라니아는 트럼프의 세 번째 공식 아내에 불과하다.
사실 트럼프의 가족주의는 오랜 신앙과 다름 없다. 투전판이나 다름 없는 뉴욕의 부동산 시장에서 살아남는 과정 중에 트럼프는 숱하게 배신을 하고 배신을 당했다. 트럼프는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사업가가 됐다. 트럼프의 부동산 투자회사인 트럼프 오거나이제이션 역시 전형적인 가족회사다. 이런 트럼프의 모습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협치를 강조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흐름과도 상반된다. 힐러리나 존 케리 같은 대선 주자들을 국무장관으로 기용하며 팀 오브 라이벌 내각을 만들었던 오바마 대통령의 행보와는 대조적이다.
트럼프가 벌이고 있는 만행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러시아 정부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을 제기한 CNN 기자한테 막말을 일삼고 반세기 넘게 취임식 사회를 본 관록의 사회자를 하루 아침에 해고해버리는 일방통행식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트럼프가 추근댔다고 주장하는 미스 헝가리가 등장하고 수년 전 호텔에서 섹스 파티를 즐겼다는 의혹까지 나오고 있다. 트럼프의 행적들은 임기말 오바마가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감동적인 민주주의의 축제와 대조를 이룬다. 오바마는 이미 민주주의의 전설이 됐고 트럼프는 민주주의의 서커스가 됐다. 그런데도 이토록 구시대적인 트럼프는 그토록 미래적이었던 오바마의 뒤를 이어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미국 민주주의는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하다.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정작 원인은 오바마에게 있다. 집권 초 당선자 신분이었던 오바마는 외쳤다. “우리의 중산층을 부강하게 만들어야 우리 경제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의 실정으로 초래된 미국발 금융 위기 속에서 오바마는 중산층 부활을 소리 높여 외쳤다. 방향은 분명 옳았다. 1980년대 이후 이어진 신자유주의는 미국 경제를 극심한 양극화 상태로 몰아넣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 엘리트들이 천문학적인 부를 거머쥘 때 20세기 미국 경제를 이끌었던 중산층 노동자 계층은 서민층으로 추락하는 절망을 맛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월스트리트가 창출하는 막대한 사이버머니에 취해서 이들을 제대로 규제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 경제는 리만 사태를 맞이했다.
이때 미국의 평범한 노동자 계층이 느낀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중산층에서 서민층으로 강등된 것도 억울한데 이젠 잘난 체 하던 월스트리트 여피들의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까지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오바마도 서민층이 돼버린 옛 중산층의 분노를 모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용 붕괴를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설득했다. 대신 내세운 게 중산층 경제론이었다. 오바마도 그들의 분노를 잘 알고 있었단 말이다.
두 번의 임기를 거쳤지만 오바마의 중산층 경제론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CNN은 2015년 2월 「누가 오바마의 중산층 경제의 실질적 수혜자인가?」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오바마의 중산층 경제 정책은 사실상 아이도 있고 맞벌이를 하는 계층에게만 혜택이 돌아갔다. 외벌이이거나 싱글인 중산층에겐 거의 아무런 혜택도 없었다.” 정책의 혜택이 중산층 전체로 확산되지 못한 채 일부 계층한테만 쏠리는 편중 현상이 나타났단 뜻이다. 『이코노미스트』와 『워싱턴포스트』 등도 잇따라 오바마의 중산층 경제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오바마의 중산층 경제 정책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경제적 체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미국의 증산층이 붕괴된 이후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중산층은 1980년대 이후 꾸준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미국 기업들이 생산 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고, 미국 경제가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일어난 필연적인 결과였다. 한마디로 중산층의 경제적 기초를 세울 안정적인 일자리가 줄어들어버렸다. 중산층은 평균치의 학력과 기술력으로도 평균치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의 계층이다. 고학력이거나 고위험 투자를 할 수 있는 경제적 경쟁력을 가진 사람은 이미 중산층 이상을 추구하게 돼 있다. 중산층은 중산급 일자리와 직결되는 계층이란 말이다. 제조업의 전성기였던 20세기에 중산층이 많아진 건 기업들이 이런 일자리를 대거 창출했기 때문이었다. 21세기엔 이런 일자리는 해외로 이전했거나 자동화로 대체된 지 오래다. 중산층의 기반이 되는 일자리 자체가 없는데 중산층에 세금 혜택이 돌아가는 중산층 이코노미를 주장해봐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물론 오바마 행정부도 이 문제를 모르지는 않았다. 법인세를 낮추고 해외로 이전된 생산 기지를 미국으로 이전하라고 부추켰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오바마는 금융 위기로 초토화된 미국 경제를 회복시켰다. 붕괴 직전까지 갔던 월가의 주가 지수는 회복 됐고 미국 경제 성장률이나 실업률도 안정적이다. 그러나 정작 이런 경제 회복에서 소외된 계층이 있었다. 이른바 러스트 벨트의 옛 중산층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서민층으로 추락했지만 과거의 영화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또 그들의 대부분은 백인층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이민자층이 빼앗아갔다고 믿고 있었다. 월가에 대한 시기 어린 분노를 갖고 있었다. 트럼프가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고 결국 오바마가 쌓아올린 눈부신 업적에도 정권은 공화당의 트럼프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트럼프를 당선시킨 건 중산층의 붕괴 현상이었다.
