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의 개념을 정확히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전은 “경제적 수준이나 사회문화적 수준이 중간 정도이면서 스스로 중산층 의식이 있는 사회 집단”이라 설명하지만, 그 ‘중간 수준’이라는 것을 쉽게 가늠하기가 어렵다. 경제적 수준에 대한 중간치는 어떤 통계에 기댈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한국 사회학회의 조사결과 보유 재산 10억 내외, 월 소득 570만 원 정도면 중산층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여유가 있어야 중산층이란 이야기다.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야 사회문화적 수준의 중간 이상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조사에 의하면, 중산층은 거의 없다. 나 또한 아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부분이 아닐 것이다. ‘양극화’라는 단어는 ‘중산층의 붕괴’로 바꿔 써도 무방하다. 우리에게는 중산층이 거의 없어 실종되다시피 하다. 부당한 이득을 대를 이어 추구하는 특권층이 있을 뿐이다. 특권층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는 이 시기에, 우리가 가진 일말의 자긍심과 자존심은 무너지고 있다. 우리가 이런 사회에 살았었다니, 우리가 이런 나라에게 살고 있다니. 우리에게 경제적 중산층은 희미하게 사라졌고, 사회문화적 중산층은 미지수며, 심리적 중산층은 애초에 무너졌다.
프레드릭 베크만 장편소설『오베라는 남자』의 주인공 오베를 우리의 기준에서 중산층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30년을 한 직장에서 일했고, 본인 소유의 주택과 자동차(그는 SAAB만 몬다)가 있다. 연금에 의지해 살아야 하지만 우리처럼 폐지를 주우러 다닐 필요까진 없다. 홀로 살지만 좋든 싫든 이웃과 일정하게 관계하고 있으므로 어느 날 고독사하여 몇 달 후 사회복지사에 의해 시신이 발견될 확률도 적다. 그는 그가 정한 규칙대로 살아야만 하는 완강한 사람인 동시에 버림받은 고양이는 물론, 도움을 요청하는 게이 청소년까지도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기준에서 오베를 중산층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특히 경제적 관점에서 그러하다. 그가 사는 나라인 스웨덴의 복지는 이를 가능하게 한다. 30년 일한 직장에서 원치 않게 은퇴한 노인의 생활은 먹고사는 데 부족함이 없다. 심지어 새로 사귄 친구를 위해 애플 스토어에서 ‘나는 잘 모르겠으니 그냥 여기서 가장 좋은 것을 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게 산다. 북유럽의 복지 정책은 이렇게 되도록 많은 사람이 중산층의 테두리에 머물게 하는 정책이어서, 소설은 그것을 별 일도 아니라는 듯 툭 내어놓는다. 『오베라는 남자』가 우리나라에서 유독 사랑받는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이러한 거리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판타지라 불러도 좋겠다. 만일 같은 책이 우리나라에서 『덕수라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고 치자. 서울 외곽에 단독주택 한 채와 2004년식 현대 소나타를 모는 남자…… 별로 즐거운 상상은 아니다.
거의 모두가 중산층인 북유럽에서 하필 오베를 중산층의 아이콘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가 사는 국가)의 경제적 배경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중산층의 아이콘인 이유는 그가 보여준 사회문화적 수준 덕이다.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가까스로 진입한 사람들의 다음 욕망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중산층 너머의 더욱 안정적인 중산층이 되는 것. 거기에는 수치로 계량되지 않는 문화 향유의 힘은 빠져 있거나 장식물처럼 존재한다. 오베를 품위있는 중산층으로 존재하게 하는 건 북유럽의 복지나 따뜻한 이웃, 상식적인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은 책을 읽을 수 있고, 나와 다른 것을 포용할 수 있고, 나보다 약한 것을 보호할 수 있다.
오베는 백인 남성이지만 새로 이웃이 된 유색인종 파르바네와 진심으로 친구가 된다. 오베는 이성애자이지만 커밍아웃 후 집에서 쫓겨난 소년을 이해하고 돕는다. 오베는 사람이지만 버려진 고양이를 거두고 보살핀다. 오베는 세상을 떠난 아내 소냐를 잊지 못해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삶은 누구보다 윤택하고 입체적이다. 자기 확신이 대단하지만 타인을 포용할 줄 안다. 그에게는 오래 유지하고 지속한 삶이 주는 여유가 있다. 젊은 날의 비극, 청춘을 바친 직장, 스스로 일군 터전…… 그런 것들이 지금의 오베를, 지금의 중산층을, 지금의 사회를 만든다.
우리는 지금 양극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중산층이 있을 수 없는 나라에서 겨우겨우 산다. 특권층에게 법은 멋대로 꺼내 쓰는 소품이 되었고, 서민들에게 경제란 언제나 소생하기 어려운 중환자였다. 나 살기 바쁜 세상에서 중산층은 없다. 길고양이를 죽이고, 소수자를 혐오하며, 약자를 배척하는 것은 중산층의 삶이 아니다. 우리는 중산층이 될 수 있을까? 『오베라는 남자』는 어느 나라에서는 현실이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판타지다.
