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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대한 생각 : K의 마지막 삶과 노년의 비밀

이성민

201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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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K의 마지막 삶과 노년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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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뒤에 들어갈 만한 말로 ‘청년’과 ‘노년’ 중 그냥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노년’을 고를 사람은 없거나 혹은 있어도 드물 것이다. ‘영원한 청년’이라는 말은 종종 사용하지만, ‘영원한 노년’이라는 말은 저주가 아니라면 사용하기 힘들 것이다. 제우스가 티토노스에게 불사(不死)를 선사하면서 불로(不老)를 빠뜨린 것은 분명 저주였다. 하지만 노년에 이른 사람을 ‘영원한 청년’으로 지칭한다면, 이는 저주가 아니라 칭송이다. 이제 팔순을 넘긴 시인 고은이 지금까지 ‘영원한 청년 시인’으로 불리고 있듯이 말이다. 청춘이 그렇듯 노년도 다른 사정이 없는 한 인간의 삶이 반드시 거치는 시기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기는 그다지 인기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인기야 예전에도 없었겠지만, 오늘날은 더욱 노년에 정당성이나 존재 이유도 부여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노년은 늦게 도래할수록 좋은 것이며, 많은 사람이 최선을 다해 늙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젊음의 샘 Lucas Cranach the Elder, 1546

▲ <젊음의 샘> Lucas Cranach the Elder, 1546

 

그렇다면 오늘날 가장 큰 부러움의 대상이 될 삶은 어떤 삶일까? 아마도 평생을 청춘으로 살다가 어느 날 불현듯 세상을 뜨는 삶일 것이다. 영원한 ‘청년’으로, 영원한 ‘소녀’로, 영원한 ‘젊은 오빠’로 살다가 말이다. 물론 그렇게 살다 가는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아니 어쩌면 오히려 그렇기에, 사람들은 마음만은 청춘이고 싶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비록 이해는 되나 실은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생각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질문해보면 된다. 평생을 청춘으로 살다 죽는 것이 하나의 이상으로서 찬양되거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노년이란 무엇일까? 오늘날은 의학이 발달하여 노년의 시간이 평균적으로 늘어났다. 10년도 긴 시간이겠지만, 오늘날 노년은 20년이 될 수도 30년이 될 수도 있다. 죽음을 앞둔 그 시간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어떤 고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질문해보는 것을 처음부터 허용하지 않는―혹은 그러한 질문에 대해 노년의 본질적 가치를 젊음에 종속시키는 답만을 허용하는―오늘날 만연한 이러한 생각은 철학 없는 선의가 어떻게 삶에 부정적으로 개입하고 문화를 끌어내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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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청춘으로 산 사람에게 죽음은 더 늦게 다가갈 수 있겠지만, 다가가는 방식만은 분명 더 급작스러울 것이다. 죽음은 ‘불현듯’의 양태로 그 사람에게 찾아간다. 평생을 청춘으로 산 사람은 심리적으로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알다시피 청춘의 심리학은 불멸이니까 말이다. 어느 날 아침 깨어나 보니 자신이 유명해진 것을 발견하는 일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온 죽음은 결코 반갑지 않다. 물론 평생을 청춘으로 살았으므로 더는 여한이 없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만약 노년을 청춘으로 되돌리는 기술이 발명된다면, 더는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곧 밝혀질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죽음을 앞둔 자신의 몸에 그 기술을 적용하기로 한다면 그는 분명 여한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런데 그 기술이 노년이 된 인간의 몸에 반복해서 적용될 수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언제까지 청춘으로 돌아가는 일을 되풀이할까? 그 사람은 영원회귀를 할까? 처음에는 그렇게 하려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삶을 되풀이하면 할수록 그 모든 삶이 단 한 번 사는 어떤 삶보다 못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 말이다.