트럼프가 보여주고 있는 반민주적이고 가족주의적이며 마초적인 이미지는 거칠지만 한때 백인 중산층이 흠모했던 모습이다. 서부영화가 전성기였던 시절 존 웨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보수우파 영화인의 대표자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과 연출을 맡은 영화 <그랜 토리노>를 보면 전형적인 트럼프 지지자가 나온다. 그는 포드사가 전성기 시절에 생산한 그렌 토니로를 분신처럼 아낀다. 이젠 일자리에 쫓겨나 은퇴한 노인이 된 남자가 믿는 건 자신과 가족과 총 뿐이다. 물론 <그랜 토리노>는 트럼프가 보여준 그 이상을 보여준다. 노인은 아시아계 이민자를 구하기 위해 갱단과 맞선다. 반면에 트럼트와 트럼트 지지자들은 고립주의 노선을 지지한다. 이민자들을 몰아내고 과거 중산층이던 시절 독점했던 일자리를 돌려달라는 논리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 그런 일자리는 남아 있지 않는데도 말이다. 중산층의 일자리는 이민자들에게 빼앗긴 게 아니라 경제 구조의 변화로 사라진 것인데도 말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인 과거의 중산층은 사라진 것에 집착하는 구시대의 존재들이고 트럼프는 돌려줄 수 없는 것을 약속한 정치인이다. 미국 정치의 운명은 트럼프 정권이 끝날 때 구중산층의 분노가 누구를 향할지 또는 트럼프가 그 분노를 누구에게로 돌려놓을지에 달려 있다.
영화 <그랜 토리노> 포스터
중산층 붕괴에 기반한 트럼프 현상은 사실 미국 만의 현상이 아니다. 브렉시트 역시 붕괴된 중산층이 만든 고립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은 1960년대만 해도 1억 중류사회를 달성했다. 인구 1억 명이 중산층이 됐다는 얘기였다. 지금 일본은 전형적인 격차사회다. 세대 간 계층 간 소득에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격차가 생겨버린 사회다. 일본 청년들이 사토리 세대라고 불리는건 이런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자포자기에서 기인한다. 중산층이 될 수 없다는 낙심은 사회 전체를 달관하게 만들고 자포자기하게 만든다. 이때 다시 고개를 드는 건 정치의 보수화다. 20세기와 같은 중산층 경제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향수 어린 정치 선전이 먹히기 때문이다. 고령화된 인구 대부분이 20세기 일본 경제의 전성기를 기억하고 있고 그 시절을 되돌려주겠다는 정치인에게 투표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전체 가구 대비 중산층의 비중은 1990년대 75%에서 2013년에 67.1%로 줄었다. 반면 빈곤층은 같은 기간에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사실 중산층이 67%라는 것도 통계의 착시일 가능성이 높다. OECD 중위소득 기준에 따라 집계한 것일 뿐 실제로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믿고 있거나 중산층이라고 불릴 만한 계층의 폭은 줄어있을 게 틀림없다.
중산층의 몰락은 이미 한국에서도 가시화된지 오래다.
한국에서도 중산층의 몰락은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본격화됐다. 수출 대기업들은 더 이상 예전만큼 양질의 중간급 일자리를 양산하지 않는다. 청년 계층의 극심한 취업난은 이들 기업들의 높은 수출 성과에도 중산층을 위한 평범한 일자리를 늘리지 않으면서 비롯됐다. 중산층의 위기는 주식과 부동산의 버블로 차례로 이어졌다. 일자리 감소로 인한 소득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중산층들은 자산 투자에 나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작 자산 버블은 언제까지나 지탱될 수 없다. 자산 가치에 기대한 부채 주도 성장이 한계에 다다르면 본격적인 중산층 몰락이 진행된다.