문문文紋 : 오베라는 이름의 판타지
서효인
2017-01-19
오베라는 이름의 판타지
중산층의 개념을 정확히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전은 “경제적 수준이나 사회문화적 수준이 중간 정도이면서 스스로 중산층 의식이 있는 사회 집단”이라 설명하지만, 그 ‘중간 수준’이라는 것을 쉽게 가늠하기가 어렵다. 경제적 수준에 대한 중간치는 어떤 통계에 기댈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한국 사회학회의 조사결과 보유 재산 10억 내외, 월 소득 570만 원 정도면 중산층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여유가 있어야 중산층이란 이야기다.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야 사회문화적 수준의 중간 이상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조사에 의하면, 중산층은 거의 없다. 나 또한 아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부분이 아닐 것이다. ‘양극화’라는 단어는 ‘중산층의 붕괴’로 바꿔 써도 무방하다. 우리에게는 중산층이 거의 없어 실종되다시피 하다. 부당한 이득을 대를 이어 추구하는 특권층이 있을 뿐이다. 특권층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는 이 시기에, 우리가 가진 일말의 자긍심과 자존심은 무너지고 있다. 우리가 이런 사회에 살았었다니, 우리가 이런 나라에게 살고 있다니. 우리에게 경제적 중산층은 희미하게 사라졌고, 사회문화적 중산층은 미지수며, 심리적 중산층은 애초에 무너졌다.
프레드릭 베크만 장편소설『오베라는 남자』의 주인공 오베를 우리의 기준에서 중산층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30년을 한 직장에서 일했고, 본인 소유의 주택과 자동차(그는 SAAB만 몬다)가 있다. 연금에 의지해 살아야 하지만 우리처럼 폐지를 주우러 다닐 필요까진 없다. 홀로 살지만 좋든 싫든 이웃과 일정하게 관계하고 있으므로 어느 날 고독사하여 몇 달 후 사회복지사에 의해 시신이 발견될 확률도 적다. 그는 그가 정한 규칙대로 살아야만 하는 완강한 사람인 동시에 버림받은 고양이는 물론, 도움을 요청하는 게이 청소년까지도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기준에서 오베를 중산층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특히 경제적 관점에서 그러하다. 그가 사는 나라인 스웨덴의 복지는 이를 가능하게 한다. 30년 일한 직장에서 원치 않게 은퇴한 노인의 생활은 먹고사는 데 부족함이 없다. 심지어 새로 사귄 친구를 위해 애플 스토어에서 ‘나는 잘 모르겠으니 그냥 여기서 가장 좋은 것을 달라’는 요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게 산다. 북유럽의 복지 정책은 이렇게 되도록 많은 사람이 중산층의 테두리에 머물게 하는 정책이어서, 소설은 그것을 별 일도 아니라는 듯 툭 내어놓는다. 『오베라는 남자』가 우리나라에서 유독 사랑받는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이러한 거리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판타지라 불러도 좋겠다. 만일 같은 책이 우리나라에서 『덕수라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고 치자. 서울 외곽에 단독주택 한 채와 2004년식 현대 소나타를 모는 남자…… 별로 즐거운 상상은 아니다.
거의 모두가 중산층인 북유럽에서 하필 오베를 중산층의 아이콘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가 사는 국가)의 경제적 배경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중산층의 아이콘인 이유는 그가 보여준 사회문화적 수준 덕이다.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가까스로 진입한 사람들의 다음 욕망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중산층 너머의 더욱 안정적인 중산층이 되는 것. 거기에는 수치로 계량되지 않는 문화 향유의 힘은 빠져 있거나 장식물처럼 존재한다. 오베를 품위있는 중산층으로 존재하게 하는 건 북유럽의 복지나 따뜻한 이웃, 상식적인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은 책을 읽을 수 있고, 나와 다른 것을 포용할 수 있고, 나보다 약한 것을 보호할 수 있다. 오베는 백인 남성이지만 새로 이웃이 된 유색인종 파르바네와 진심으로 친구가 된다. 오베는 이성애자이지만 커밍아웃 후 집에서 쫓겨난 소년을 이해하고 돕는다. 오베는 사람이지만 버려진 고양이를 거두고 보살핀다. 오베는 세상을 떠난 아내 소냐를 잊지 못해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삶은 누구보다 윤택하고 입체적이다. 자기 확신이 대단하지만 타인을 포용할 줄 안다. 그에게는 오래 유지하고 지속한 삶이 주는 여유가 있다. 젊은 날의 비극, 청춘을 바친 직장, 스스로 일군 터전…… 그런 것들이 지금의 오베를, 지금의 중산층을, 지금의 사회를 만든다.
우리는 지금 양극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중산층이 있을 수 없는 나라에서 겨우겨우 산다. 특권층에게 법은 멋대로 꺼내 쓰는 소품이 되었고, 서민들에게 경제란 언제나 소생하기 어려운 중환자였다. 나 살기 바쁜 세상에서 중산층은 없다. 길고양이를 죽이고, 소수자를 혐오하며, 약자를 배척하는 것은 중산층의 삶이 아니다. 우리는 중산층이 될 수 있을까? 『오베라는 남자』는 어느 나라에서는 현실이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판타지다.
시인, 에세이스트, 출판편집자.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했으며 2011년에는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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