 

산다는 것은 혼자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년이 되어 다시 청춘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전의 삶에서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그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또한 새롭게 변화된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그런데 삶은 다시 시작될 수 있으므로, 그는 어쩌면 처음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한하게 펼쳐진 가능성에서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그에게는 이제 단 한 명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개념도 남지 않게 될 것이고, 누군가가 그를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하더라도 그 사실의 중요성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유한한 인간적 삶의 원리를 벗어난 그의 매번의 삶은 삶의 고유한 빛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이제 여한 없이 살아보았다는 바로 그 느낌도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마지막 결심을 할 것이다. 처음으로 새롭게 말이다. 즉 그는 이제 마지막 단 한 번의 삶을 산 후에 이제 진정으로 아무런 여한 없이, 여한이 있다면 나와 함께 삶을 나누었던 사람들을 뒤로하고 죽는 것만이 여한인 그런 방식으로 죽겠다고 결심할 것이다. 이제 그 결심을 한 사람을 K라고 불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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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회춘의 기술이 없더라도, 인간 유한자의 단 한 번의 삶이 K의 마지막 삶처럼 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청년’의 삶이 칭송되는 세계에서 점점 더 희미해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K의 마지막 삶 같은 것을 현실에서 발견하기 힘든데, 이는 분명 회춘의 기술이 아직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역으로 회춘의 기술이 없는 현실에서 K의 마지막 삶 같은 것이 도대체 어떻게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일까?

 

분명 사막에도 꽃은 핀다. 아직 회춘의 기술도 없고 영원한 청년의 이상이 문화를 지배하는 이 현실에서도 우리는 드물게 K의 마지막 삶을 살고 있는 노인을 만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우리도 어쩌면 가야만 될 그 길을 이미 앞서갔던 사람”인 케팔로스에게 물었듯 노년에 관해 묻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알아내고 싶은 것은 다만 노년이 “험하고 힘든 것인지 아니면 순탄한 것인지”가 아니라 노년이 품고 있는 인간 삶의 비밀 같은 것이다.
K는 삶을 반복해서 살아봄으로써 삶 그 자체를 온갖 가능성이 자유롭게 펼쳐진 가운데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시각을 획득한 이후에 그는 이제 마지막 단 한 번의 삶을 다만 일회적인 삶에 불과하지 않고 자유가 실현된 삶으로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K가 아닌 우리는 언제 그와 같은 시각을 획득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평생 그와 같은 시각을 획득할 수 없다면 유한한 우리는 결코 K의 마지막 삶을 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K의 마지막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회춘 기술이 없더라도, 인간 안에 무한성의 역량이 잠재되어 있어야 한다. 그 역량을 무엇으로 부를 것인지는 여기서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유의 역량’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이성의 역량’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소통의 역량’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을 무엇으로 부르건, 유한한 인간 안에 그와 같은 무한성의 역량이 없다면 K의 마지막 삶은 이 세계에서 가능하지 않다.

 

젊었을 때 우리는 이제 막 개화된 우리 자신의 자유를 세계 안에서 실현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청년은 자유를 실현하는 시기다. 우리는 그렇게 자유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는 천재들의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가령 화가 이중섭이 그러했다. 그들은 노년을 살지 못한 채 요절했다. 천재들의 운명에서 우리가 느끼는 묘한 공감은 우리 안에 노년의 비밀, 즉 삶의 비밀에 대한 뿌리 깊은 회피가 자리 잡고 있음을 증언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오랫동안 죽음과도 죽음의 필연성을 내포한 이 세계 자체와도 화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천재’나 ‘영원한 청년’ 같은 표현들이 내포하고 있는 삶의 비정상적인 강렬함으로 은폐하고 있다.

 

이중섭, 천재들의 운명에서 우리가 느끼는 묘한 공감은 우리 안에 노년의 비밀, 즉 삶의 비밀에 대한 뿌리 깊은 회피가 자리 잡고 있음을 증언한다.

▲ 이중섭, 천재들의 운명에서 우리가 느끼는 묘한 공감은 우리 안에 노년의 비밀, 

즉 삶의 비밀에 대한 뿌리 깊은 회피가 자리 잡고 있음을 증언한다.

 

하지만 무한성의 잠재력이 오히려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진 역량이라고 할 때, 그러한 역량이 우리의 삶에서 실현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 확인하게 될까? 즉 우리는 언제 우리가 K의 마지막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관점에 이르게 될까?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 황혼 녘의 날갯짓에 철학의 비밀만이 아니라 젊음을 영원히 갈망하는 자들이 언제나 놓치고 마는 삶의 비밀이 있다.
이 비밀에 입문하지 못한 노인들은 청춘으로 살거나 고집 센 아이가 된다. 그리고 노년이 아주 멀지만은 않은 나에게 입문 이후의 노년의 삶은 실존적 탐구 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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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성민
이성민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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