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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philo : 위험과 낭만이 공존했던, 자유의 광장 - 빌 어거스트 감독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이화정

2016-10-18

위험과 낭만이 공존했던, 자유의 광장

빌 어거스트 감독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리스본행 야간열차

 

포르투칼의 수도 리스본. 이 도시에 ‘야간열차’를 타지 않고 도달하는 건 왠지 반칙 같은 기분이 든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가끔 나는 그 길을 향한 리스본행 야간열차 시간표를 검색해본다. 눈을 감으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곳의 붉은 지붕과 돌길, 그 위를 가로질러 느리게 가는 노란 트램, 그리고 푸른 바다가 일렁이는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늘 똑같이 반복되던 수업을 팽개치고 리스본으로 향한 베를린 자유대학교 고전문헌학 교수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에게도 리스본의 공기는 아마 그렇게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비 오는 어느 날 그는 자살을 시도하던 한 여성이 남긴 붉은 코트 속 책 한 권과 15분 후에 출발하는 리스본행 티켓을 들고, 그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 프라우를 찾는 여정을 떠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그렇게 즉흥적으로 리스본이라는 낯선 도시에 도착한 그레고리우스와 그가 찾는 책의 저자 아마데우의 행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액자식 구성으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아주 기묘한 여행기다.


리스본의 봄, 뜨거웠던 그 날의 광장을 찾아가는 길


폭우 속 책 한 권을 남기고 사라진 붉은 코트의 여성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처럼 그레고리우스를 리스본이라는 도시로 인도한다. 낡은 숙소에 자리를 잡은 그는 매일 아마데우의 흔적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리스본의 봄


분명 그는 현재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곳에서 맞닥뜨린 광경은 40여 년간 지속되어온 안토니오 살라자르의 독재정권과 식민지 정책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포르투갈의 민주화 운동 ‘카네이션 혁명’ 당시였다. 1974년 4월 25일 새벽,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 대위가 지휘하는 구국운동 MFA(Movimento das Forças Armadas)는 포르투갈의 민주화를 위해 시내 곳곳에 있는 광장을 점거했다. 쿠데타 발발 소식에 시민들은 집에 머무르라는 MFA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거리로 몰려나왔다. 혁명군에게 붉은 카네이션을 선사했고, 병사들은 그 꽃을 총구에 꽃아 감사를 표했다. 붉은 카네이션은 곧 비폭력을 뜻하는 상징물로 남았으며, 이날은 ‘리스본의 봄’으로 불리게 된다.

 

레지스탕스였던 귀족가문 출신의 의사 아마데우(잭 휴스턴)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노동자 계급 출신의 조지, 그리고 이 두 남자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여인 에스테파니아(멜라니 로랑)는 이토록 뜨거운 세월을 통과해 그들이 목숨을 내걸고 찾고자 했던 자유를 쟁취한 이들이다. 그들은 함께 막역한 우정을 나누었고, 열렬히 사랑했으며, 서로를 배신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아내와 이혼한 후 무료하고 적막한 삶을 살던 중년의 교수 그레고리는 젊은 혁명가 아마데우와 친구들의 행적을 따라 리스본 곳곳을 거닌다. 지금은 거리의 예술가들이 즐비하고, 각종 레스토랑과 각종 쇼핑을 위한 상점이 자리 잡은 호시우 광장에서 코메르시우 광장에 이르는 길은, 불과 몇십 년 전 젊은이들에게는 독재정권에 맞서 목숨을 내걸고 찾고자 했던 쟁취해야 할 장소이자, 공공의 목표였다.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신념에 가득 찬 그때의 혁명가들이 거닐던 그곳에는 서로를 믿고 지지하던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었고, 그 관계가 만들어주는 ‘낭만’이 공존하고 있었다.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하루를 시작하고, 혼자 체스를 두고, 혼자 잠을 청하며 무료한 생활에 젖어있는 그레고리우스.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 된 현재.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살고 있는 광장에서는 찾기 힘든 뜨거운 온도를 바로 그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선택하고자 하는 광장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다 보면 백발백중 그레고리우스처럼 그가 손에 들었던 책을 들고 트램이 가로지르는 리스본의 광장과 가스등이 켜진 밤거리를 찾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힐 것이다. 지구 반대편, 멀리 있는 영화의 거리가 이 정도의 반향을 일으킨 지점 중 하나는 그레고리 교수의 일탈이 가져온 그의 인생관의 변화를 우리가 목도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의 인생은 리스본 기차에 오르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스본에 온 첫날, 그레고리우스는 사고로 늘 끼던 두꺼운 안경 대신 가벼운 새 안경을 맞춘다. 익숙함에서의 탈피,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것은 그에게 꽤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혼한 후 늘 평범하고 새로운 것 없는 일상을 살던 그는 리스본으로 온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안과의사 마리아나(마르티나 게덱)에게 데이트 신청 한 번 변변하게 못 하는 소극적인 남자였지만, 결국 학교 교장의 계속되는 전화를 받지 않는 용기를 내기도 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서서히 변해간다. 아마데우스에 대한 의문이 풀리고 난 후 또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우연’이 이끌어 이곳 리스본까지 왔지만, 이제는 평범한 일상이라는 ‘필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 기차역에 마중을 나온 안과의사 마리아나가 그를 향해 이렇게 묻는다. “그냥 여기 머물면 안 돼요?” 그레고리우스는 그 물음에 어떤 선택을 했을까? 또 다른 우연에 운명을 맡겼을까, 아니면 다시 일상의 필연으로 돌아갔을까? 아마 그 질문을 지금의 나에게, 혹은 여러분에게도 줄 수 있을 것 같다.

 

필름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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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화정
이화정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팀장. 영화 속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 즐겨 한다. 저서로 여행 에세이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과 인터뷰집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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