문제는 정권들이 거의 10년째 폭탄 돌리기를 해왔다는 점이다.
수출 대기업 주도 성장이 낙수 효과를 일으키길 기대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구시대적인 경제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저금리를 통한 부동산 가치 상승으로 부의 효과를 노렸지만 이것 역시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다. 실질 소득이 증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조경제’라는 구호 속에서 취업 대신 창업을 하라고 청년 계층을 부추켰지만 결과는 최순실 게이트였다. 한국 역시 20세기 고속 성장 신화를 다시 쓰려다 막다른 길에 몰리긴 여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다를 바 없다. 중산층의 마지막 기대 혹은 향수가 이런 퇴행적 정치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그마저도 하나 둘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중산층의 정치학이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중산층인 부르주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래 민주주의의 열쇠는 늘 중산층이 쥐고 있었다. 서울대 한상진 교수는 이걸 한국식으로 정리한 중민이론을 주장한 적도 있다. 21세기 글로벌 민주주의가 퇴행적인 선택을 거듭하는 이유도 결국 중산층의 위기에 있다. 정확하게는 위기의 중산층이 과거의 경제 패러다임에 머물러 진보적 선택을 하지 못한 탓이다. 21세기 민주주의의 진정한 혁신은 20세기 중산층이 21세기 중산층으로 거듭날 때만이 가능하다.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조준현 교수는 저서 『중산층이라는 착각』에서 과거 패러다임에 갇힌 중산층의 개념을 재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중산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산층 붕괴와 양극화는 경제구조적으로 필연적인 결과다. 양질의 일자리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데 수출성장주도의 경제 패러다임을 재현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틀린 진단인 것이다. 과거의 중산층을 부활시켜달라고 요구하는 순간 중산층의 몰락이 재촉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즉 20세기의 중산층이 멸종될 수밖에 없다. 대신 21세형 중산층을 육성해야 한다. 그러려면 아버지 시대처럼 마이카를 타고 나의 문화 유산 답사를 하던 시절의 중산층 개념을 완전히 잊어야 한다. 전혀 다른 형태의 경제 구조를 만들고 그 안에서 경제인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서울대 교수 5인이 쓴 『당신은 중산층입니까』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도대체 지금 중산층이라는 개념이 유의미한가를 묻는다.
오바마의 실수는 여기에 있다. 경제 구조를 미처 바꾸지 못한 채 ‘미들 클래스 이코노미’라는 구호만 먼저 던졌다. 미국 경제 전체를 살리는게 우선이라 다시 월가에 기댔고 실리콘벨리에 기댔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백인 서민층, 즉 과거 중산층들의 지지를 잃고 말았다.
그들의 갈 곳 없는 마음을 낚아챈 정치인이 트럼프였다. 물론 지금으로선 트럼프에 대한 옛 중산층의 기대는 헛발질로 끝날 공산이 크다. 트럼프의 정책은 우리나라의 ‘창조경제’나 ‘문화융성’만큼 최순실적이라 21세기 세계 경제에선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순실처럼 미국 정치과 경제를 공회전시킬 가능성이 높다.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공식을 대입해서 문제를 풀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오류가 바로 20세기 중산층에 대한 향수와 오해에서 나왔다. 또 21세기 중산층에 대한 정의가 미처 나오지 않아서다. 문제는 나왔다. 이제 전세계 민주주의가 답을 할 차례다.
(기자)「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대중매체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통섭적인 기사를 쓰고 있다. O tvN <비밀독서단>에 출연 중이며 「시사IN」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는 왜』 『장기보수시대』 『사라진 실패』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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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소셜클럽 : 중산층은 없다
신기주
2017-01-19
중산층 붕괴에 기반한 트럼프 현상은 사실 미국 만의 현상이 아니다.
브렉시트 역시 붕괴된 중산층이 만든 고립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일본 역시 세대 간 계층 간 소득에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격차가 생겨버린 사회다.
중산층이 될 수 없다는 낙심은 사회 전체를 달관하게 만들고 자포자기하게 만든다.
