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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방랑자 : 노년의 여행이 아름다운 시간

정여울

2016-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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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노년의 여행이 아름다운 시간

 

여행하다 보면 단체관광 버스에서 우르르 내리는 노인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런데 이분들의 표정보다는 두 사람만 단출하게 다니는 노부부의 표정이 훨씬 밝고 행복해 보일 때가 많다. 강제로 이루어지는 단체관광 쇼핑과 무리한 단체여행 일정에 시달리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무엇보다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노부부 둘이서만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생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몸이 많이 쇠약한 노인들은 이런 용감한 자유여행을 떠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있고 주변 환경이 안정되어 있어야 노년의 커플 여행이 가능하다. 즉 노년기의 자유여행은 그 자체로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의 눈부신 증명인 셈이다.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노인 두명

 

내가 뮌헨에서 프라하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독일인 노부부는 해마다 여름과 겨울 두 번 긴 해외여행을 떠나신다고 한다. 7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이 부부는 오랜 기차여행에도 전혀 지치거나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두 분이서 매번 먼 길 떠나시는 게 힘들지는 않냐”고 물어봤더니, 전혀 힘들지 않다고 하신다. 운전하는 게 아니라 기차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다니니 더욱 편하다고 하셨다. 그들은 큰 부자는 아니었다.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 후 연금을 받는 정도였다. 가방이나 옷도 전혀 화려하지 않았고 소박하고 실용적이었다. 그저 그 노부부의 꾸밈없는 삶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몹시 더운 여름 한 번, 몹시 추운 겨울 한 번, 일 년에 한 번 그렇게 긴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체력과 여유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기쁨이 아닐까 싶었다. 문득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이 세상에 별 새로울 것도 없을 것 같은 노년에는 과연 어떤 여행이 바람직할지 생각해봤다.

첫째, 예술의 아름다움을 깊이 있게 감상하는 여행을 추천하고 싶다. 파리, 런던, 로마 등 대표적인 예술의 도시도 좋지만, 노년의 여행에서는 탈 것을 많이 갈아타는 것보다는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도시 전체를 미술관처럼 바라볼 수 있는 소도시 여행을 추천하고 싶다. 피렌체에 일주일 정도 체류하면서 우피치 미술관을 비롯한 르네상스 미술의 보물창고를 샅샅이 들여다보는 시간도 좋고, 드레스덴에 3박 4일 정도 머무르면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도 보고 옛 동독 건축의 아름다움을 느껴보는 시간도 좋다.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의 생가를 구경하고 시내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차르트 음악 콘서트를 감상해도 좋다. 나는 잘츠부르크에서 생전 처음으로 오르간 독주회에 가보았다. 파이프 오르간의 깊이 넘치는 울림이 심장을 파고드는 듯한 그 시간은 여지껏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남아 있다. 아무런 예상도 준비도 없이 그저 전단 한 장 우연히 보고 간 것이었지만, 그런 뜻밖의 즐거움이야말로 여행의 묘미가 된다. 독주회가 끝난 후 연주자가 직접 관객들에게 파이프 오르간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그 울림과 기능을 설명해주는 시간도 뜻깊었다. 작은 도시에서 소규모의 사람들과 예술의 감동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야말로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체험이 될 수 있다.

둘째, 자연을 깊이 탐험하는 여행을 추천하고 싶다. 젊었을 때는 어떤 뚜렷한 목표에 치중하기 쉽다. 높은 산의 정상으로 올라간다든지, 몇 킬로미터 구간을 몇 분 몇 초 안에 통과한다든지, 몇 개국 몇 도시를 몇 달 안에 여행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뚜렷한 목표를 정하는 여행은 짜릿하고 흥미롭기는 하지만, 삶의 여유를 즐기고 싶은 노년에게는 ‘느리지만, 나답게’ 천천히 나아가는 여행을 더욱 추천하고 싶다. 예컨대 똑같은 알프스라도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있다. 외국인들은 스위스를 통해 알프스로 가는 방법을 가장 많이 선호하지만,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를 통해 들어가는 알프스도 무척 매력적이다. 스위스의 산악열차를 타거나 직접 등반해서 가는 법도 있지만, 나는 독일의 엘마우라는 곳에서 가르미쉬파르텐키르헨을 거쳐 가는 알프스가 정말 매력적이었다. 이렇게 ‘낮고 평탄한 알프스’ 또한 그 나름의 서정적인 매력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루크에서 알프스를 즐기는 것도 무척 행복했다. 일단 인스부루크라는 도시 자체가 매력적인데,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도나우 강의 아름다움과 옛날식으로 지어진 목조건물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고, 어딜 가나 친절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모습도 좋았고, 알프스의 정상에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올라갈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물론 알프스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아니지만, 인스부루크에서 경험할 수 있는 알프스의 매력은 바로 외강내유의 아름다움이었다. 겉으로는 강하고 가파르고 숨 가빠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잔잔하고 평화로우며 다정한 알프스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노년이 된 후에도 다시 오고 싶고, 다시 올 수 있는 곳’이 내게는 가장 좋은 여행지인데, 인스부루크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아름답되 복잡하지 않고, 소박하지만 외지지 않은 곳이라 더욱 좋았다.

 

구름 사이 비치는 햇빛

 

셋째, 자기를 성찰하는 여행이야말로 노년기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젊은 시절에도 자기를 성찰하는 여행은 가능하지만, 노년기만큼 다채롭고 풍요로운 의미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특히 성지순례 같은 경우에는 청년들보다 노인들이 훨씬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깊이 있게 고민하고,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경우가 많다. 아직 인생에서 엄청난 고뇌를 겪어본 적이 없는 청년들에게 성지순례는 체력단련이나 극기훈련과 유사한 체험이 되기 쉽지만, 이미 산전수전 다 겪어본 노인들에게 성지순례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 전체를 돌아보는 시간여행의 의미를 띨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현재-미래의 드넓은 시간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내 인생에서 잘한 것은 무엇인지, 후회되는 일은 무엇인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언제인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걷고 또 걷는 여행이야말로 노년기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산티아고, 갠지스 강, 시엠레아프, 어디라도 좋다. 인생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는 성찰의 장소라면 어디든, 이 세상을 넘어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아름다운 노년기의 여행 장소가 될 수 있다.

 

도로 위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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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여울
정여울

작가.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월간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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