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서전을 정리하다 멈췄다. 벌써 몇 년째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있다. 아버지는 1945년 광복년생이다. 칠순이 넘으셨다. 회고록을 쓰고 싶어하셨다. 도와드리고 싶었다. 정작 초고를 넘겨받고는 쉽지 않겠다 싶었다. 일단 초고가 혼란스러웠다. 주관적인 기억과 객관적인 자료가 무질서하게 혼재돼 있었다. 평생 논문을 써오셨다고 해도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도 어려웠다. 너무 객관적이면 남 같고 너무 주관적이면 놈 같았다. 그러다 다른 책들을 쓰느라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렸다. 그렇게 초고는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다.
아버지의 초고를 읽다가 가장 마음에 걸린 부분이 있었다. 회고록 초고는 직장에서 정년 퇴임하시던 65세까지로 끝나 있었다. 당신께 여쭤봤다. “남자가 직장에서 퇴직하고 나면 뭐 쓸 얘기가 있다고 그래.” 회고록의 말미는 어린 손녀딸에 대한 애정과 기대로 그득했다. 이제 미래는 모두 손녀 세대에게 맡긴다는 의미였다.
은퇴하시고 5년여가 지났다. 어쩌면 아버지의 인생은 은퇴하시기 이전보다 더 바쁘다. 친구 모임과 지인 모임이 무수하다. 매일 단체 카톡방에 불이 난다.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동네까지 대한민국 인맥 사회의 정점에 계신다. 트럼펫에 재미를 붙이시더니 각종 친목 행사에서 단골 연주자로 나서셨다. 할아버지 수염을 뽑는 손녀와 놀아주느라 정신도 없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문득 물었다. 회고록 초고를 매만질 시간이 없어서 죄송한 마음이었다. “아버지, 100세 시대잖아요. 앞으로도 인생의 시간이 많은데 왜 65세에서 글을 마무리하고 싶어하세요? 더 써보세요.” “무슨 쓸 얘기가 있겠어. 이건 그냥 소일하며 사는 거지.”
백세 시대다. 한국 사회의 풍경이 은회색으로 바뀐지 오래됐다. 인구 노령화나 저출산 같은 메가 트렌드에 대한 논의도 이젠 입이 아프다. 이젠 세대 갈등이 더 큰 문제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정치적 이념 갈등 같은 게 아니다. 일자리와 복지와 세금과 기회를 놓고 청년 세대와 노년 세대가 대립하는 모양새다. 청년 세대와 노년 세대가 경제적 이해 충돌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메가 트렌드적인 쟁점 때문에 가려진 미시적인 문제가 있다. 노년 세대가 지닌 노년에 대한 인식이다. 지금의 노년 세대는 정말 갑자기 수명이 연장된 세대다. 살다 보니 80세 이후까지도 인생이 이어지게 돼버렸다. 경제적 준비가 덜 돼 있어서도 문제지만 마음의 준비가 가장 안 돼 있다. 물론 많은 어르신들이 말씀만으론 백세 시대를 준비해야 하고 인생은 길다고 얘기한다. 실제로는 갑자기 늘어난 시간을 버거워한다.
평생을 일만 하고 살아온 세대다. 저축이 미덕이었고 집 사는 게 전부였다. 당연히 삶의 취향을 키울 시간과 돈도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단 말이다. 그러다 갑자기 시간이 늘어났다. 그렇다고 시간을 채워줄 돈이 충분한 것도 아니다. 현금유동성은 낮고 자산이라고 해봐야 부동산이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소일거리를 찾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또래 친구들을 만나서 영화를 보는 정도다. <인천상륙작전>이 흥행한 건 영화를 잘 만들어서가 결코 아니다. 노년 세대에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주제였다. <인천상륙작전>이 신파든 감동적이든, 좋은 싫든 노년 세대한텐 영화를 볼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년 세대는 평생을 시간에 이끌려서 살아왔다. 고등학교 가면 대학가고 대학가면 취직하고 취직하면 출퇴근 시간에 맞춰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세상의 시계에 맞춰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젠 시간이 주어졌다. 정작 시계가 없으면 시간도 없는 세대인데도 말이다. 아버지가 정년 퇴임 이후의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라고 느끼는 건 아버지만의 예외적인 생각이 아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도 여러 소일거리로 일상을 채우지만 본질적으로 그런 것들이 소일이며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똑같다. 시계가 없는 인생의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는 세대에게 정처 없는 시간이란 하루하루 살아갈 뿐, 크게 보면 공허할 뿐이다.