이런 현상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1월 20일이면 트럼프 정권이 공식 출범한다. 아직 출범하기도 전이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역대 최저다. 고작 44%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대선전이 이어지는 것마냥 끊이지 않는 온갖 구설과 혹설 탓이다. 일단 트럼프가 대통령 직무를 패밀리 비즈니스로 보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이미 장녀 이방카와 사위 큐슈너가 정권의 실세로 떠올랐다. 사위 쿠슈너는 트럼프 대선 캠프의 초반 실세였던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를 숙청시키며 존재감을 입증했다. 장녀 이방카는 트럼프의 아내인 멜라니아를 대신해서 백악관의 이스트룸을 차지했다. 멜라니아는 일단 뉴욕 트럼프 타워에서 어린 아들을 돌보기로 했다. 트럼프 정권에서 사실상 이방카가 멜라니아를 대신해서 영부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멜라니아는 트럼프의 세 번째 공식 아내에 불과하다.
사실 트럼프의 가족주의는 오랜 신앙과 다름 없다. 투전판이나 다름 없는 뉴욕의 부동산 시장에서 살아남는 과정 중에 트럼프는 숱하게 배신을 하고 배신을 당했다. 트럼프는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사업가가 됐다. 트럼프의 부동산 투자회사인 트럼프 오거나이제이션 역시 전형적인 가족회사다. 이런 트럼프의 모습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협치를 강조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흐름과도 상반된다. 힐러리나 존 케리 같은 대선 주자들을 국무장관으로 기용하며 팀 오브 라이벌 내각을 만들었던 오바마 대통령의 행보와는 대조적이다.
트럼프가 벌이고 있는 만행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러시아 정부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을 제기한 CNN 기자한테 막말을 일삼고 반세기 넘게 취임식 사회를 본 관록의 사회자를 하루 아침에 해고해버리는 일방통행식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트럼프가 추근댔다고 주장하는 미스 헝가리가 등장하고 수년 전 호텔에서 섹스 파티를 즐겼다는 의혹까지 나오고 있다. 트럼프의 행적들은 임기말 오바마가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감동적인 민주주의의 축제와 대조를 이룬다. 오바마는 이미 민주주의의 전설이 됐고 트럼프는 민주주의의 서커스가 됐다. 그런데도 이토록 구시대적인 트럼프는 그토록 미래적이었던 오바마의 뒤를 이어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미국 민주주의는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하다.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정작 원인은 오바마에게 있다. 집권 초 당선자 신분이었던 오바마는 외쳤다. “우리의 중산층을 부강하게 만들어야 우리 경제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의 실정으로 초래된 미국발 금융 위기 속에서 오바마는 중산층 부활을 소리 높여 외쳤다. 방향은 분명 옳았다. 1980년대 이후 이어진 신자유주의는 미국 경제를 극심한 양극화 상태로 몰아넣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 엘리트들이 천문학적인 부를 거머쥘 때 20세기 미국 경제를 이끌었던 중산층 노동자 계층은 서민층으로 추락하는 절망을 맛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월스트리트가 창출하는 막대한 사이버머니에 취해서 이들을 제대로 규제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 경제는 리만 사태를 맞이했다.
이때 미국의 평범한 노동자 계층이 느낀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중산층에서 서민층으로 강등된 것도 억울한데 이젠 잘난 체 하던 월스트리트 여피들의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까지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오바마도 서민층이 돼버린 옛 중산층의 분노를 모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용 붕괴를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설득했다. 대신 내세운 게 중산층 경제론이었다. 오바마도 그들의 분노를 잘 알고 있었단 말이다. 두 번의 임기를 거쳤지만 오바마의 중산층 경제론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CNN은 2015년 2월 「누가 오바마의 중산층 경제의 실질적 수혜자인가?」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오바마의 중산층 경제 정책은 사실상 아이도 있고 맞벌이를 하는 계층에게만 혜택이 돌아갔다. 외벌이이거나 싱글인 중산층에겐 거의 아무런 혜택도 없었다.” 정책의 혜택이 중산층 전체로 확산되지 못한 채 일부 계층한테만 쏠리는 편중 현상이 나타났단 뜻이다. 『이코노미스트』와 『워싱턴포스트』 등도 잇따라 오바마의 중산층 경제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오바마의 중산층 경제 정책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경제적 체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미국의 증산층이 붕괴된 이후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중산층은 1980년대 이후 꾸준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미국 기업들이 생산 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고, 미국 경제가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일어난 필연적인 결과였다. 한마디로 중산층의 경제적 기초를 세울 안정적인 일자리가 줄어들어버렸다. 중산층은 평균치의 학력과 기술력으로도 평균치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의 계층이다. 고학력이거나 고위험 투자를 할 수 있는 경제적 경쟁력을 가진 사람은 이미 중산층 이상을 추구하게 돼 있다. 중산층은 중산급 일자리와 직결되는 계층이란 말이다. 제조업의 전성기였던 20세기에 중산층이 많아진 건 기업들이 이런 일자리를 대거 창출했기 때문이었다. 21세기엔 이런 일자리는 해외로 이전했거나 자동화로 대체된 지 오래다. 중산층의 기반이 되는 일자리 자체가 없는데 중산층에 세금 혜택이 돌아가는 중산층 이코노미를 주장해봐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물론 오바마 행정부도 이 문제를 모르지는 않았다. 법인세를 낮추고 해외로 이전된 생산 기지를 미국으로 이전하라고 부추켰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오바마는 금융 위기로 초토화된 미국 경제를 회복시켰다. 붕괴 직전까지 갔던 월가의 주가 지수는 회복 됐고 미국 경제 성장률이나 실업률도 안정적이다. 그러나 정작 이런 경제 회복에서 소외된 계층이 있었다. 이른바 러스트 벨트의 옛 중산층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서민층으로 추락했지만 과거의 영화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또 그들의 대부분은 백인층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이민자층이 빼앗아갔다고 믿고 있었다. 월가에 대한 시기 어린 분노를 갖고 있었다. 트럼프가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고 결국 오바마가 쌓아올린 눈부신 업적에도 정권은 공화당의 트럼프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트럼프를 당선시킨 건 중산층의 붕괴 현상이었다. 트럼프가 보여주고 있는 반민주적이고 가족주의적이며 마초적인 이미지는 거칠지만 한때 백인 중산층이 흠모했던 모습이다. 서부영화가 전성기였던 시절 존 웨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보수우파 영화인의 대표자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과 연출을 맡은 영화 <그랜 토리노>를 보면 전형적인 트럼프 지지자가 나온다. 그는 포드사가 전성기 시절에 생산한 그렌 토니로를 분신처럼 아낀다. 이젠 일자리에 쫓겨나 은퇴한 노인이 된 남자가 믿는 건 자신과 가족과 총 뿐이다. 물론 <그랜 토리노>는 트럼프가 보여준 그 이상을 보여준다. 노인은 아시아계 이민자를 구하기 위해 갱단과 맞선다. 반면에 트럼트와 트럼트 지지자들은 고립주의 노선을 지지한다. 이민자들을 몰아내고 과거 중산층이던 시절 독점했던 일자리를 돌려달라는 논리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 그런 일자리는 남아 있지 않는데도 말이다. 중산층의 일자리는 이민자들에게 빼앗긴 게 아니라 경제 구조의 변화로 사라진 것인데도 말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인 과거의 중산층은 사라진 것에 집착하는 구시대의 존재들이고 트럼프는 돌려줄 수 없는 것을 약속한 정치인이다. 미국 정치의 운명은 트럼프 정권이 끝날 때 구중산층의 분노가 누구를 향할지 또는 트럼프가 그 분노를 누구에게로 돌려놓을지에 달려 있다.
영화 <그랜 토리노> 포스터
중산층 붕괴에 기반한 트럼프 현상은 사실 미국 만의 현상이 아니다. 브렉시트 역시 붕괴된 중산층이 만든 고립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은 1960년대만 해도 1억 중류사회를 달성했다. 인구 1억 명이 중산층이 됐다는 얘기였다. 지금 일본은 전형적인 격차사회다. 세대 간 계층 간 소득에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격차가 생겨버린 사회다. 일본 청년들이 사토리 세대라고 불리는건 이런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자포자기에서 기인한다. 중산층이 될 수 없다는 낙심은 사회 전체를 달관하게 만들고 자포자기하게 만든다. 이때 다시 고개를 드는 건 정치의 보수화다. 20세기와 같은 중산층 경제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향수 어린 정치 선전이 먹히기 때문이다. 고령화된 인구 대부분이 20세기 일본 경제의 전성기를 기억하고 있고 그 시절을 되돌려주겠다는 정치인에게 투표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전체 가구 대비 중산층의 비중은 1990년대 75%에서 2013년에 67.1%로 줄었다. 반면 빈곤층은 같은 기간에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사실 중산층이 67%라는 것도 통계의 착시일 가능성이 높다. OECD 중위소득 기준에 따라 집계한 것일 뿐 실제로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믿고 있거나 중산층이라고 불릴 만한 계층의 폭은 줄어있을 게 틀림없다.