현재의 공허는 과거에 대한 향수로 이어진다. 향수는 아름다운 감정이다. 아버지의 회고록을 정리하면서도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그 시절을 한편으론 그리워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국제시장>을 보면서 아버지가 행복해했던 건 그래서다. 영화로나마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끼셨을 게 틀림없다.
정작 노년 세대 개개인이 느끼는 인생의 향수가 백세 시대 한국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도 있다는 건 몰랐다. 노동인구가 줄어서 경제적 활기가 사라지고 투자 수요가 줄어서 자산 시장이 위축되는 건 세대간 일자리 나누기 같은 정책으로 해결이 가능한 문제다. 정치적 퇴행이 더 큰 문제다. 누구에게나 향수의 대상은 자신이 가장 젊고 활기찼으며 시대의 중심이었던 때다. 노년 세대가 회고적 투표를 하게 되면 한국 정치에서 시대착오적 리더십이 힘을 얻게 된다. 그런 유권자들의 아름다운 향수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지렛대로 이용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퇴진해야 하는 정치 세력이 현재에 무심하고 과거에 기대는 노년 세대의 지지를 얻어서 힘을 유지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 같은 민주주의의 퇴행이 일어났다.
오랜 동안 아버지와는 정치 얘기만 하고 살았다. 서로의 사생활에 관해 말하는 건 부자 지간에도 불편한 일이었다. 정치 얘기는 말하자면 부자 지간의 중립적인 소재였다. 논쟁도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생각해보면 정치 얘기가 아니라 삶의 재미를 더 많이 얘기하고 나눴어야 했다. 현재의 즐거움을 더 많이 느끼게 해드렸다면 과거 시대에 대한 향수를 좀 덜 느끼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열심히 올바르게 살아왔다고 믿는 아버지, 즉 산업화 세대에게 필요한 건 인정이고 존중이었다. 현재를 향한 새로운 의지였다. 65세 정년 퇴임 이후엔 인생이 끝난 것이라고 믿는 아버지 세대의 공허를 미쳐 알지 못했다. 그 진심이 이용당할 줄도 몰랐다. 지금 그 대가를 우리 모두가 치르고 있다.
(기자)「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대중매체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통섭적인 기사를 쓰고 있다. O tvN <비밀독서단>에 출연 중이며 「시사IN」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는 왜』 『장기보수시대』 『사라진 실패』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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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소셜클럽 : 향수
신기주
2016-11-17
향수
아버지의 자서전을 정리하다 멈췄다. 벌써 몇 년째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있다. 아버지는 1945년 광복년생이다. 칠순이 넘으셨다. 회고록을 쓰고 싶어하셨다. 도와드리고 싶었다. 정작 초고를 넘겨받고는 쉽지 않겠다 싶었다. 일단 초고가 혼란스러웠다. 주관적인 기억과 객관적인 자료가 무질서하게 혼재돼 있었다. 평생 논문을 써오셨다고 해도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도 어려웠다. 너무 객관적이면 남 같고 너무 주관적이면 놈 같았다. 그러다 다른 책들을 쓰느라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렸다. 그렇게 초고는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다.
아버지의 초고를 읽다가 가장 마음에 걸린 부분이 있었다. 회고록 초고는 직장에서 정년 퇴임하시던 65세까지로 끝나 있었다. 당신께 여쭤봤다. “남자가 직장에서 퇴직하고 나면 뭐 쓸 얘기가 있다고 그래.” 회고록의 말미는 어린 손녀딸에 대한 애정과 기대로 그득했다. 이제 미래는 모두 손녀 세대에게 맡긴다는 의미였다.
은퇴하시고 5년여가 지났다. 어쩌면 아버지의 인생은 은퇴하시기 이전보다 더 바쁘다. 친구 모임과 지인 모임이 무수하다. 매일 단체 카톡방에 불이 난다.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동네까지 대한민국 인맥 사회의 정점에 계신다. 트럼펫에 재미를 붙이시더니 각종 친목 행사에서 단골 연주자로 나서셨다. 할아버지 수염을 뽑는 손녀와 놀아주느라 정신도 없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문득 물었다. 회고록 초고를 매만질 시간이 없어서 죄송한 마음이었다. “아버지, 100세 시대잖아요. 앞으로도 인생의 시간이 많은데 왜 65세에서 글을 마무리하고 싶어하세요? 더 써보세요.” “무슨 쓸 얘기가 있겠어. 이건 그냥 소일하며 사는 거지.”
백세 시대다. 한국 사회의 풍경이 은회색으로 바뀐지 오래됐다. 인구 노령화나 저출산 같은 메가 트렌드에 대한 논의도 이젠 입이 아프다. 이젠 세대 갈등이 더 큰 문제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정치적 이념 갈등 같은 게 아니다. 일자리와 복지와 세금과 기회를 놓고 청년 세대와 노년 세대가 대립하는 모양새다. 청년 세대와 노년 세대가 경제적 이해 충돌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메가 트렌드적인 쟁점 때문에 가려진 미시적인 문제가 있다. 노년 세대가 지닌 노년에 대한 인식이다. 지금의 노년 세대는 정말 갑자기 수명이 연장된 세대다. 살다 보니 80세 이후까지도 인생이 이어지게 돼버렸다. 경제적 준비가 덜 돼 있어서도 문제지만 마음의 준비가 가장 안 돼 있다. 물론 많은 어르신들이 말씀만으론 백세 시대를 준비해야 하고 인생은 길다고 얘기한다. 실제로는 갑자기 늘어난 시간을 버거워한다.
평생을 일만 하고 살아온 세대다. 저축이 미덕이었고 집 사는 게 전부였다. 당연히 삶의 취향을 키울 시간과 돈도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단 말이다. 그러다 갑자기 시간이 늘어났다. 그렇다고 시간을 채워줄 돈이 충분한 것도 아니다. 현금유동성은 낮고 자산이라고 해봐야 부동산이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소일거리를 찾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또래 친구들을 만나서 영화를 보는 정도다. <인천상륙작전>이 흥행한 건 영화를 잘 만들어서가 결코 아니다. 노년 세대에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주제였다. <인천상륙작전>이 신파든 감동적이든, 좋은 싫든 노년 세대한텐 영화를 볼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년 세대는 평생을 시간에 이끌려서 살아왔다. 고등학교 가면 대학가고 대학가면 취직하고 취직하면 출퇴근 시간에 맞춰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세상의 시계에 맞춰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젠 시간이 주어졌다. 정작 시계가 없으면 시간도 없는 세대인데도 말이다. 아버지가 정년 퇴임 이후의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라고 느끼는 건 아버지만의 예외적인 생각이 아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도 여러 소일거리로 일상을 채우지만 본질적으로 그런 것들이 소일이며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똑같다. 시계가 없는 인생의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는 세대에게 정처 없는 시간이란 하루하루 살아갈 뿐, 크게 보면 공허할 뿐이다.
현재의 공허는 과거에 대한 향수로 이어진다. 향수는 아름다운 감정이다. 아버지의 회고록을 정리하면서도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그 시절을 한편으론 그리워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국제시장>을 보면서 아버지가 행복해했던 건 그래서다. 영화로나마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끼셨을 게 틀림없다.
정작 노년 세대 개개인이 느끼는 인생의 향수가 백세 시대 한국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도 있다는 건 몰랐다. 노동인구가 줄어서 경제적 활기가 사라지고 투자 수요가 줄어서 자산 시장이 위축되는 건 세대간 일자리 나누기 같은 정책으로 해결이 가능한 문제다. 정치적 퇴행이 더 큰 문제다. 누구에게나 향수의 대상은 자신이 가장 젊고 활기찼으며 시대의 중심이었던 때다. 노년 세대가 회고적 투표를 하게 되면 한국 정치에서 시대착오적 리더십이 힘을 얻게 된다. 그런 유권자들의 아름다운 향수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지렛대로 이용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퇴진해야 하는 정치 세력이 현재에 무심하고 과거에 기대는 노년 세대의 지지를 얻어서 힘을 유지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 같은 민주주의의 퇴행이 일어났다.
오랜 동안 아버지와는 정치 얘기만 하고 살았다. 서로의 사생활에 관해 말하는 건 부자 지간에도 불편한 일이었다. 정치 얘기는 말하자면 부자 지간의 중립적인 소재였다. 논쟁도 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생각해보면 정치 얘기가 아니라 삶의 재미를 더 많이 얘기하고 나눴어야 했다. 현재의 즐거움을 더 많이 느끼게 해드렸다면 과거 시대에 대한 향수를 좀 덜 느끼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열심히 올바르게 살아왔다고 믿는 아버지, 즉 산업화 세대에게 필요한 건 인정이고 존중이었다. 현재를 향한 새로운 의지였다. 65세 정년 퇴임 이후엔 인생이 끝난 것이라고 믿는 아버지 세대의 공허를 미쳐 알지 못했다. 그 진심이 이용당할 줄도 몰랐다. 지금 그 대가를 우리 모두가 치르고 있다.
(기자)「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대중매체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통섭적인 기사를 쓰고 있다. O tvN <비밀독서단>에 출연 중이며 「시사IN」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는 왜』 『장기보수시대』 『사라진 실패』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등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360소셜클럽 : 향수'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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