중산층의 몰락은 이미 한국에서도 가시화된지 오래다. 한국에서도 중산층의 몰락은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본격화됐다. 수출 대기업들은 더 이상 예전만큼 양질의 중간급 일자리를 양산하지 않는다. 청년 계층의 극심한 취업난은 이들 기업들의 높은 수출 성과에도 중산층을 위한 평범한 일자리를 늘리지 않으면서 비롯됐다. 중산층의 위기는 주식과 부동산의 버블로 차례로 이어졌다. 일자리 감소로 인한 소득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중산층들은 자산 투자에 나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작 자산 버블은 언제까지나 지탱될 수 없다. 자산 가치에 기대한 부채 주도 성장이 한계에 다다르면 본격적인 중산층 몰락이 진행된다. 문제는 정권들이 거의 10년째 폭탄 돌리기를 해왔다는 점이다.
수출 대기업 주도 성장이 낙수 효과를 일으키길 기대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구시대적인 경제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저금리를 통한 부동산 가치 상승으로 부의 효과를 노렸지만 이것 역시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다. 실질 소득이 증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조경제’라는 구호 속에서 취업 대신 창업을 하라고 청년 계층을 부추켰지만 결과는 최순실 게이트였다. 한국 역시 20세기 고속 성장 신화를 다시 쓰려다 막다른 길에 몰리긴 여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다를 바 없다. 중산층의 마지막 기대 혹은 향수가 이런 퇴행적 정치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그마저도 하나 둘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중산층의 정치학이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중산층인 부르주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래 민주주의의 열쇠는 늘 중산층이 쥐고 있었다. 서울대 한상진 교수는 이걸 한국식으로 정리한 중민이론을 주장한 적도 있다. 21세기 글로벌 민주주의가 퇴행적인 선택을 거듭하는 이유도 결국 중산층의 위기에 있다. 정확하게는 위기의 중산층이 과거의 경제 패러다임에 머물러 진보적 선택을 하지 못한 탓이다. 21세기 민주주의의 진정한 혁신은 20세기 중산층이 21세기 중산층으로 거듭날 때만이 가능하다.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조준현 교수는 저서 『중산층이라는 착각』에서 과거 패러다임에 갇힌 중산층의 개념을 재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중산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산층 붕괴와 양극화는 경제구조적으로 필연적인 결과다. 양질의 일자리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데 수출성장주도의 경제 패러다임을 재현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틀린 진단인 것이다. 과거의 중산층을 부활시켜달라고 요구하는 순간 중산층의 몰락이 재촉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즉 20세기의 중산층이 멸종될 수밖에 없다. 대신 21세형 중산층을 육성해야 한다. 그러려면 아버지 시대처럼 마이카를 타고 나의 문화 유산 답사를 하던 시절의 중산층 개념을 완전히 잊어야 한다. 전혀 다른 형태의 경제 구조를 만들고 그 안에서 경제인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서울대 교수 5인이 쓴 『당신은 중산층입니까』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도대체 지금 중산층이라는 개념이 유의미한가를 묻는다. 오바마의 실수는 여기에 있다. 경제 구조를 미처 바꾸지 못한 채 ‘미들 클래스 이코노미’라는 구호만 먼저 던졌다. 미국 경제 전체를 살리는게 우선이라 다시 월가에 기댔고 실리콘벨리에 기댔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백인 서민층, 즉 과거 중산층들의 지지를 잃고 말았다.
그들의 갈 곳 없는 마음을 낚아챈 정치인이 트럼프였다. 물론 지금으로선 트럼프에 대한 옛 중산층의 기대는 헛발질로 끝날 공산이 크다. 트럼프의 정책은 우리나라의 ‘창조경제’나 ‘문화융성’만큼 최순실적이라 21세기 세계 경제에선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순실처럼 미국 정치과 경제를 공회전시킬 가능성이 높다.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공식을 대입해서 문제를 풀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오류가 바로 20세기 중산층에 대한 향수와 오해에서 나왔다. 또 21세기 중산층에 대한 정의가 미처 나오지 않아서다. 문제는 나왔다. 이제 전세계 민주주의가 답을 할 차례다.
(기자)「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대중매체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통섭적인 기사를 쓰고 있다. O tvN <비밀독서단>에 출연 중이며 「시사IN」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는 왜』 『장기보수시대』 『사라진 실패』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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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문文紋 : 오베라는 이름의 판타지
서효인
예술이 뭐라고 : 중산층을 향한 비즈니스는 진정한 예술...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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